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자기 여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여자
(25/101)
제25화 자기 여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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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자기 여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여자
2022.09.26.
그는 자기 손을 심장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심장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그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신경 쓰이고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은 여자가 자신의 곁에 나타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떨림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서빈에게 상처받고 멈춰 있던 그의 가슴에 소명이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운 느낌이었다.
온종일 겨울이었던 그의 삶에 봄이 찾아온 걸까?
묘한 설렘과 함께 오는 불안감.
그녀의 마음은 어떤지 자신이 그녀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도하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도 같이 있지 않을 때도 온통 머릿속에는 그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는 얼른 샤워를 마치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는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깔끔한 스타일의 흰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었다.
평소에는 항상 슈트만 입었고 외출할 때도 거의 슈트 차림을 고집하던 그였다.
운동할 때나 주변 산책할 때는 트레이닝복을 입는 걸 좋아했지만 왠지 오늘 트레이닝복이 입기 싫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차갑기로 소문이 났고,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던 그가 그녀에게만은 남자답고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고 이 옷을 과연 입고 나가도 될지 고민했다.
그 자신도 자신의 변화가 놀랍고 신기했다. 한참을 거울을 보다가 문득 자기 손목에 찬 시계를 본 도하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현관으로 뛰어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아, 늦었다.”
어떤 옷을 입을까 고르는 통에 소명과의 약속 시간인 20분 후가 거의 다 될 무렵 그는 얼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다행히도 소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1분 정도 기다리자 곧 소명이 나왔다. 소명은 흰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하얀색 단화를 신고 나왔는데 오늘따라 더 눈이 부셨다.
옅은 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을 도하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소명이 어떤 옷을 입어도, 화장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의 눈에 그녀는 너무나 예뻐 보였다.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좋을 수 있을까?’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명은 집 밖으로 나온 도하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색의 셔츠를 입고 나오다니!
도하와 소명은 자신들이 입은 옷을 보고 서로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빙그레 웃고 말았다.
“어, 도하 씨. 우리 옷 입은 게 너무 비슷하네요.”
“흰 셔츠를 좋아해서.”
도하도 싫지 않은 듯 살짝 웃으며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흰색 좋아해요.”
소명이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가실까요?”
“네.”
“조금 거리가 있어서 차 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네. 제 차로 갈까요?”
“도하 씨 차요?”
“네. 업무용 말고 제가 가끔 드라이브할 때 타는 차가 있어요.”
“그래요?”
“네. 지하 주차장에 있어요.”
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소명도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니 도하의 커다란 하얀색 SUV가 보였다.
SUV 치고도 크기가 꽤 커서 소명은 그의 차를 보고 놀라서 살짝 입이 벌어졌다.
하얀색 SUV은 깔끔하게 세차가 되어 있었고 멀리서 봐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와 차 정말 멋진데요.”
“소명 씨가 첫 손님이에요.”
도하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무도 안 태워줬어요.”
“어, 제가 타도 될까요? 도하 씨 엄청나게 아끼시는 차 같은데…….”
“저한테 소중한 차니까 소명 씨 태워드리는 거예요.”
“감사해요. 도하 씨.”
도하는 정중하게 조수석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자, 타시죠.”
“네.”
소명이 조수석에 타고 나서야 도하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는 소명을 살짝 바라보더니 말했다.
“잠시만요.”
도하가 갑자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행동에 놀란 소명은 눈이 커지며 몸을 살짝 움츠렸다.
도하는 살짝 웃으며 그녀의 옆에 있는 안전띠를 잡아당겨 소명에 매주었다.
소명은 그가 정말 배려 깊고 친절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 무표정의 카리스마와는 다른 그 안에 부드럽고 따뜻한 심성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도…….
그는 차의 시동을 걸고 서서히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운전에 집중하는 그의 옆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다가 자기 행동에 스스로 깜짝 놀라 얼른 시선을 돌렸다.
‘나 왜 이러지? 정신 차리자. 홍소명’
도하의 운전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는 부드럽지만 느리지 않았고 그의 핸들링은 고수의 향기가 느껴졌다.
“도하 씨, 운전 잘하시네요.”
“아, 고마워요. 칭찬 들으니 기분 좋네요.”
얼마를 달렸을까? 한적한 풍경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올 무렵 소명이 도하를 보며 말했다.
“거의 다 왔어요.”
푸른 정원이 보이고 마당같이 넓은 곳에 주차했다. 소명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하와 소명이 내린 식당은 주변이 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여기 꽤 맛있어요.”
“그래요?”
“도하 씨 꼭 먹이고 싶었어요.”
자신에게 이 식당의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소명의 말에 도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사실이 그를 아주 기쁘게 했다.
차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식당이 보였고 도하와 소명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집은 진짜 엄마가 해주는 집밥 맛이 나요.”
“저 이런 곳 처음이에요. 너무 좋네요.”
도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명은 그렇게 말하는 그를 보며 입을 뗐다.
“지금부터라도,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살아요.”
“소명 씨 보고 정말 많이 배워요.”
