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어차피 우린 정략 결혼할 사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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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어차피 우린 정략 결혼할 사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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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어차피 우린 정략 결혼할 사이잖아.
2022.08.01.
[준비하고 있는 게냐?]
“…….”
[오늘 약속 꼭 지켜야 한다. 너한테도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래.]
부자의 대화는 짧고 간결했다. 두 번씩이나 전화하고 확인을 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보아하니 오늘은 정말로 가야 하는 약속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서 욕실로 향했다. 도하는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 초등학생 같은 표정으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정말이지 쉬고 싶었다.
화초에 물도 주고 화원에도 가서 새로운 아이도 데려오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오랫동안 읽지 못한 소설도 보고 싶은데…….
그는 샤워하고 옷을 고르고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완벽 그 자체였다.
그의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었다.
그의 큰 키, 떡 벌어진 어깨가 그의 핏을 살려주었고 우수에 가득 찬 검은색 눈동자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그는 차 열쇠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슬쩍슬쩍 소명의 집 현관문을 훔쳐보았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건가?’
도하는 자꾸만 눈물로 얼룩진 소명의 슬픈 얼굴이 생각났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금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 본가로 가기 위해 운전을 시작했다.
본가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커다란 식탁에 여러 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차 회장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도하가 들어서자 차 회장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와라.”
“어머니는요?”
“이제 곧 나올 거다.”
도하는 식탁에 앉았다. 차 회장은 도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얼굴은 나빠 보이지 않는구나. 집 나가서 사니 좋으냐?”
도하는 차 회장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네.”
“이제 너도 나이가 있으니 결혼할 생각 해야지.”
“저는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네가 하도 생각이 없으니 이 아비가 자리를 마련했다.”
“네?”
그때 도하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도하야, 왔니? 왜 이렇게 말랐어?”
도하의 어머니 은영은 도저히 어머니라고 믿을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중년이 넘은 나이지만 그녀는 도하의 누나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동안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긴 웨이브 머리가 그녀를 더 우아하게 보이게 했으며 운동으로 단련된 몸에 입은 원피스는 그녀의 몸매를 더욱 살려주고 있었다.
사실 차 회장은 은영과 재혼한 사이였다. 그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한참을 방황할 때 은영을 만났다. 그는 밝고 쾌활한 은영의 에너지에 반해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은영도 중후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그의 매력에 빠져 차 회장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던 은영과의 결혼은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엄청난 반대에도 두 사람의 의지는 강력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 도하가 생겨났다.
차 회장은 늦은 나이에 아이가 생기자 도하를 애지중지 사랑으로 키웠다.
세 사람만 있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혼한 은영이 시도 때도 없이 친인척들에게 은근한 무시를 받는 걸 옆에서 지켜본 도하는 엄마가 너무 가엽게 느껴졌다.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엄마가 받아야 하는 고충은 너무도 컸다.
재벌가의 은근한 거만과 멸시에 도하는 결혼이란 것에 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영은 자기 아들 도하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지만 결혼 얘기만 하면 화를 내는 아들이 너무 걱정스러웠다.
“도하야. 왜 도우미 아주머니를 안 쓰는 거야? 일도 많을 텐데 청소랑 집안일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왜 고집을 피우니? 엄마 속상하게.”
“아, 엄마. 좀…….”
“그래도 우리 아들 보니 아주 좋다. 엄마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니?”
“그래서 왔잖아.”
“그래.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준비됐어. 여보, 이 회장님 식구들은 언제 와요?”
“곧 올 거야.”
“네.”
“아버지, 이 회장님 식구라뇨?”
“아버지가 오늘 너 보여주신다고 초대하셨어. 서빈이 유학 갔다 돌아왔다더라.”
“하아, 제가 분명 싫다고 했는데. 두 분 왜 저를 안 도와주세요?”
“도하야, 선을 넘는 행동은 아버지가 용서 못 한다.”
도하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엄할 때는 엄한 차 회장이 도하를 보며 경고했다.
도하는 하는 수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윽고 이 회장 네 식구들이 도착했다. 차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회장을 웃으며 반겼고 뒤따라 들어오는 오 여사와 서빈을 은영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 회장 식구들이 자리에 앉자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다.
모두 웃고 떠드는데 도하는 고개를 숙인 채 식사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
서빈은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고 은영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우리 서빈이랑 도하랑 언제 날을 잡아도 되지 않나 싶은데…….”
차 회장이 오늘 식사 모임의 이유인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차 회장의 말을 들은 이 회장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럼, 이제 나이가 딱 결혼할 나이지. 도하는 우리 서빈이 어떠냐?”
이 회장이 도하를 바라보며 슬쩍 떠보자 주변의 시선들이 모두 도하에게 집중되었다.
