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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울어도 돼요 (17/101)


제17화 울어도 돼요
2022.08.29.


소명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너는 단지 인간쓰레기일 뿐이야.”

“야!”

소명의 말에 지성은 화가 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난 바보같이 그런 너와 10년을 살았고. 이제야 겨우 벗어나는데 너 같으면 너랑 차를 마시고 싶겠니? 꺼져.”

소명은 그동안 애써 내리누르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녀가 씩씩대자 지성은 그녀를 말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그딴 말 나한테 안 통해. 넌 나쁜 놈이고 부인 두고 바람피운 쓰레기일 뿐이야. 상종 가치도 없는…….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 소원이다. 내가 왜 소송 안 하는 줄 아니?”

“소송?”

“소송하는 데 걸리는 6개월에서 1년 동안 너랑 그 여자랑 엮이는 게 치가 떨리게 싫어. 소름 끼쳐.”

“소명아. 그래서 내가 나름…….”

“그까짓 재산 분할로 네가 한 짓거리 보상한다고?”

“너 진짜 왜 이렇게 독해졌어?”

“독한 건 너야. 이젠 다시 보지 말자.”

지성은 소명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독설을 들으니 마음이 아파져 왔다. 자신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소명은 지성 앞에서 절대 울지 않으려고 다짐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왜 우는데? 이렇게 좋은 날에…….’

소명은 얼른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앞에서 결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지성을 뒤로한 채 그녀는 당당히 걸어 나갔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탄 뒤 시동을 켜고 운전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동안의 억누른 감정이 폭발하면서 입에서 저절로 흐느끼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흑흑 흐흐흑. 하아.흐흐흐.”

한참을 운전도 못 한 채 소명은 차 안에서 울어댔다.

소명이 가고 난 후에도 지성은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망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소명아, 진짜 우리 끝난 거니?’

 

******

도하는 일을 끝내고 집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데 낯익은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소명이었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인지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머리 스타일도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그녀의 색다른 모습에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축 처진 어깨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왠지 그녀의 표정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든 소명과 눈이 딱하고 마주쳤다.

소명은 도하를 보고 놀라며 눈이 커졌다. 그러고는 어색했는지 살짝 미소를 지어 눈인사를 했다.

도하도 그녀를 보고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금 퇴근하시나 봐요.”

“네. 어디 외출하셨나 봐요. 차림새가.”

“아. 네. 오늘 이혼 서류 제출하고 왔어요.”

그녀의 말에 놀란 도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혼!’

그녀는 결심이 선 듯 당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정말 죄송했고, 감사했어요.”

“네?”

“이제 한 달 숙려 기간 지나고 서류가 완벽히 정리되면 좀 작은 집을 구할까 해서요. 혼자 살기엔 너무 집이 크네요. 또 언제 뵐지 몰라서 미리 인사드리려고요.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도하는 소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맨입으로요?”

“네?”

“술 사요.”

“술이요?”

“네.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요.”

“……그랬죠?”

“올라가서 옷 편한 거 갈아입고 나와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소명은 그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네. 그러죠. 뭐.”

소명과 그는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슬쩍 훔쳐본 소명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지만 속마음은 얼마나 아플지.

그녀가 슬퍼하는 표정을 보면 왜 이렇게 마음이 쓰린지 아마도 그녀의 모습 속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더 안쓰럽고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두고 그런 짓을 벌인 그녀의 남편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소명은 내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10분 정도 있다가 보실래요?”

“네. 그러죠.”

도하가 살짝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가 그를 보며 말했다.


“대표님, 웃으시니까 인상이 훨씬 좋아 보이세요.”

“네?”

소명의 급작스러운 칭찬에 놀란 도하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저 들어가 볼게요.”

“네.”

소명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하도 자신의 현관문을 열며 집 안으로 들어와 잠시 멈춰서 그녀가 한 말을 되뇌었다.
 


“이사님, 웃으시니까 인상이 훨씬 좋아 보이세요.”

  


‘나보고 인상이 좋다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후에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옷을 고르다 편한 복장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집 밖을 나가기 전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을 점검했다.

소명도 집으로 돌아와 하이힐과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편한 티셔츠에 아이보리색의 카디건을 걸쳤다.

집 앞에서 도하를 만난 건 오히려 다행인 걸까?

오늘은 마음이 너무 착잡해서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자신의 과거에 얽매여서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진 않았다. 결혼으로 인해 그동안 못한 것들을 맘껏 하면서 자유롭게 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녀는 그 사람을 받아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성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누군가를 다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 사랑이 무서웠다.

모든 걸 다 주었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그와 똑 닮은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알콩달콩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싶었었는데…….

끝내 소명에겐 아이도 남편도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아파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으며 그녀는 조금씩 더 성숙해져 가고 있었다.

