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오빠. 난 오빠 못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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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오빠. 난 오빠 못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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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오빠. 난 오빠 못 잊었어.
2022.08.18.
지성은 몇 번씩이나 비밀번호 누르기를 시도하다가 화가 난 얼굴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에이, 씨. 진짜 열받게 하네.”
그는 숨을 고르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소명의 번호를 눌렀다.
한참 신호가 간 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지성은 다짜고짜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야, 비번은 왜 바꿨어? 어?”
[안 서방.]
“…….”
지성은 전화를 받은 사람이 소명의 어머니인 걸 알고 당황해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소명이 잠들었네.]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 예.”
[어차피 헤어질 거 비밀번호 바꾼 것 가지고 그리 뭐라 그러지 말게.]
“네? 장모님!”
[소명이한테 대충 이야기 들었네. 지금 소명이가 몸이 좀 안 좋으니까 내일 얘기하게.]
“장모님…….”
[끊겠네.]
“장…….”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항상 차분하고 지적인 소명의 어머니는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지성은 소명과 잘해봐라 이런 얘기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었다.
하지만 막상 헤어지는 걸 기정사실로 해버리는 소명 어머니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다.
‘나를 무시하는 거야? 지금?’
지성은 씩씩거리다가 자기 손에 든 서류 봉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의 내림 버튼을 꾹 눌렀다.
막상 그렇게 원하던 이혼을 해준다는데 기분이 왜 이렇게 이상한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일이 꼬이고 되는 일이 없어서 그런 거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차에 올라타 운전하면서도 소명과 그녀 어머니의 행동을 곱씹었다.
라희의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서니 라희가 쪼르르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오빠, 왔어?”
“응.”
“오빠, 서류 주고 왔어?”
“아니, 못 줬어.”
서류를 주지 못했다는 말에 라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소명이가 집에 없어서.”
“그래? 그럼 들어가서 놓고 나오지 그랬어?”
“비밀번호를 바꿨더라고?”
“그럼 좋은 거 아니야?”
“…….”
라희는 오늘따라 어두운 표정의 지성을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빠? 설마 비밀번호 바꿔서 화난 거야?”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지성은 순간 아차 싶었다. 소명의 일이라면 너무 예민해지는 라희 앞에서 조심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잖아. 들어올 때부터 표정도 안 좋고.”
“아니야. 그런 거. 오늘 일이 많아서 좀 피곤해서 그래.”
“오빠는 사람 맘도 몰라주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알지. 그럼.”
지성은 삐친 라희를 달래면서도 소명이를 생각했다.
‘소명이는 안 그랬는데.’
소명은 라희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무한 긍정주의자. 항상 밝고 활기가 넘쳤다.
다른 여자라면 버티지 못할 것만 같은 정 여사의 시집살이를 아무 탈 없이 무려 10년을 버틴 여자였다. 그녀는 그가 피곤해하면 말없이 지성을 배려했었다.
그런데 라희는 자기만 봐달라고 자기만 힘들다고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다가도 소명과 너무 다른 예민함을 가진 라희가 피곤하게 생각될 때도 있었다. 그는 오늘은 좀 편히 쉬고 싶었다.
“이혼해 줄 것 같아?”
지성에게 질문하는 라희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스스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나 왜 이러지?’
그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라희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오빠?”
“응?”
“우리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로 우리 미래를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야. 알지?”
라희의 말을 들은 지성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나 오빠한테 모두 다 걸었어.”
“그래, 라희야. 알지.”
라희는 지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나, 오빠 믿어.”
라희의 말에 지성은 혼란함을 느꼈다.
‘그래,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데.’
지성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라희를 바라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
다음 날 아침, 소명과 어머니는 소명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소명 아버지의 산소였다.
산소 앞에서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잊었다. 울지 않으려 했던 소명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소명의 어머니는 산소의 풀을 손으로 뽑으며 말했다.
“여보, 우리 딸 왔어요.”
“아빠, 나 왔어.”
“우리 소명이 새 출발 하는 거 천국에서 지켜봐 줘요.”
“아빠, 나 잘 살게.”
소명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가족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산소를 등지고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참 예쁘다.”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소명의 마음이 아파져 왔다.
“엄마, 나 잘 살기를 바랐는데…….”
“넌 지금도 잘 살고 있어. 이혼이 죄야?”
“나. 꼭 인생 실패자가 된 기분이야. 이런 일은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일인 줄 알았어.”
“소명아, 네 인생은 네 거고, 요즘 세상에 이혼이 뭐 대수니? 우리 딸 이렇게 예쁘고 훌륭한데. 다시 시작하면 돼. 엄마는 네가 이혼하는 것보다도, 이혼 안 하고 힘들게 마음 곪아가면서 사는 거 못 참아. 하루를 살아도 우리 딸이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
“엄마, 내가 진짜 열심히 해서 꼭 효도할게.”
