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이제 정말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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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이제 정말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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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이제 정말 끝인가?
2022.08.22.
도하의 싸늘한 태도에 놀란 서빈은 한참을 그의 현관문만 쳐다보다 갑자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무리 그래봤자 오빠가 나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서빈은 언제나 당당했다. 자신이 원하는 건 모조리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한때 도하가 자신에게 폭 빠져 있을 때 잠시 눈을 돌린 건 지금도 조금 후회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로 인해 그가 냉정히 자신을 떠나버렸으니까.
그와 헤어지고 몇 년 후에 도하와 자신의 혼사 얘기가 나올 때 서빈은 그와 결혼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많은 남자를 만나봤지만, 그녀에게 그만큼 진심인 사람은 없었다.
며칠 전 차 회장의 집에선 본 그는 더 멋진 남자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봐 주던 미소는 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훨씬 남자다워지고 멋있어진 모습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라 보이고 더 매력적으로 다가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서빈은 오늘 큰맘을 먹고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아침부터 몸치장했지만 그는 역시나 너무도 냉정하게 자신을 밀쳐냈다. 그녀는 그럴수록 도전정신이 샘솟았다.
그녀는 그의 현관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서빈은 내려가면서도 어떡하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
지성은 자신이 살던 집 앞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음껏 들락날락했던 곳이 이제는 초인종을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지성은 말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곧 문이 열렸다.
예전보다 더 마른 모습의 소명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들어와.”
소명의 목소리에 냉기가 감돌았다.
지성은 소명을 바라보며 그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에 걸려 있던 커다란 결혼사진이 사라진 걸 발견한 지성은 표정이 굳어졌다.
“서류 주고 가.”
“우리 액자 어디 있어?”
지성의 철없는 물음에 소명은 기가 찬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몰라서 묻니?”
“모르니까 묻지.”
“네가 지긋지긋해서 깨 버렸어.”
“뭐?”
“서류 주고 가랬지.”
“소명아.”
“안 줄 거면 나가. 너랑 일분일초도 같이 있기 싫어.”
“너 그 정도야?”
“왜 이래?”
“뭘?”
“자꾸 서 있지 말고 서류 주고 나가.”
“소명아, 너는 우리 십 년 세월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사진을 버리는 건……. 심했잖아.”
“너는 그런 말할 자격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그래도.”
“야! 안 지성, 그만하고 나가.”
“너, 수상하다.”
“뭐??”
“너 혹시 남자 생겼냐?”
“…….”
소명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계속 나왔다.
“웃어?”
“지성아, 나가줘.”
지성을 바라보는 소명의 눈동자가 너무 슬퍼 보였다. 지성은 그녀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말하라고!”
“뭘?”
“너 대표랑 무슨 사이야?”
“진짜……. 뭐 눈에는 뭐밖에 안 보인다더니.”
“뭐라고?”
지성은 소명의 차가워진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성을 잃은 눈빛을 하고 소명을 바라보며 씩씩거렸다.
소명은 그의 분노에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예전의 지성이가 아니야. 무서워.’
소명은 지성과 눈이 마주쳤고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지성아, 정신 차려. 우린 곧 이혼할 거야. 추억 따위 빨리 지워 버리는 게 서로를 위해 더 낫잖아.”
그녀의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맞다. 그녀의 말이.
‘나……. 왜 이러지. 정이 정말 무서운 건가 봐.’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가줘. 너 보는 게 솔직히 힘들어.”
소명은 지성에게 부탁했다.
지성은 말없이 걸어 나가며 주방 식탁 위에 서류를 올려놓고 말했다.
“밥 좀 먹어. 얼굴이 말이 아니다.”
지성은 빠른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그가 가버린 텅 빈 곳에 소명은 말없이 서 있었다.
‘왜 또 예전의 너처럼 말하는 건데?’
소명은 지성의 행동에 또 마음이 아려왔다. 그녀는 그럴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소명은 눈을 크게 뜨고 지성이 두고 간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지성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이제 정말 끝인가?’
지성은 자꾸만 소명의 차가운 눈빛이 눈앞에 아른댔다.
******
다음 날 아침 소명은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체력이 많이 약해진 탓에 조깅은 어려울 것 같아 조금씩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소명은 산책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 도하가 탄 차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도하의 시선에 소명이 잡히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저 잠시만 천천히 가 주세요.”
“네.”
기사가 속도를 줄이자 도하는 소명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운동을 나온 그녀를 본 도하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소명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가자 그는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도하의 행동이 궁금해진 이 비서는 그의 눈치를 슬쩍 보며 물었다.
“대표님,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십니까?”
이 비서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도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아는 사람 지나간 것 같아서요.”
그의 대답에 놀란 표정으로 이 비서가 되물었다.
“대표님, 이쪽에 아시는 분이 사시는 겁니까?”
“아니에요. 인제 그만…….”
“네.”
이 비서가 어떻게든 조금 도하와 가까워지려고 할 때마다 항상 도하는 멀어지고는 했다. 이 비서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스케줄은…….”
