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밀어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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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밀어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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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밀어내지 마
2022.10.03.
라희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재윤이었다. 라희는 휴대폰에 찍혀 있는 재윤의 이름과 번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솔직히 지금 그녀에게는 누군가가 너무 필요했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은 혼자였다. 화가 나서 지성을 보내긴 했지만, 그녀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라희는 오늘도 기분이 좋지 않아 친구들과 클럽에 갔지만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아 중간에 혼자 와 버렸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마치 알기라도 하듯 재윤은 한번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또 라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라희는 수많은 내적갈등 끝에 결국 전화를 받고 말았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듣고만 있던 라희에게 수화기 너머 그녀를 걱정하는 재윤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희야,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고?]
“…….”
재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라희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항상 자신이 힘들 때 옆에는 재윤이 있었다.
그런 그가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동안 그에게 막 대한 걸 생각하니 갑자기 미안해졌다.
[라희야, 나 너네 집 앞에 와 있어. 너무 보고 싶어. 다른 거 하나도 안 바래. 얼굴 한 번만 보자.]
“돌……아가.”
라희는 재윤을 만나고 싶었지만, 자신이 재윤을 보면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고 참으며 재윤을 돌려보내려 애를 썼다.
[라희야,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 너 행복 깨지 않을게. 한 번만 작별 인사라도 하게 해줘.]
‘작별 인사?’
‘마지막?’
재윤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맞는 일이지만 그의 입에서 마지막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라희는 갑자기 슬퍼졌다.
‘재윤이가 떠나버리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라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재윤에게 말했다.
“마지막이라고?”
[그래. 네가 행복하면 난 좋아. 네가 인제 그만 방황하고 안정 찾는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바래.]
‘재윤아……. 너 정말 왜 이러니?’
라희가 아무 말이 없자 재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목소리가 너무 안 좋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
라희는 자신만을 이렇게 위해주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진심이 느껴졌다.
재윤은 라희와 만날 때 항상 그녀를 위해 주었고, 헌신적이었다. 그런 그의 헌신이 나중에 그녀에겐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런 그의 사랑이 어느 순간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그가 옆에 있는 데도 다른 곳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재윤의 사랑만으로 그녀의 본능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결국 라희의 바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별했다. 라희가 재윤과 헤어지고 수많은 남자를 만날 때도 재윤은 언제나 라희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이별 선언에 식음을 전폐하고 피폐해져 가면서도 그녀를 차마 잊을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하지만, 그녀의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외로움과 허함을 자꾸만 다른 남자로 보상받으려는 그녀의 상처를 알기에 그는 그녀를 더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지금 만나는 남자와 결혼까지 생각한다며 그를 밀쳐냈다.
이제야 그녀가 오랜 방황을 끝내고 행복해진다면 자신이 그녀를 잊는 게 맞는 일인 것 같았다.
[라희야, 한……번만]
재윤은 마지막으로 라희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애원했다.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라희의 오피스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윤아.”
재윤은 라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뛰어나왔는지 라희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그녀를 본 재윤은 갑자기 속에서 뭉클하는 것이 치고 올라왔다.
이기적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버린 그녀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아름다웠다.
“라희…….”
차마 그녀의 이름을 다 부르지도 못하고 뒤를 얼버무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톡 치면 왈칵 쏟아져 나올지도 몰랐다.
“재윤아…….”
라희도 자신을 위해주는 재윤의 마음이 정말 고마워서 지성 때문에 힘든 맘을 그에 품에 안겨서라도 위로받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누군가가 너무 필요했다.
하지만 재윤은 라희를 애처로운 눈으로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라희는 그에게 한 발자국 걸어가서 그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재윤이 라희를 보며 말했다.
“나와 줘서 고맙다.”
“재윤아.”
“잘 살아. 이제는 진짜 나한테 한 것처럼 그 사람한테 그러지 마. 행복해라.”
“재윤아, 왜 그래?”
“너 못 잊어서 힘든 건 내 몫이고 너 잘 살면 난 그걸로 됐어.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게. 간다.”
“가지 마.”
라희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은 재윤은 너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가지 마.”
“라희야?”
“안아줘.”
라희의 말을 들은 재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겨 세게 그녀를 안고 말았다.
재윤은 지금 자신의 품에 쏙 들어와 안긴 이 여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라희는 오랜만에 안긴 재윤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다.
