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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나 너 때문에 이혼까지 했는데 (31/101)


제31화 나 너 때문에 이혼까지 했는데
2022.10.17.



 
라희는 지성이 술 취한 목소리로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기분 나쁜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때 재윤의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라희야, 그 사람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어.]

[지금 집 앞에 왔어. 그러잖아도.]

[귀찮게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해결할까?]

[아니야, 재윤아, 그냥 빨리 집으로 가.]

[걱정돼서 그렇지.]

[내가 해결할 수 있어.]

[라희야, 나 너 믿어.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해. 알았지?]

[응.]

그때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쾅쾅쾅


“라희야, 문 열어.”

라희는 큰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와서?’

그녀는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지성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지성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고 눈 주변에 퍼렇게 멍이 들어 가관이었다.


“오빠? 얼굴이 왜 이래?”

지성의 얼굴을 보고 라희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라희야, 나 많이 힘들었다.”

“오빠, 진짜 왜 이러고 다니는 거야?”

“우리 진짜 끝난 거야?”

지성이 라희를 바라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

“왜 아무 말을 못 해? 라희야?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데…….”

“오빠가 한 행동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라희야, 그건 사정이 있었어. 나 정말 많이 힘들었어. 너한테 신경 못 써 준 건 진짜 미안하다. 나 너 때문에 이혼까지 했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라희야…….”

“부인 버리고 나 선택한 건 오빠고, 그런 나를 내팽개치고 모른 척했던 것도 오빠야.”

“라희야, 아니야. 모른 척한 게 아니었어. 진짜 사정이 있었어.”

“그 힘든 사정이 도대체 뭔데? 왜 말을 안 해?”

“그게…….”

지성은 라희의 눈치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소명이가…….”

“또 그 여자 얘기야?”

라희는 지성의 입에서 소명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화가 나는지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아니. 다 듣고 말해.”

“빨리 말하기나 해.”

라희는 지성이 얄미운 듯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소명이가 대표랑 사귀는 거 같아.”

“뭐! 뭐라고? 아……아니 오빠 우선 들어와서 다시 말해봐.”

지성이 라희의 집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오빠, 빨리 말해봐. 빨리.”

라희는 지성의 전 부인이 대표님과 사귄다는 말에 너무 놀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서 어이가 없고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렸다.


“그게 말이 돼?”

“그 자식이 몇 달 전에 우리 집 옆집으로 이사 왔나 봐.”

“뭐? 근데 왜 말 안 했어?”

“너 신경 쓰일까 봐.”

“그래서?”

“저번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수상쩍다고 했더니만.”

“진짜야?”

“그런 것 같아.”

“그럼 오빠 그 눈도? 싸운 거야?”

“……응.”

“오빠! 아무리 그래도 싸우면 어떡해!”

“라희야!”

“진짜 개념 없다.”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나도 너무 괴로웠다고.”

“오빠.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는 너무 이기적이야.”

“뭐?”

“내 생각은 안 했지? 대표님이랑 그 여자랑 연애하는 게 열 받아서 지금 눈이 돌아간 거잖아. 오빠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 진짜 실망이야.”

라희는 자신의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다.

결국 자신을 등한시하고 정신없이 집을 나간 것도 그 여자의 새 남자가 대표라는 사실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지성이 너무 한심하고 소름 끼쳤다.


“나는 그래도 소명이가 그 새끼한테 이용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이 돼서…….”

“오빠 그럴 거면 왜 나랑 만났어?”

“어?”

“지금 내 눈에 오빠는 오빠 부인 못 잊어서 후회하는 꼴로밖에 안 보여. 오빠 부인 걱정할 게 아니라 우리 모가지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사내 불륜이잖아.”

“사내 불륜은 무슨……. 이제 이혼도 했는데.”

“이혼하기 전에 우리 만난 거 차 대표님이 알고 있는 거잖아. 나 잘리기 싫어. 내가 이 회사를 어떻게 들어왔는데……. 오빠는 금수저라서 모르겠지.”

“라희야, 너 나랑 결혼하면 일 그만둬.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나 오빠랑 결혼 안 해.”

“뭐? 너 왜 그래?”

“그나마 다행이야. 오빠의 찌질한 실체를 빨리 알게 돼서. 솔직히 말할까? 오빠 엄만 최악의 시어머니고 오빠는 극한 이기주의자야. 나랑 끝나도 다른 여자는 만나지 마. 민폐야. 민폐.”

“라희야……. 네가 어떻게 내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

“오빠는 나한테 벌써 대못 10개는 박았어. 더 이상 말하지 마. 지친다. 지쳐. 오빠 이제 나가 줄래.”

“싫어. 난 너랑 못 헤어져.”

“오빠, 나 예전에 만나던 사람 다시 만나.”

“뭐? 너? 진짜?”

“나 원래 이런 애야. 됐지? 그러니까 당장 꺼져. 안 나가면 경찰 부를 거야.”

“라희야? 뭐? 경찰? 그래. 넌 어떻게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울 수가 있어?”