소명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도하가 면바지에 셔츠 차림으로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항상 슈트를 입은 그의 모습만 자주 봐오다가 오늘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니 그가 달라 보였다. 그냥 편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명은 그를 보며 일부러 밝은 척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우리 친구인데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마요.”

“네?”

“소명 씨한테 나……. 대표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럼 도하 씨.”

“네. 소명 씨. 가실까요?”

“네. 어디 가고 싶은 술집 있으세요?”

소명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소명 씨 가는 곳으로 가요.”

“대표님……. 아니지. 도하 씨? 소주 드세요?”

“소주요? 당연하죠.”

“아니……. 저는 대표님은 양주만 드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요, 저 소주 좋아해요.”

“그럼, 우리 동네 맛집으로 안내할게요.”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파트를 빠져나와 나란히 걸어가는 데 도하의 키가 하도 커서 소명은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러 가다니 소명은 기분이 묘해졌다. 도하와 함께 걷다가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예요.”

그곳은 조그만 동네 호프집이었는데 도하는 이런 낯선 분위기가 너무 신선하게 느껴졌다.

한 번도 이런 술집에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들어가요.”

“네.”

소명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곳은 어두침침한 조명에 칸칸이 나눠진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중년의 여사장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어서 와요.”

그녀는 소명의 옆에 있는 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남편분이 더 훤하시네.”

“네?”

그녀의 말에 도하는 놀라 소명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남편 아니고 친구예요.”

“아이고, 그랬구나. 미안해요. 남편분이 하도 안 오셔서 내가 헷갈렸나 봐요. 남편분이랑 나중에 같이 와요.”

“저. 이혼했어요.”

“네? 이혼?”

“네.”

“아니, 그렇게 사이가 좋더니. 왜? 아이고 이런 거 묻는 거 실례지.”

“괜찮아요.”

소명은 도하를 보며 말했다.


“여기 앉을까요?”

“네.”

소명과 도하가 자리에 앉자 여사장은 민망한 얼굴로 다가와 팝콘이 담긴 기본 안주를 놓고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뭐 드릴까? 오랜만에 오셨으니까 내가 안주 맛있게 해드릴게.”

“항상 너무 맛있어서요.”

“에이고, 뭘.”

“조금만 이따가 시킬게요. 우선 소주 한 병 주세요.”

“네.”

여사장이 나가자 소명이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도하 씨, 뭐 드실래요?”

“괜찮아요?”

도하는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하의 표정을 보고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뭐가요?”

“여기 불편하지 않아요?”

“아니요. 저 여기 좋아해요.”

“불편하면 다른 데로 가죠.”

“아니요, 하나도 안 불편해요. 당연히 물어보실 수 있죠. 남편이랑 오던 곳인데요.”

“그래도…….”

“마음 써 주셔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그 순간 도하는 소명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진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고마워하고 있다.’

그는 그럴수록 그녀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고맙긴요. 저 배고파요.”

“아……. 여기 계란말이도 맛있고 음……. 어묵탕도 괜찮아요. 소주엔 국물이죠. 어묵탕 어떠세요?”

“좋아요.”

사실 도하는 이런 술집의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아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인상 좋은 여사장은 보글보글 끓는 먹음직한 어묵탕을 가져다주었다.

소명은 소주의 뚜껑을 따고 도하에게 따라주었다.

도하도 그녀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소명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짠.”

도하도 웃으며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두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소명은 그를 바라보다가 한 번에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도하도 그녀를 바라보며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쳐다보는 자신을 느꼈다.


“하, 시원해. 오늘 술이 달아요.”

자신만 쳐다보며 입술에 술잔을 가져다 대고 있는 도하를 소명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도하 씨?”

“네?”

“치사하게 짠하고 안 먹기 있음?”

“어? 아. 네.”

도하는 자기 행동을 비로소 눈치채고 얼른 잔을 들었다.


“어때요? 맛있죠?”

“진짜, 다네요.”

“그렇다니까요. 그럼,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소명은 도하의 잔에 소주를 조심스레 따랐다. 그녀는 일부러 기쁜 척 일부러 신나는 척하고 있었다. 도하의 눈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소명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려 하자 도하가 그녀의 술병을 빼앗아 조심스레 술잔을 채웠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살짝 미소 지은 뒤 급하게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소명 씨. 천천히 마셔요.”

“너무 맛있어서…….”

소명은 도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지 마요.”

도하가 그녀를 바라보며 무겁게 말했다. 갑자기 어두워진 분위기가 낯설어 그녀는 그를 보며 물었다.


“네?”

“슬프면서. 일부러 안 슬픈 척 웃지 마요.”

“아니……. 저 안 슬퍼요. 너무 좋고 신나……요.”

소명은 신난다고 말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녀의 앞 테이블엔 그녀의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도하는 휴지를 뽑아 그녀의 테이블 옆에 살짝 올려두었다.

고개를 든 소명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이, 안 울려고 했는데.”

“울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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