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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엄마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이야? (21/101)


제21화 엄마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이야?
2022.09.12.



 
도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지금 시간을 확인했고, 지금 시간은 이미 이 비서가 와 있을 시간이었다.

도하는 소명을 한 번 쳐다본 후에 핸드폰을 받았다.


“어, 이 비서.”

[대표님, 저 도착했습니다.]

“이 비서, 아직 내가 운동 중이어서.”

[네?]

수화기 너머로 이 비서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은 무슨 일이요. 금방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돌아가던 참이었어요.”

[네. 알겠습니다.]

도하가 전화를 끊자 소명이 그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회사 출근하셔야 하는데 늦으신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항상 미리 가는 습관이 있어서. 오늘은 제시간에 도착하겠네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소명 씨,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저는…….”

도하가 말을 마무리 짓지 않고 소명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그의 다음 말이 궁금해서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하는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운동 너무 즐거웠어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소명도 웃으며 말했다.


“저도요.”

소명이 활짝 웃자 그녀의 가지런한 치아가 환히 드러났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가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말했다.


“저 웃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하셨지만, 소명 씨 웃으니까 너무 예뻐요.”

그가 자신을 보고 예쁘다고 하자 소명의 심장이 턱하고 내려앉았다.

누군가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얼마 만에 들었는지 너무도 새삼스럽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가슴이 설레었다.

이제는 그녀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졌다.


“그럼 더 많이 웃어야겠네요.”

도하를 보며 다시 한번 소명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걸어 아파트 입구로 들어왔다.

도하는 그녀와 헤어지는 길이 너무나 아쉬워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와 재빨리 샤워하고 슈트로 갈아입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더욱 엄격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냉정하고 비판적이었다.

그런 도하의 사전에 지각이라는 단어는 허용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런 그가 출근해야 할 시간에 소명과 운동을 하고 있었다니.

더구나 이렇게 늦은 시점에 그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그 자신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녀가 좋아.’

그는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따뜻하며 지혜로운 여자였다.

도하는 준비를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의 입에서는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이 비서가 차 밖에 나와 시계를 보며 초조한 듯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하는 이 비서를 보고 빠른 걸음을 걸어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갔다.


“이 비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아닙니다.”

도하는 차를 타면서도 표정이 밝았다.

조수석에 앉아서 뒤를 힐끔 쳐다보며 이 비서가 도하에게 말했다.


“오늘 일정은 9시 반에 업무 회의가 있으시고. 회의 끝나고는 회장님께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회장님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는 소리에 놀란 도하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갑자기 왜요?”

“이유는 말씀 없으셨습니다. 회의하는 김에 대표님 얼굴 보려고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왜 나한테 전화는 안 하시고.”

좋았던 기분이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에 무거운 돌이 얹어진 것처럼 답답했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가슴에 박힌 무거운 돌덩이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려하기보다는 자신의 기대에 맞추려고 했다. 그런 그의 생각 때문에 항상 도하는 아버지를 대할 때 갑갑함을 느꼈다.

그가 지켜본 아버지는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결혼도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굳이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자꾸만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가 점점 부담스럽게 생각되어 본가에도 가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 또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만나는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는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하는 회사에 출근하는 내내 이 비서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 비서는 도하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도하는 회사에 도착한 후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커피를 한잔 내렸다. 그가 커피를 손수 내리자 이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말씀하시면 내려 드릴 텐데.”

“제가 손이 없습니까. 이런 건 스스로 해야죠. 이 비서님도 바쁘신데.”

이 비서는 도하가 예전보다 친절해진 것 같아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도하는 커피를 내린 후 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커피의 향이 좋아 잔을 끝에 살짝 대고 향을 맡으며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잠시 무거운 맘을 내려놓으려 애를 썼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이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와서 말했다.


“회의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네.”

도하는 어두운 얼굴로 일어서서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회의실을 향해 걸어 나갔다.

회의실에 들어서니 그의 아버지 차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도하를 바라보았고 도하는 간단한 묵례를 하고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회의가 끝나고 도하는 얼른 일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이 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점심 약속 잊으신 건 아니시죠.”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이 비서를 향해 강력한 눈빛을 날렸다. 도하의 화난 얼굴에 이 비서는 흠칫했지만 굽히지 않고 그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지금 회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차 회장과 도하는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회사 근처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정갈한 한 상이 그들 앞에 차려지는 동안에도 부자는 침묵을 유지했다.

도하는 내내 어둡고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 회장은 그런 그를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음식이 다 나오자 차 회장은 도하를 보며 말했다.


“먹자.”

“네.”

도하는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차 회장은 입을 열었다.