“오빠도 그리 깨끗하진 않잖아. 나가 당장. 길에서 만나도 다시는 아는 척하지 마.”

“허…….”

지성은 자신의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때 온전하고 단란했던 가정이 자신 때문에 깨어졌다. 그는 라희를 위해서 소명을 버렸다.

소명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자신이 라희의 유혹에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라희에게 물어보기로 다짐했다. 이대로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라희야, 지금 화나서 막 말하는 거지?”

“아니. 나 진짜 오빠 같은 사람 너무 싫어. 질린다.”

“왜 그래? 진짜? 아까 남자 생겼단 말 거짓말이지?”

라희는 지성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그를 조롱했다.


“오빠,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

“아까 1층에서 만난 남자, 내가 사귀는 사람이야.”

“뭐? 너 진짜?”

“왜 치기라도 하게? 나가! 당장!”

“하아…….”

지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다가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라희는 쓸쓸한 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내가 뭐에 홀렸었지. 어떻게 저런 인간을.”

지성이 돌아간 뒤에 라희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 팔자에 금수저가 웬 말이야. 뭔가 이상하다 했다.”

라희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회사는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곳이었다.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그녀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고작 남자 하나 잘못 만나 자신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 여자 뭔데! 그 차가운 차 대표를 꾀었어? 이혼녀가 재주도 좋네. 진짜 이제 어쩔 거야.’

 

******

한편 집으로 돌아온 도하는 샤워를 마치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다.

아까는 많이 피곤한 것 같았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잠이 싹 달아났다.

도하는 아까 소명이 자신의 품에 쏙 안겼던 일이 계속 생각났다.

작고 가녀린 그녀의 몸이 왜 이리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는지.

그녀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이리도 싫은지 도하는 계속 소명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는 소명과 문 앞에서 헤어지면서 그녀와 함께 사는 꿈을 꿨다.


‘소명 씨와 한집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한참 소명을 생각하는데 도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도하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도하의 어머니 은영이었다.

항상 일찍 잠자리에 드는 엄마가 이렇게 한밤에 전화를 걸었다는 건 아마도 소명의 일을 알게 된 게 분명했다.

도하는 무거운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하야.”

“응. 엄마.”

“너 괜찮아?”

“뭐가?”

“아버지 화 많이 나셨어.”

“알아.”

“엄마가 들은 얘기 사실이야?”

“응.”

“도하야, 엄마는 그게…….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 엄마까지 왜 그래?”

“내가 회장님이랑 결혼하고 너무 힘들었어. 너도 알지? 엄마는 아버지랑 만날 자격조건이 안 됐었다는 거.”

“엄마,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데 자격조건이 왜 필요한데?”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막상 살아보니 너무 힘들더라.”

“엄마, 나 믿어주면 안 돼?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잖아.”

“그래.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면 엄마도 만나면 좋아할 것 같아. 그런데 네 아버지 고집 네가 잘 알잖아. 우리 도하가 힘든 거 엄마 너무 싫어.”

“엄마, 나 그 여자 놓치면 못 살 것 같아.”

“도하야…….”

아들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다니 은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하는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셌다. 한 번 한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근성이 있던 아이였다.

은영은 곧 있을 부자간의 싸움에 도하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엄마, 늦었는데 주무세요. 엄마 벌써 잘 시간 지났다.”

“도하야, 항상 밥 잘 챙겨 먹고 집에 좀 와. 너무 보고 싶어. 우리 아들.”

“알았어요.”

도하는 은영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영의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그건 도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명 씨만 자신의 곁에 있다면 어떤 일도 못 할 게 없었다.

도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소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소명 씨, 푹 쉬고 잘 자요.]

곧이어 소명에게 답이 왔다.


[네. 도하 씨. 오늘 운전하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푹 쉬세요.]

도하는 소명이 보내준 문자를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소명 역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소명은 팔을 뻗어 핸드폰을 터치해서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 도하 씨.”

도하의 메시지를 받고 기분이 좋아진 소명도 그에게 정성스러운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 갑자기 소명의 전화가 울려댔다.

모르는 번호여서 소명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저…… 채라희예요.]

 

 
소명은 라희가 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너무 불쾌했다.


“저는 당신이랑 할 말이 없어요.”

[저…… 잠시만 만나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더군다나 이젠 만날 이유도 없어졌고요.”

[제가……. 만날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제발 부탁드려요.]

심하게 저자세로 나오는 그녀의 행동이 너무 수상했다.


“그럼…… 하아. 내일 보죠.”

소명은 하는 수 없이 라희와 약속을 정했다.

장소는 근처 공원 옆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

한편 지성은 라희의 집에서 나와 다시 대리를 불러 자신의 본가로 돌아왔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은 항상 자신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부인을 버렸고 또 얼마 못 가 새로운 여자에게 배신당했다.

비틀거리며 술에 취해 들어온 아들을 정 여사는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아무런 잔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성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금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연신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한숨이 오열로 바뀌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


‘소명아, 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렇게 비참한 기분.’

지성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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