온종일 허탈하고 쓸쓸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린 기분이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재윤이 필요했다. 재윤이 또 언제 지겨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재윤이 라희를 보면서 말했다.
“라희야, 나한테 와. 비록 난 부자는 아니지만 너 하나 먹여 살릴 능력 있어.”
라희는 그의 품에 안겨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라희는 재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녀의 말에 놀란 재윤은 눈이 커다래졌다.
“너 결혼할 사람은?”
“끝났어.”
“정말?”
“이제 너만 볼 거야.”
“라희야.”
재윤은 라희를 더 세게 안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매혹적인 표정으로 재윤을 올려다보았다.
재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을 입술을 살며시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꼭 껴안고 그녀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열정적으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에게 집중했다.
******
소명은 자신에게 일어난 이 사건에 다시금 힘이 빠지고 지쳤다.
마음을 먹고 다시 일어서려고 하면 또 다른 사건이 터져 자신을 힘들게 하니 아무리 긍정주의자인 소명도 오늘은 지치고 기운이 빠지는 날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의 배신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고통을 느꼈는데 이혼 조정 기간에까지, 나타나 인제 와서 자신을 못 잊는 것 같은 코스프레를 하는 지성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아까 지성이 한 말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도하와 무슨 관계라도 될까 봐 안달 부리고 조바심 내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이렇게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다니!
모든 게 지겹고 신경 쓰기조차 싫었다.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거실로 걸어 들어와서 핸드폰의 전원을 꾹 눌러 꺼버리고 셔츠와 바지를 벗어 던졌다.
원래 같으면 세탁실로 가서 정리하고 씻고 방으로 들어갈 텐데 오늘은 정말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바닥에 벗어 던진 옷을 그대로 두고 침실로 들어가 누웠다.
소명은 사실 많이 지쳐 있었다. 상상 한 번 해보지 못한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움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소명은 잠이라도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하루빨리 한 달이 지나 지성과 완벽하게 남남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명은 지성일까 봐 두려워졌다.
숨죽이고 아무 말 없이 초인종 소리가 멈추길 바라고 있는데 이어서 문을 노크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소명 씨?”
현관문 밖에서 나는 남자의 목소리는 지성이 아닌 도하였다.
소명은 얼른 일어나 티셔츠에 반바지로 갈아입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밖에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한 도하가 서 있었다.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며 집 밖으로 나왔다.
“소명 씨,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전화가 꺼져 있어서 걱정되어서요.”
“도하 씨, 정말 너무 미안해요.”
“자꾸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이제 더 이상 저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갑작스러운 소명의 말에 도하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명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제 일에 더 이상 도하 씨 끌어들이기 싫어요.”
“소명 씨?”
“그리고 제 걱정도 하지 마요.”
“네? 소명 씨? 자꾸 왜 날 밀어내요?”
“네??”
“소명 씨 돕고 싶은 거 진심이에요.”
“지성이한테 도하 씨 사랑한다고 거짓말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너무 귀찮게 하는 통에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어요.”
소명은 자신이 한 거짓말 때문에 일이 너무 커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뭘 그만둔다는 건데요?”
도하는 소명의 말이 섭섭해서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우리 친구 하는 거요.”
“소명 씨?”
“미안해요. 저한테 잘해주신 거 못 잊을 거예요. 저 진심이에요.”
“그래요. 그만두죠.”
“네. 도하 씨.”
도하가 그만두자는 말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해버리자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도하에 섭섭한 감정이 일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그를 더 이상 복잡한 치정 싸움에 끌어들이기 싫었다.
그녀는 자기 일을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다.
소명은 도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오늘따라 더 알기 어려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소명은 도하에게 미안해 그를 살짝 올려다보다가 눈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자 갑자기 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끝이네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제 소명 씨랑 친구 안 하려고요.”
소명은 도하의 선전포고에 그가 많이 상처받은 거 같아 마음이 아파졌다.
“그럼 들어가세요.”
소명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하는데 도하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소명은 그를 바라보았다.
“저 이제 소명 씨 남자 할래요.”
생각지도 못한 도하의 폭탄 발언에 놀란 소명은 잠시 말을 잃었다.
“네?”
소명은 심장이 쿵 하고 깊이 내려앉았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소명 씨, 좋아한다고요.”
소명은 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놀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도하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소명 씨?”
소명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네?”
“저한테 도하 씨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에요. 도하 씨,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소명 씨. 나 하나도 안 힘들어요. 나 밀어내지 마요.”
“도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