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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녀의 결심 (8/101)


제8화 그녀의 결심
2022.07.28.


소명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출……출장 갔어요.”

“아하, 그러시구나? 뭐 드릴까나?”

“소주 한 병 주세요.”

“소주?”

여사장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살짝 미소를 짓더니 소주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소명은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소주의 뚜껑을 열었다.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자꾸만 잡히지 않아 답답했다. 머릿속에 지성이란 남자가 계속 맴을 돌았다.


“어쩌려고 이러니? 너.”

소명은 처음으로 홀로 술집에 앉아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도 낯선 모습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들 친구들과 아니면 연인과 다정한 모습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곳에서 그녀만이 혼자였다. 그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녀는 남편에게 처절히 짓밟히고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소명은 먹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시고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자꾸만 걸음이 옆쪽을 향했다.


‘이럴 때 지성이가 있었으면 부축해줬을 텐데. 아니면 약국으로 뛰어가 술 깨는 약을 사줬을지도 모르지. 그만하자. 뭐가 좋다고 나 싫다고 도망간 놈을.’

소명은 비틀비틀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시간 도하는 아파트 안에 있는 편의점에 들렀다. 나오는데 멀리서 어떤 여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도하의 눈에 왠지 낯이 익었다.


‘아뿔싸! 옆집 여자다. 이런.’

도하는 너무 난처해졌다.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 만남이라니.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분명히 있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혼자였고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아파트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그만 힘에 부쳐 벤치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쉬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도하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못 본 체하고 뒤돌아서서 다섯 걸음 정도 걷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인상을 확 쓰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 거 참. 흠.”

그는 인상을 구기며 또 소명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를 위아래로 쳐다보다 그는 깜짝 놀라 눈 사이에 힘이 팍하고 들어갔다.

그녀의 발바닥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발을 하고 걸어 다니다니.


“휴.”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하는 다시 편의점으로 걸어가 소독약과 연고를 사서 돌아왔다.

그가 편의점에 갔다 돌아오는 동안에도 소명은 고개를 푹 숙이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요.”

도하가 소명을 불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명이 얼굴을 들자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왜 이러고 계세요?”

도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가세요.”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다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냉정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혀가 꼬여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발로 어디를 걸어 다닌 거예요?”

소명은 자신을 혼내는 투로 말하는 이 남자가 너무 짜증나고 귀찮았다.


“그냥 가시라 구……여. 신경 끄……세여.”

“아니, 어떻게 그래도.”

도하는 소명의 옆자리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발에 소독약을 바르고 연고를 덧바른 후 커다란 밴드를 붙여 주었다.


“뭐 하시는……거……예요? 하지 마요.”

도하를 보며 소명이 인상을 확 쓰며 눈을 부라렸다.


“발이 피투성이잖아요.”

도하는 묵묵히 소명의 발에 밴드를 붙였다. 소명은 도하를 보며 소리를 꽥 질러댔다.


“꺼져. 꺼……지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아. 가요. 자.”

도하는 소명에게 등을 내밀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업혀요. 어차피 옆집이니까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 아니면 남편을 부르시든가.”

“내가 알아서…… 갈 거니까. 아저씨. 가라고.”

“남편분께 전화를 하시는 게 낫겠네요. 제가 업어 드린다고 한 건 생각이 짧았네요.”

“나 남편 같은 거 없어요, 가세요, 내가 혼자서 갈 거니까.”

소명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다 얼마 못 가 다시 바닥에 털썩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도하는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은 다음 그녀의 팔을 당겨 그녀를 업었다.

그는 편의점과 집 사이의 거리가 그나마 가까운 게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안 놔!”

“그냥 가요.”

도하는 소명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축 늘어진 소명을 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술이 너무 취해 소명은 반항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의 등에 자꾸만 따뜻한 느낌이 나더니 어느새 축축해졌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의 등에서 울고 있었다. 도하는 그녀가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무엇이 그녀를 이리도 아프게 한단 말인가? 그녀가 너무 가여웠다.

집 앞에 도착해서 그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얼룩진 얼굴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비틀비틀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바닥에 뒹구는 액자 틀이 보였다.


‘결혼사진?’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가여웠지만 남의 부부 문제에 끼어드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도하는 오지랖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었다.

곧이어 그녀의 현관문이 쾅하고 닫혔다.

그는 그녀가 다시 유리 조각을 밟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 그만, 여기까지만.’

도하는 더 이상 그녀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그에게 힘겹고 긴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샤워하고 바로 침대로 올라갔다. 몸은 피곤해서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는데 정신은 맑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는 계속 그녀를 생각하는 자신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그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기에. 오늘은 조금 뒤척이다 잠을 자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얼마나 잤을까 소명은 흐린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먹지 않던 술을 먹어서인지 속이 엄청나게 쓰려 왔다.