“……저는 결혼할 여자가 따로 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이만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도하가 수저를 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자 차 회장과 은영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도하의 무례한 행동에 이 회장과 부인의 표정이 어둡게 굳어졌다. 그들의 표정을 살핀 은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애써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리 도하가 결혼보다는 일하고 싶어 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는 걸 이번에 서빈이가 유학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에 도하를 몰래 불렀어요. 그래서 아마 좀 화가 났나 봐요. 속인 거 다 제 잘못이에요. 너무 죄송해요. 자식을 버릇없게 키운 것 같네요.”
은영의 말에 서빈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나 같아도 싫다는 일 계속하라고 하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요. 도하 오빠가 말한 거 사실이 아니면 좋겠어요. 저 예전부터 도하 오빠 좋아했는데.”
“서빈이 마음 예쁘기도 하지. 서빈아 이해해줘서 고맙다.”
“뭘요. 저 도하 오빠랑 인사 좀 하고 올게요.”
“그럴래?”
서빈은 밖으로 나간 도하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도하가 그의 차 앞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멀리서 서빈이 도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도하는 화난 얼굴로 서빈을 노려보았다.
“잠깐만. 잠깐이면 돼.”
도하는 차 문을 열려다 그 자리에 멈춰 서 서빈을 기다렸다. 그녀를 기다리는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오빠, 4년 만에 만나 놓고 바로 가면 어떡해? 내가 섭섭하잖아.”
“넌 끝까지 네 생각만 하는구나.”
“그게 무슨 말이야?”
“너랑 나 이렇게 둘이 얼굴 마주 보며 이야기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어떤 사인데?”
약 올리는 말투에 도하는 화가 치밀었다. 그녀를 쏘아보며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도하가 입을 열었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서로 사랑하는 사이?”
“간다. 앞으로 다신 안 봤으면 좋겠다.”
도하가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 하는 순간 서빈이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럴 수 있을까? 어차피 우린 정략 결혼할 사이잖아.”
“난 너랑 죽어도 결혼 안 해.”
“왜? 나는 4년 동안 오빠 그리웠는데.”
“너는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니?”
도하는 굳은 표정으로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서빈은 당당한 표정으로 도하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난 오빠랑 결혼하기로 했어. 그게 우리 서로 윈윈하는 거잖아.”
도하는 듣기 싫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뗐다.
“나 사랑하는 여자 있어.”
그는 곧 시동을 걸었고 가속 페달을 밟고 서빈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말에 놀란 서빈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도하의 차를 바라보았다.
한때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처음에는 다정한 오빠 동생 같았지만, 사춘기 시절에 도하는 점점 남자다워지고 서빈은 점점 여성스러워져 갔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 남자 대 여자로서 호기심을 느꼈고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도하는 서빈이 그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길 바랐다.
하지만 서빈은 호기심 많고 모험심 강한 여자였다. 오랜 도하와의 사이가 지겨워질 무렵 그녀는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도하 몰래 한 그녀의 이중생활이 발각되기 전까지.
그녀는 결혼은 도하와 꼭 하고 싶었다. 기업 대 기업으로도 완벽했고 차기 회장인 그의 부인이 되는 것도 그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들키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도하를 사랑했다. 하지만 서빈에게는 다른 자극도 필요했다.
서빈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바라보던 도하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허망하고 슬픈 눈빛을.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고 두 번 다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학을 가게 되었고 유학을 하면서도 그녀의 연애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도하가 될 거라고 늘 생각했었다.
유학을 마치고 그녀는 떨리는 맘으로 그를 만나러 왔는데.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니. 화가 치밀었다.
‘어차피 넌 내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
서빈은 어떻게 하면 도하의 새 연인을 떼어버릴까 궁리했다.
도하는 운전하면서도 서빈을 생각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는데 돌아오는 건 그녀의 배신뿐이었다.
그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준 상처가 너무 아파서 그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녀와 이별 후 더더욱 그는 차가워졌고,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을 무섭게 쳐냈다.
차라리 혼자가 편했다. 혼자면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그를 건져준 것이 화초였다.
화초는 그가 사랑을 준 것만큼 무럭무럭 자라 주고 그의 옆에서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는 결혼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 그에게 4년 만에 뻔뻔하게 서빈이 나타나니 다시 가슴에 불이 타올랐다. 한동안 잠잠했던 그녀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이제 겨우 잊을 것 같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입에서는 끊임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댔고 도하는 인상을 쓰며 발신인을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도하는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미련한 놈. 이 아비 얼굴에 먹칠하니까 속이 시원하냐?]
“죄송합니다.”
[너 사귀는 여자가 누구야?]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도하는 아버지와 도저히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어서 서둘러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잔잔하던 그의 일상에 커다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도하는 차를 몰고 그의 집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에 도착했다. 옆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옆집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발은 괜찮아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