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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너무나 당당한 내연녀의 태도 (10/101)


제10화 너무나 당당한 내연녀의 태도
2022.08.04.


버림받은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소명이 왜 그렇게 힘들어할까 생각하다가 그녀도 자신과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았나 하고 어렴풋이 예상했다.

도하는 집 안으로 들어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에 맨 넥타이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며 손으로 잡고 느슨하게 풀었다.

그는 잊었다고 생각한 서빈이 다시 나타나 마음이 심란했다.

그는 갈증이 나 냉장고로 걸어가 캔 맥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밖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소명은 침대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있었다.

침대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잡고 지성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소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을 깨물고 소명은 가슴속부터 끓어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의 마음과 같지 않게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의 가슴이 아려왔다. 너무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가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그녀는 숨죽여 오열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이 눈물이 멈출 수 있을까?

그녀는 오늘도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시간 개념도 잊은 듯 얼마나 이렇게 앉아 있었을까?

오늘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망가져 간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졌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소명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의 단짝 친구 지민이의 전화였다. 지금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 망설였다.

한참을 울리던 핸드폰의 벨소리가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울렸다. 아무래도 지민이 소명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간신히 핸드폰을 잡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명아? 무슨 일 있어? 요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일은……. 아무…… 일도 없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흑. 흑흐흑. 지민아!”

[너 울어?]

“나 어떡해?”

[무슨 일인데 그래? 말을 해야 알지?]

“지성이가 이혼하재.”

[뭐라고? 너 기다려. 내가 금방 갈게.]

“아니야. 너 힘든데. 안 와도 돼.”

[내가 가야겠거든.]

소명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통화는 끊긴 뒤였다. 지민은 소명과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였다.

결혼을 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만큼 좋아하는 친구여서 소명은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통화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소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헐레벌떡 지민이 뛰어 들어왔다.


“소명아?”

“지민아.”

“너 얼굴이 왜 이래?”

“지민아……. 나 너무 힘들어.”

소명이 울먹이자 지민이 소명에게 다가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소명은 지민의 품에 안긴 채 한참을 서럽게 울어댔다.

지민은 아무 말 없이 소명의 등을 토닥였다. 얼마 후 간신히 진정이 된 소명은 지민과 거실에 마주 앉았다.


“소명아, 나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너 아니면 죽고 못 산다고 졸졸 쫓아다니던 사람이 이게 말이 돼?”

“…….”

“괜찮아? 하아, 괜찮을 리가 없지.”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화나서 죽여 버리고 싶다가도 지성이 없이 내가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하아. 소명아. 너 지성이 용서하고 살 수 있어?”

“……사실 잘 모르겠어. 너무 혼란스러워.”

“나쁜 놈.”

지민은 화를 참지 못하고 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지민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근데 너 밥 안 먹었지?”

“…….”

“네 몸은 너 스스로 챙겨야지. 이러고 있는다고 그 새끼가 알아준대? 일어나.”

“어?”

“침대에 가서 누워 있어. 내가 얼른 가서 죽 사오고 장도 좀 봐올게.”

“아니야. 지민아. 나 입맛 없어.”

“야! 홍 소명. 너 이럴래? 네가 이러면 나 너무 속상하잖아.”

“미안해.”

“왜 네가 미안해. 미안하긴. 얼른 들어가서 누워 있어.”

“고마워. 너한테라도 털어놓으니 너무 속이 후련하다.”

지민은 소명을 일으켜 침대로 데려갔고 소명은 침대에 누웠다.

지민이 이렇게 옆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게 생각되었다. 곧 지민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자신의 집으로 와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녀, 지민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지민아, 고마워!’

얼마 뒤 지민은 양손에 가득 장을 봐 와서 소명의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그리고 뜨거운 김이 나는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후후 분 뒤 소명에게 건넸다.


“자, 어서 먹어.”

“고마워.”

소명은 죽을 먹기 시작했다. 입맛이 너무 없어 도무지 맛을 알기 어려웠다. 그녀가 먹는 것을 지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입맛 없더라도 먹어. 그래야 생각도 잘하지. 배가 고프면 생각도 하기 힘들어.”

“너무 고마워. 지민아. 흐흐흑.”

“그만 울어. 그 자식 때문에 울지 마. 네 눈물이 아까워.”

“지민아, 나 잘살 수 있을까?”

“소명아, 네가 어때서. 커리어도 탄탄하지. 아직 젊지. 얼굴 예쁘지. 성격 좋지. 뭐가 문제야. 지성이 그 자식 너 놓치고 평생을 후회할 거다.”

