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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것에 대한 연민? (12/101)


제12화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것에 대한 연민?
2022.08.11.


소명은 입맛이 없었지만 먹으려고 노력했다.

도하는 그녀가 밥을 먹는 걸 보고 나서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소명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계속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언뜻 보기에는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지 않고 열심히 밥만 먹고 있는 이 사람. 이 행동도 자신을 위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렁탕을 뜨다 말고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고마워요.”

소명의 고맙다는 말에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진심이 서려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애써 의연한 척 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너무 슬퍼 보였다.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아파졌다.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 그녀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색한 듯 설렁탕 먹는 것에 집중하며 말했다.


“힘내요.”

소명도 입맛이 없어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 상황이었지만 도하의 말을 듣고 힘이 나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도하와 소명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소명은 어색했는지 도하를 바라보다 말했다.


“저번에 농원은 무슨 일로?”

“아. 사실 제가 화초를 좋아해서.”

도하는 자신이 화초 키우는 걸 좋아한다는 걸 처음 말한 사람이 소명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냥 그녀에게는 말해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해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하의 말에 소명은 반색하며 물었다.


“어머, 저도 좋아하는데. 홈 가드닝이 제 취미예요.”

“그래요?”

도하도 그녀의 취미가 자신과 같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저 나중에 우리 집 아이들 보러 오세요.”

“아이들이요?”

“아니, 그게 아니고 화초들.”

“아하. 하하하.”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웃고 있었다. 소명도 잠시 지성의 일을 잊고 그와 웃고 떠들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하는 운전하며 소명에 말을 건넸다.


“저 홈 가드닝 하신 거 오늘 보여주면 안 돼요?”

“네?”

도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소명이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제가 곤란한 부탁드린 거면 나중에 보여주셔도 돼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죄송해요.”

“아니에요. 곤란하기는요. 구경시켜드릴게요.”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무례한 부탁을 한 자신의 행동이 놀라웠다. 다행히도 그녀가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자꾸만 그녀를 남들과 다르게 대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도하는 차분하게 감정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것에 대한 연민이고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인간 대 인간의 마음일 뿐이야.’

그동안 자신의 상처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는데 자신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도움이 된다면 기쁠 것 같았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곧 집 앞에 도착했고 도하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말하는 그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가 너무 따뜻해서 놀라 소명의 눈이 커졌다.


“저, 편하게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네. 그러세요.”

소명과 도하는 눈인사를 나누고 잠시 헤어졌다.

집으로 들어온 소명도 편한 티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다.

지성이 없는 이 공간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혼자 있으니 라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분노를 도무지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꾸만 슬퍼지려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해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그때 현관에서 벨이 울렸고 소명은 표정 관리를 하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현관 앞에는 간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도하가 서 있었다. 슈트를 입을 때와 또 트레이닝 복을 입을 때와는 다른 이미지였다. 생각보다 많이 어려 보여서 놀랐다.


“들어오세요.”

도하는 그녀의 집으로 들어왔고 소명은 앞서가 베란다 불을 켜고 도하를 안내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집 베란다로 향했고 베란다로 들어서자마자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한 초록빛 세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가 가드닝한 베란다 정원은 수준급이었다. 그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입이 탁하고 벌어졌다.

화초들 하나하나 건강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어, 이건 올리브 나무네요?”

“화초만 보시고도 이름 아시네요. 잘 모르시는 분도 많은데……. 대표님이 저랑 취미가 같으니 너무 반가워요.”

“어, 이건 타마린드고 유칼립투스도 있네요. 너무 예쁘고 멋지네요. 솜씨가 대단하세요.”

도하는 여태껏 자신이 본 어떤 정원보다 소명의 정원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기 앉으세요.”

베란다 옆 공간에 편안해 보이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여기가 전망이 좋아서 가끔 앉아서 차를 마셔요.”

“네.”

도하는 의자에 앉아서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참 힘든 하루였는데 소명 덕분에 따뜻한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소명이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왔다.


“루이보스예요. 카페인이 없으니 그래도 나을 것 같아서.”

“아, 고마워요.”

두 사람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그랬어요.”

“네?”

“나도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봤어요. 그래서……. 소명 씨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아요.”

“…….”

그도 그녀와 같은 일을 겪었고 자신의 마음을 안다는 말에 소명은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가슴속에서 올라왔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확 내뱉고 속에서 나오는 오열이 시작되고 말았다.


“흐흑흑흑.”