“네가 이렇게 엄마 옆에 있어 주는 게 효도야. 엄만 다른 거 하나도 안 바라.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 소명이가 얼마나 긍정주의잔데. 엄만 너 믿어.”
“엄마.”
소명은 어린아이처럼 엄마의 품에 꼭 안겼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소명은 굳은 결심을 하고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았다.
운전해서 그녀의 어머니를 내려준 후 집으로 향했다.
빨리 가서 화초들에 물을 줘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지성의 전화가 부재중으로 찍혀있고 그 뒤 통화 이력이 보였다.
‘엄마?’
엄마와 지성이 전화한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지성과 통화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게 싫어서 그런 게 분명했다.
지성이 왜 전화했을까 궁금했지만, 그에게 전화를 거는 건 싫었다. 쉽지 않겠지만 그를 마음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와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와 만든 10년의 추억은 그녀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녀는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며 그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나 큰 집이 휑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베란다로 달려가 화초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담아 화분에 물을 주고 분무기로 잎에 물을 주었다.
이곳은 소명에게 마음의 안식처였다. 사람은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화초는 그녀가 노력만 하면 언제나 푸르른 잎으로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물을 주고 그동안 밀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벌레처럼 지성의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게 몸을 쉼 없이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의 전화기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지성이었다.
소명은 깊은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바라보다 어렵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집에 왔어?”
수화기 너머로 지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의 그녀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던 그 목소리로.
소명이 놀라 눈이 커지고 아무 말도 못 해 잠시 정적이 감돌 때, 지성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어제 장모님이랑 통화했어.”
“어.”
소명은 쌀쌀맞게 말했다.
“비밀번호 바꿨더라.”
“응.”
“…….”
“서류 가져와.”
“어.”
“일 끝나고 바로 올 거야?”
“응.”
“끊어.”
냉랭한 목소리로 끊는다 말하고 소명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 빨리 끝내자.’
소명은 심호흡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의 지성이는 없어.’
소명은 마저 하던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힘주어 바닥을 걸레로 빡빡 닦았다.
전화를 끊은 지성은 소명의 태도에 마음이 쓰렸다.
‘이기적인 새끼.’
그랬다. 자신은 한없는 이기주의자였다. 라희와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소명과 다른 점을 계속 비교하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소명과 라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소명은 모든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다면 라희는 하나같이 예민하고 꼬치꼬치 따지며 그를 옭아매려고 한다고 느껴졌다.
그런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는데.
왜 막상 소명이 이혼을 해준다는데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러운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버려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는 일을 마치고 차에 올랐다.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곧 시동을 걸었고 그와 그녀가 단둘이 살았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한편 도하는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거의 다다를 무렵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했는데 생전 처음 본 번호였다.
도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수화기 너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빈이?’
“…….”
도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밝고 통통 튀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빠? 왜 아무 말을 안 해?]
“왜 전화했어?”
도하는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전화하긴 우리 결혼 얘기하려고 전화했지.]
“너 미쳤어?”
[아니. 어차피 우리 결혼해야 하는 거 오빠도 잘 알고 있잖아.]
“난 절대 너랑 결혼 안 해.”
[우리 의사 따윈 없어.]
“너……. 진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 오빠랑 결혼해서 잘 살고 싶어. 우리 한때 서로 사랑했잖아.]
“예전 얘기 꺼내지 마.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마.”
[오빠, 회장님 이길 수 있어?]
“하아, 그만 말하자.”
도하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서빈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빠한테 가고 있어.]
“뭐?”
순간 도하의 눈빛은 분노에 가득 차 이글거렸다.
그는 화가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자신을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때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받은 상처가 그에겐 너무나 깊었다.
그녀를 그의 뇌 속에서 아예 삭제해버리고 싶을 만큼 그에게 남은 그녀의 기억은 아픔뿐이었다.
[회장님께 여쭈어 봤지. 오빠 집.]
“당장 돌아가.”
[나 다 왔다니까.]
“돌아가.”
도하는 냉정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도하는 하도 신경을 써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른 후에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입에서는 연신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추었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도하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집 현관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 앞에는 화려한 차림새로 한껏 멋을 낸 서빈이 서 있었다.
그는 서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오빠?”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서빈이 반갑게 그를 불러댔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부름에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댔다.
곧 문이 열렸고 집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려는데 서빈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놔.”
“오빠, 잠시 얘기 좀 하자.”
“당장 가라고.”
“오빠, 시간 낭비하지 말자. 우리 서로 기업에 윈윈인 거 오빠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나 너 만날 때 한 번도 우리 회사 이익 따진 적 없었어.”
“알아. 오빠가 나 진심으로 좋아해준 거.”
“이젠 나 너 잊은 지 오래야. 나 정말 너랑 다시는 엮이기 싫다. 제발 가라.”
“오빠. 난 오빠 못 잊었어.”
“그만. 이거 놔.”
도하는 강하게 서빈의 팔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