“이 아비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아들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든 거냐?”

“좀 바빴어요.”

“결혼할 여자는 언제 데리고 오는 게냐?”

국을 떠먹으려 수저를 입에 갖다 대던 도하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차 회장을 바라보았다.


“왜 아비를 그렇게 보는 거냐?”

“아버지, 인제 그만 하세요.”

도하의 말에 차 회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고얀 놈, 당장 아파트에서 나와.”

“네?”

“네 엄마가 하도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허용했지만 안 되겠다. 넌 내 유일한 후계자야. 자식 보고 싶어도 보지도 못하고, 내가 자식이 둘이냐, 셋이냐.”

“아버지 그만하세요. 저 아버지와 이렇게 불편한 자리 싫습니다.”

“너…… 정말 이럴래? 왜 아버지랑 같이 있는 자리가 불편하다는 게냐?”

“아버지, 결혼은 사랑하는 여자와 하고 싶습니다.”

“그럼, 결혼할 아이, 당장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다시 돌아와. 서빈이랑 결혼 준비해.”

차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도하는 돌아서서 나가는 차 회장을 바라보며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 비서가 얼른 뛰어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 비서님 제가 할게요.”

“네.”

도하는 차에 올라타서 솟구치는 감정을 억지로 참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도하보다 먼저 나가 차에 올라탄 차 회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 흠.”

 

******

한편 지성은 라희와 함께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쇼핑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섰다.

지성의 팔짱을 끼며 라희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나 왜 이렇게 떨리지.”

“떨리긴. 우리 어머니가 좀 무뚝뚝하셔도 좋으신 분이야.”

“응. 오빠 낳아 주셨는데. 내가 잘해야지.”

지성이 라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여성복 매장에 들어갔다. 라희는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지성은 라희를 보며 말했다.


“맘에 드는 거 다 사도 돼.”

그의 말에 라희의 두 눈이 반짝거리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빠, 정말?”

그때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소명이 훅하고 치고 들어왔다.

항상 백화점에 가서 옷을 고르라고 하면 가격표부터 보던 소명이, 비싼 옷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녀와 라희는 정말 달랐다.


‘왜 하필 이때 또 생각나는 건데…….’

소명은 항상 자기보다 지성을 위해주던 여자였다.

지성은 그녀에게 비싼 옷 한 번 못 사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싼 옷을 못 사줄 정도로 형편이 나쁜 것도 아니었는데……. 그가 한창 소명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라희는 정신없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오빠, 나 이거 다 사도 돼?”

라희는 궁금하다는 듯 지성을 보며 물었고 지성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희는 지성에게 다가와 와락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빠, 정말 고마워, 이 중에서 제일 예쁜 옷으로 입을게.”

“그래.”

지성은 판매사원을 보며 말했다.


“이거 다 계산해주세요.”

“네, 고객님.”

판매사원이 포장을 했고 라희는 그중에서 제일 무난하고 단아해 보이는 네이버 컬러의 원피스를 입었다.


“이거 가격표 좀 제거해 주세요.”

원피스를 입은 라희는 너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외모에 빛나는 젊음을 가진 라희는 오늘따라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라희는 백화점에서 과일 바구니를 사고 지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지성의 본가로 향했다.

사실 지성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성의 본가에 너무 가기 싫었다.

지성과 라희는 곧 지성의 집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정원이 있는 고급 전원 주택을 보고 라희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어렸을 때부터 형편이 좋지 않아서인지 이런 집을 보니 그저 모든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큰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정원을 지나 현관 앞으로 걸어가자 곧 문이 열렸고 지적이게 보이는 중년 여성이 문을 열고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라희는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애써 굳은 표정을 감추고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엄마.”

지성이 반갑게 엄마라고 불렀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왜 왔어, 오지 말래도.”

“아이, 참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들이 왔는데. 엄마, 내가 말한 라희.”

지성의 어머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억지로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지성이 엄마예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라희는 상냥한 말투로 정 여사에게 인사를 했다.


“들어와요.”

라희는 애써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밖에서 본 것보다 내부가 훨씬 컸고 감각적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집 진짜 좋다.’

라희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지성을 정말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성의 재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지성의 어머니라는 사람은 여간 깐깐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라희는 정 여사와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지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라희가 안쓰러워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더니 자기 집으로 다정하게 안내했다.


“들어와.”

라희는 지성에게 이끌려 소파에 앉았다.

정 여사는 라희의 맞은편에 앉아 몸을 뒤로 조금 눕히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행동을 본 라희는 지성의 어머니가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걸 단번에 알아버렸다.

지성의 어머니는 라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성을 쏘아보며 말했다.


“엄마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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