“저 많이 힘들지만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살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일도 알아보고 다시 열심히 살아보려고요.”
“그래요. 소명 씨.”
“저…… 도하 씨, 정말 고마워요.”
그를 바라보는 소명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때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잡곡밥에 미역국, 두부조림, 불고기, 생선구이, 김치, 김 등 일반적으로 집에서 먹는 메뉴였다.
도하는 베란다 가드닝을 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역국을 한 수저 뜨다 소명을 바라보았다.
소명은 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명 씨, 어서 먹어요.”
“네. 도하 씨도 맛있게 드세요.”
도하는 미역국 한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자신이 먹었던 어떤 미역국보다 맛있었다. 자신의 앞에 소명이 앉아 있어서 더 맛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너무 맛있네요.”
“맛있죠?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혹시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어요.”
그는 그녀와 단둘이 맛있는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마치 소명과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갑자기 다가가면 그녀가 부담스러울까 봐 도하는 그녀의 옆에서 자신의 맘을 애써 꾹꾹 누르고 있었다.
소명 역시 오랜만에 맛있는 식사를 도하와 함께 먹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더구나 도하가 맛있게 먹어 주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밥을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두 사람을 본 사람들은 아마 커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같은 색의 셔츠를 입은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타고 나서 도하는 소명을 보며 말했다.
“제가 사드린다고 했잖아요. 소명 씨.”
“도하 씨 제가 꼭 사드리고 싶었어요.”
“아, 그래도.”
“그럼 커피 사 주세요.”
“그럴까요.”
두 사람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셨다.
“오늘따라 커피가 너무 맛있는데요. 도하 씨 잘 마실게요.”
도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소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모습이 그의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살랑대는 바람에 살짝씩 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며 도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이 모습을 계속 지금 이 순간 자기 눈 안에 가득 담고 싶었다.
자꾸만 그녀가 그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통에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소명은 자신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는 도하가 이상하게 생각돼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하 씨?”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아니에요.”
“여기 너무 좋죠?”
“네.”
도하는 속으로 수없이 외쳐댔다.
‘소명 씨랑 있어서 좋아요.’
소명은 커피를 마시다가 도하를 보며 말했다.
“인제 그만 갈까요?”
그녀의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훅하고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니……. 조금만 더.”
그가 자신도 모르게 뛰어나온 말에 당황하고 있을 때 소명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래요. 여기 너무 좋죠. 그럼 조금만 더 있다가요.”
“그래요.”
도하는 목이 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꽂혀 있던 빨대를 힘 있게 쭉 빨아들였다.
******
한편 처음으로 지성과 라희는 각방을 썼다. 라희는 술에 취해 거실에서 자고 지성은 안방에서 잠을 잤고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지성은 일요일이라 늦잠을 더 잘 수도 있었지만, 눈을 뜨고 나서 도무지 다시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소명이가?
차 대표와?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 이혼이 완벽히 성립한 것도 아닌데. 이혼 도장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소명을 버려도 소명이는 자신을 영원히 잊지 않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자신은 좋은 남자, 그녀가 사랑한 유일했던 남자로 남고 싶었다.
그는 소명을 배신하고 새파랗게 어린 여자와 한 침대에서 몸을 섞어도 소명이는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타오르는 질투심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도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대표와?
지성은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서 정수기로 가 컵에 물을 받은 뒤 정신없이 꿀꺽꿀꺽 마셔댔다.
지성은 그제야 부엌과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은 어제 라희가 먹은 술병이 너저분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설거짓거리도 잔뜩 쌓여 있었다.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지성의 눈엔 소파에서 불편하게 자는 라희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부글부글 타오르는 질투를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성은 욕실로 가서 얼른 샤워하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라희는 아직도 피곤한지 지성이 나간 것도 모르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지성은 차를 몰고 소명과 자신이 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 그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알기가 어려웠다.
소명이 다른 남자와 만난다는 사실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소명을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명이 자기 여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된다는 사실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차를 몰고 거리를 달리면서도 입에서는 커다란 한숨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때 지성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인을 확인하니 라희였다.
그는 핸드폰이 계속 울리는 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은 라희의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곧이어 도착한 지성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소명의 집 앞에 도착했다.
떨리는 맘으로 초인종 앞에 선 지성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초인종에 손가락을 올리고 눈을 질끈 감은 후 힘을 주어 눌렀다.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한참 울리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성은 다시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소명을 불러댔다.
“소명아? 소명아. 문 좀 열어봐.”
한참을 두드리다 지성은 소명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가는데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성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딜 간 거야?”
한참을 기다려도 소명은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엘리베이터의 내림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올라와 멈췄다.
지성이 고개를 푹 숙이고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여서 지성은 소명인가 싶어 반가운 표정으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곧 문이 열렸고 지성은 너무 놀라 뒷걸음쳤다.
똑같은 셔츠를 입고 있는 소명과 도하가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내렸기 때문이었다.
“소……소명아!”
지성은 부들부들 떨며 소명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