그녀의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큰 소리로 울어도 돼요. 상처가 나면 당연히 아픈 거예요. 애써 참을 필요 없어요.”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와 상처의 감정들을 다 토해내듯 울부짖기 시작했고 도하는 우는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강해져야 해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어요. 무너지지 말아요.”

“고……. 고맙습니다.”

소명은 온 얼굴이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그에게 말했다. 도하는 얼른 거실로 가서 티슈를 꺼내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한참을 울부짖은 후에야 소명이 겨우 진정이 되었다.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언제든 부탁할 거 있음 말해요.”

“네.”

“소명 씨 우리 친구 할래요?”

“친구요?”

“네.”

“해요. 친구.”

 

 


“그럼 소명 씨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소명은 그가 내민 핸드폰에 자기 번호를 찍은 후 그에게 주었다. 도하는 발신 표시를 누른 후 말했다.


“제 번호 저장해요.”

“네.”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게 중요해요.”

“고마워요.”

소명은 단지 고맙다고밖에 말을 못 했지만 도하의 말은 그녀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도하는 차를 마시고 돌아갔고 소명은 또다시 이 커다란 집에 혼자 남았다.

하지만 어제의 마음가짐과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까 도하가 해준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의 입으로 그가 해준 말을 되새겼다.


“강해져야 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래. 강해져야 해.”

소명은 칠흑 같은 밤 쓸쓸히 침대에 홀로 누워 그 말을 계속 말하고 또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스르르 감겼고 이내 소명은 잠에 빠져들었다.

******

한편 라희의 오피스텔에 돌아온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라희는 오자마자 방 안에 들어가 방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지성이 따라 들어가려고 문 손잡이를 돌리는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성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라희야, 문 열어봐. 화났어?”

“오빠, 그걸 말이라고 해?”

“미안해. 많이 아팠지?”

“오빠는 나 머리끄덩이 잡혔을 때 도와줬었어야지. 왜? 오빠 부인이 그러는데 이해라도 됐어? 난 오빠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연녀 딱지까지 참아냈는데. 오빠는 내가 이 꼴이 되는 모습이 보기 좋아?”

“라희야.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너무 화가 나서 미쳐 버릴 지경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 너무 분해서라도 이대로 못 넘어가.”

“내일 서류 준비해서 도장 찍게 할게.”

“진짜?”

“그래. 그러니까 이 문이나 열어.”

“…….”

“라희야, 얼른.”

지성이 간곡히 부탁하자 라희는 못 이기는 척하며 문을 열었다.

라희의 헝클어진 머리를 보며 지성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달콤하고 다정하게 그녀를 보며 속삭였다.


“이제 다시는 이런 꼴 안 당하게 할게. 사랑해.”

“오빠, 나 혼자만 오빠 여자 하고 싶어.”

“그래. 나는 너뿐이야. 그 누구도 안 돼.”

지성의 말에 라희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꼭 안고 있었다.


“근데 대표님이 우리한테 해코지하는 건 아니겠지?”

라희가 갑자기 생각난 듯 불안한 눈동자로 지성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혼하려는 부부가 싸우는 게 당연하지. 이혼했다고 회사 못 다니게 하면 나도 가만 안 있지!”

지성은 이렇게 말하면서 불안해하는 라희를 안심시켰지만, 그 역시 마음이 찝찝했다.

이까 분노에 찬 도하의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또 한편으로는 왜 소명을 위해 나섰던 걸까 하는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차 도하 대표는 차갑기로 유명하고 어떤 직원에게도 웃음을 보이지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절대 나서지도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왜?

다른 사람들이 봐도 소명과 라희 그리고 자신이 길거리에 싸운듯하니 소명의 편을 든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대표가 소명을 위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갖기에는 싫고 남한테 주기는 싫었다. 그녀가 자신과 이혼하더라도 평생을 자신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지성은 계속 드는 소명의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라희는 그런 것도 모른 채 그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사랑을 달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성은 라희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다음 날 아침 소명은 침대에서 홀로 눈을 떴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을 뜨기가 싫은, 회피하고만 싶은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잠을 오랜만에 좀 자서인지 몸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샤워하고 머리를 손질한 뒤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화장하기 시작했다.

소명은 거울을 보며 소리 내서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해. 나는 나를 돌봐야 해. 할 수 있다. 홍 소명. 힘내자.”

소명은 화장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운전하며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그녀는 가속페달을 밟고 속도를 높였다. 얼마 후 그녀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심호흡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어머니, 저 소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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