그녀는 본능에 따라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지성은 항상 그녀를 꼭 안아 주었었는데. 항상 둘이 자다가 혼자 깬 아침은 너무도 쓸쓸하게 느껴졌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다리를 바닥에 디뎠을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어? 이게 뭐지?”

그러다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결혼 액자를 던진 일부터, 술을 잔뜩 마시고 아파트 앞 편의점 벤치에 앉아 있던 일까지.

그러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까아악. 난 몰라.”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괴로워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허, 미쳤지. 미쳤어.”

도하의 등에 업혀 그의 옷이 다 젖도록 울었고 유리 파편에 다쳐 피가 흐르는 그녀의 발을 도하가 소독해주고 반창고까지 붙여주었던 것이었다.


“나, 왜 이렇게 추하냐? 정말.”

모르는 남자를 이렇게나 힘들게 하다니. 소명은 옆집 대표님을 어떻게 볼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다 목이 너무 말라서 간신히 주방으로 걸어가려고 일어섰다.

발바닥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아 참, 유리 조각 치워야겠다.”

소명은 우선 주방에 가서 물을 마시고 바닥에 뒹구는 액자 틀과 사진을 집어다가 쓰레기통에 팍 처넣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유리 파편을 주워 신문지에 싸고 청소기를 돌렸다.

거실에 있던 소명과 지성의 결혼사진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액자 없이 텅 빈 그녀의 벽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액자를 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소명은 몇 번 겪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대표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지성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

지성은 오늘 라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와 함께 타투숍을 방문했다.

그녀는 그와의 사랑의 징표를 서로에게 남기고 싶어 했다.

지성은 몸에 무언가를 새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또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는 걸 꺼렸기에 그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인데 그녀를 위해서는 뭘 못 할까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 일은 의미 있는 이벤트였다.

라희는 지성이 타투를 한다고 했을 때 너무나 기뻐했다. 그녀의 사랑이 너무나 과분해서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가 웃으면 그도 행복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타투 책을 보며 모양을 고르기 시작했다.

너무 크고 티가 나는 걸 하고 싶어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그녀는 작은 이니셜을 새기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팔목 안쪽에 서로의 이니셜을 새기기로 했다.

지성은 라희의 RH를 라희는 지성의 JS를. 타투이스트의 작업이 끝나고 두 사람은 흡족해하며 서로의 팔목을 맞대고 바라보았다.


“오빠, 나 너무 행복해.”

그녀의 입에서 행복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이렇게 늦게 그녀를 만난 것인가가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지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지성의 어머니 정 여사였다.


“어…… 엄마.”

[지성아, 오늘 언제쯤 오니?]

“응?”

[너 소명이가 말 안 했어?]

“무슨 일인데?”

[오늘 같이 저녁 먹자고 소명이한테 전화했는데.]

“나 밖이야. 엄마가 전화해서 소명이 오지 말라고 해.”

[지성아? 왜 무슨 일 있어? 엄마는 아들 얼굴 보고 싶은데.]

“엄마, 나중에 자세히 말할 거지만 놀라지 말고 들어.”

[아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래? 사람 무섭게.]

“나 소명이랑 이혼할 거야.”

[뭐라고?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며칠 안에 들를게. 나 소명이랑 지금 같이 안 있으니까 소명이 오지 말라고 해. 엄마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 할까 겁난다.”

[갑자기 이혼이라니…….]

“엄마, 그런 줄 아세요. 저 끊어요.”

지성은 당황해하는 정 여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은 지성을 라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라희야? 표정이 왜 그래?”

“오빠 어머니가 나 싫어하시면 어쩌지?”

“그럴 일 없어. 엄마는 항상 내 편이야. 라희야, 기분도 좋은데 우리 백화점이나 갈까?”

“백화점은 왜?”

“우리 라희 백이나 하나 사줄까 하고.”

“오빠 정말?”

“가자.”

라희는 지성과 타투도 하고 그가 곧 사준다는 명품 가방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는 좁은 오피스텔에서 안 살아도 되고, 돈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루 빨리 지겨운 그의 부인을 떼어내기만 한다면.

*****

한편 도하는 침대에 누워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본가에 너무 가기가 싫으니 자꾸만 일어나서 준비하기가 귀찮아졌다.

얼마나 노력해서 얻어낸 독립이란 말인가?

그런데 하루가 멀다고 자꾸만 본가에 들르라고 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본가에 가면 어김없이 계속되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그를 지치게 했다.

그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영원한 사랑이 있기나 할까? 그가 이성을 보고 가슴 뛰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계속 한숨이 새어 나오고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의 핸드폰이 주책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역시나 아버지 차 회장의 전화였다.


“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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