도하는 이 비서가 들려주는 스케줄을 들으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이 비서는 요즘 따라 더 어두운 표정의 도하를 보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되었다.
그때 도하의 핸드폰이 울렸다. 도하는 발신인을 확인한 후 눈살을 찌푸렸다.
“네.”
[서빈이랑은 어떻게 돼가는 게냐?]
“아버지, 저는 서빈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고얀 놈. 내 방으로 와.]
“죄송합니다. 오늘 스케줄 때문에 지금은 어렵습니다.”
[차 도하!]
차회장이 화가 나서 도하를 부르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이 비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 안경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차 회장의 호통에도 들은 체 만 체 표정 변화 없이 도하는 냉정한 모습으로 자신의 할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 그럼 끊습니다.”
[잠깐만.]
“…….”
[도하야, 너 저번에 좋아하는 여자 있다고 했지. 그럼 그 여자 당장 데리고 와.]
“아버지.”
[이번 주 안에 안 데리고 오면 서빈이랑 바로 날 잡을 줄 알아라.]
차 회장이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자 도하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가뜩이나 서빈이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데 아버지까지 이러니 도하는 일이 자꾸만 꼬여 간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하와 전화를 끊은 차 회장은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이렇게 나온다고? 어디 없는 여자가 나오나 두고 보자.”
차 회장은 도하가 서빈이와 결혼을 왜 그토록 하기 싫어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서빈이는 집안도 좋을 뿐 아니라 어디에 내놔도 절대 뒤지지 않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젊고 능력 있고 예뻤다.
그리고 도하가 서빈과 결혼만 하게 되면 두 기업에는 서로에게 크나큰 힘이 될 중요한 혼사였다. 기업에 도움이 되는 길은 장차 회장이 될 도하를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아비 맘도 모르는 무정한 놈.’
차 회장은 내성적이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따뜻한 심성을 가진 도하를 늘 사랑했다.
하지만 장차 기업을 물려받아야 했기에 언제나 칭찬보다는 도하의 여린 부분을 탓하고 혼내서 강하게 자라게 하려고 늘 무서운 얼굴로 도하를 혼내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해맑고 착한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점 웃음기를 잃었고 차 회장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성인이 된 도하는 여리고 내성적인 성격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차가운 남자가 되어 있었고 자신이 맡은 설계 분야 대표이사직을 훌륭히 소화하고 있었다.
바르게 자라주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해주는 건 좋았지만, 자꾸 멀어져만 가는 부자 관계는 그에게 늘 고민거리였다.
차 회장은 밝고 상냥한 서빈이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도하의 차가운 성격도 조금은 변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도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까지 했었다.
하지만 도하가 서빈을 거부하고 다른 여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하자 차 회장의 마음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그는 도하가 진짜로 사귀는 여자를 데려오지 못하면 바로 서빈과 날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소명은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베란다 정원으로 가서 잎을 닦고 분무기로 잎을 적신 후 화분마다 흙을 만져보아 말라 있는 화분에 물을 듬뿍 주었다.
소명의 사랑을 받은 화분들은 싱그러운 잎사귀를 뽐내듯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푸릇푸릇한 화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다시 살자. 살자.’
베란다에서 나와 샤워를 마친 소명은 식탁에 앉아 어제 지성이 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업무를 마치고 라희의 오피스텔로 돌아온 지성은 큰 소리로 말했다.
“라희야, 나 왔어.”
그러나 오피스텔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어디 갔지?”
지성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라희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수화기 너머 라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희야?”
[응, 오빠.]
“너 어디야? 왜 아직도 안 와? 나보다 먼저 퇴근한 거 아니었어?”
[응. 그게…….]
라희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지성이 걱정스레 묻자 라희가 말했다.
[오빠,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 왔는데 오늘 남자 친구랑 헤어졌대.]
“그래서?”
[그래서라니?]
“아니……. 늦어?”
[많이는 아니고. 좀 위로해 줘야 될 것 같아?]
“친구 누구?”
[오빠!]
꼬치꼬치 캐묻는 지성이 거슬렸는지 라희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알았어.”
[오빠, 뭐 시켜 먹어.]
“응.”
라희가 전화를 끊자 지성의 표정이 구겨졌다. 배가 고파 냉장고를 뒤졌는데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지성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소명이가 끓여준 뜨끈한 된장찌개 생각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자꾸만 소명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생각되었다.
라희는 젊고 생기발랄했다. 그 모습이 너무 색다르게 느껴졌고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은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생기발랄한 여자였다. 친구도 많았고 모임도 즐기는 성격이었다. 지성은 무거운 표정으로 배달 앱을 뒤적거리며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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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라희는 분위기 좋은 술집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여자가 아닌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깨가 넓고 덩치가 있었지만, 얼굴은 앳되고 잘생긴 미소년의 이미지였다.
라희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거만한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남자는 간절한 표정으로 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희야, 나 안 되겠어.”
라희는 귀찮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대체 뭘?”
“너……. 못 잊겠어.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