“…….”

“기운 내.”

지민이 소명을 쳐다보며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지민이 돌아가고 다시 소명만 혼자 남았다.

소명은 지민에게 다 털어놓고 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지금 그녀에게 일어난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다.

소명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베란다로 뛰어갔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성과의 일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다행히 죽은 화초는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시들시들해 보였다.


‘미안해.’

소명을 화초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화초에 물을 주는 일을 얼마나 행복해했었는데…….

화초에 물을 주고 다시 침대로 올라가는 순간 핸드폰의 문자 알림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녀는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만나 뵙고 싶습니다.]

[누구시죠?]

[지성 오빠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성 오빠라는 말에 소명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볼까요?]

[제가 근처로 가죠.]

[어디?]

[집 앞 카페가 좋겠네요.]

[오면 연락 주세요.]

[네.]

소명은 너무나 당당한 내연녀의 태도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얼굴은 봐야겠다고, 남의 가정을 파탄 내려는 그녀의 낯짝은 어떻게 생겼나 봐야 했다.

아니 그녀를 직접 눈으로 보면 지성에 대한 마음을 굳힐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도무지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며 욕실로 걸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그녀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소명은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화장대에 앉았다. 회사에 다닐 때는 나름의 화장도 열심히 했었는데…….

그녀는 파우치를 꺼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긴장이 되어서인지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썹을 그리는데 자꾸만 삐뚤어졌다.

그녀는 물티슈로 삐뚤어진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지우기 시작했다.


‘울면 안 돼. 초라하게 보이기 싫어.’

그녀는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참을 시도한 끝에 드디어 화장이 끝났고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회사 다닐 때 입었던 깔끔한 정장을 입고 초조한 마음으로 메시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아파트 근처 카페 후에 있어요.]

소명은 가방을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걸어가기에는 조금 먼 거리라 차를 끌고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차를 대고 내리려고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극도의 긴장감이 그녀를 힘들게 내리눌렀다. 그녀는 간신히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카페 안으로 걸어갔다.

카페 안의 사람들을 살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남편 지성이었다.

지성은 한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고 둘은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는 듯 킥킥거렸다.


 
순간 눈이 휙 돌아간 소명은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소명은 그들 뒤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녀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소명은 지성과 나란히 앉아 있는 긴 웨이브 머리카락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손에 가득 쥔 후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잡아당겼다.

순간 벌어진 일이라 라희는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한 채 고개가 뒤로 확 하고 젖혀졌다.

머리카락이 뜯겨나가는 고통으로 라희는 자신도 모르게 찢어지는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소명은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소리쳤다.


“어디 훔칠 게 없어서 남의 남편을 넘봐?”

“아악, 악, 이거 놔. 너무 아파. 아악.”

소명은 손에 힘을 더 주며 있는 힘껏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소명의 행동에 깜짝 놀란 지성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라희의 자지러지는 비명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홍 소명, 이게 무슨 짓이야.”

지성은 소명의 뒤에 다가가 그녀의 배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지성의 힘에 소명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에 소명은 일어나지 못한 채 괴로워했고 지성은 라희에게 달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무 아파. 오빠 부인 왜 이렇게 무식해.”

지성은 소명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키려 했다.


“일어나. 홍 소명. 라희한테 사과해. 이게 무슨 짓이야? 무식하게.”

바닥에 엎드린 소명의 두 손에는 라희의 빠진 머리칼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소명과 라희가 카페에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했다.

지성이 카페 사장에게 사과하고 충분히 손해배상을 해준다는 약속을 하며 화난 사장을 설득한 끝에 경찰은 다시 돌아갔다.

소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지성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란 여자를 사랑했던 내가 참 한심스럽다.”

“지성아? 너는 내가 안 보여?”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아? 직접 눈으로 보여줘야 네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거든. 충격 좀 받았냐?”

옆에서 화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라희가 씩씩대며 말했다.


“당신, 내가 폭행으로 고소할까? 누군 손이 없는 줄 알아?”

“뻔뻔한 년.”

소명은 무서운 얼굴로 라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빠, 나 저 여자 무서워. 눈 좀 봐.”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자.”

소명이 씩씩거리며 라희에게 다가가자 지성이 소명의 팔목을 잡았다.


“그만해. 내가 사랑하는 여자야.”

“나쁜 놈.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 네 부인은 나야. 나라고.”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더 질질 끌면서 추해지지 말자.”

“추한 건 당신인 것 같은데.”

그때 중저음의 날카로운 남자 목소리가 지성의 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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