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난 너랑 이혼 안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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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난 너랑 이혼 안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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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난 너랑 이혼 안 할 거야
2022.11.03.
“뭐? 내가 하라고 한 거 아니야. 아빠가 한 거지.”
“네가 직접 말씀드려.”
“뭘?”
“나랑 결혼 안 한다고.”
“왜 그래야 해? 내가?”
“그럼 넌 나랑 결혼할 생각이야?”
“응.”
“서빈아, 고집 피우지 마.”
“그 여자……. 어차피 오빠랑 결혼 못 해. 오빠도 알고 있잖아. 안 그래?”
“아니, 난 소명 씨랑 결혼할 거야.”
“오빠, 미쳤어?”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부를까 봐 말해두는데 난 이제 다시는 안 와. 그러니 네 입으로 말씀드려. 너한테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거야. 앞으로 소명 씨 한 번만 더 찾아오는 날엔 내가 너 가만 안 둔다. 내 입으로 네가 했던 짓 진짜 말하기 싫어. 거기까지 사람 몰고 가지 마.”
“오빠……, 그래도……. 싫어. 나 오빠 포기 못 해.”
자꾸 자신만 보면 더 냉정해지는 도하의 행동이 너무 섭섭해서 서빈은 눈물이 저절로 눈 밑으로 새어 나왔다.
“그때 나……. 잘했다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잖아. 다신 안 그럴게. 오빠도 나 사랑했잖아.”
“서빈아, 이제는 아니야. 간다.”
그때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오 여사가 서빈과 도하가 하는 말을 듣고 말았다.
오 여사를 본 도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냉정한 표정으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오 여사는 울고 있는 서빈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서빈아, 도대체 도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무슨 말을 해. 하긴.”
“엄마가 다 들었는데. 네가 뭔 짓을 했는데? 결혼을 안 하겠다는 소리는 뭐니?”
“아니야. 아니라고.”
“서빈아? 엄마한테라도 말을 해야지.”
“엄마, 나 너무 피곤해. 이제 가.”
“너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못 사는 거야. 네가 뭐가 부족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엄마가 아버지한테는 잘 말씀드릴게.”
“싫어. 싫다고. 난 오빠 없음 안 돼.”
서빈의 고집에 오 여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서빈이 도하를 많이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도하는 자기가 사랑하는 딸에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 여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답답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서빈은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도하가 한 말이 가슴에 남아 온종일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그가 자신을 차갑게 대할수록 그녀의 집착은 점점 심해져 갔다.
‘두고 봐, 넌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반드시…….’
도하는 서빈의 병실을 나오면서 더 이상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서빈과 자기가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고, 서빈이 한눈을 팔아 헤어졌다는 얘기를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기 싫었다.
그냥 서빈만 마음을 바꿔 먹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소명을 힘들게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봐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하는 이 순간 소명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면 어두웠던 자신의 감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녀와 있으면 그냥 그것으로 좋아서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그녀가 정말 고마웠다. 그녀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하는 병원을 나오면서 차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차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은 잘 갔다 왔니?”
차 회장은 자기 말을 들어 준 도하에게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응. 그래.”
“서빈이한테 결혼 안 한다고 이 회장님한테 직접 말씀드리라고 말하고 왔습니다.”
“뭐. 너…… 이놈의 새끼.”
“아픈 애한테 찾아가서 그딴 소리를 하고. 서빈이는 얼마나 상처고. 내가 이 회장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너 도대체가.”
수화기 너머로 노발대발하는 차 회장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려왔다.
“…….”
“도하야, 저번에 서빈이한테 대충 들었다. 네가 무슨 오해를 하는 것 같다고. 서빈이 남자친구 없었대. 그때. 네가 잘못 본 거라던데. 사내새끼가 그런 걸 오래 마음에 품고 있지 마라.”
“아버지……. 하아. 저 여태껏 아버지 말씀 어긴 적 없던 거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도하야, 이 아비는 너보다 많이 살았고, 네가 행복하게 살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야. 왜 그 힘든 가시밭길을 너 스스로 걸어가려고 하는 건데?”
“저……. 그 사람 없으면 안 돼요. 이제 어떤 일로도 저랑 서빈이 엮지 마세요.”
“도하야……, 너 정…….”
도하는 차 회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제는 소명을 위해 나서야 한다. 그동안 그녀의 상처가 더 덧나기 전에 그가 그녀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소명 씨 지켜 줄 거야. 내가…….’
자신이 말을 하던 중에 전화를 끊어버린 도하의 행동에 차 회장은 더 화가 났다.
친근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삼십사 년을 살아오면서 별다른 사고 없이 잘 자라준 소중한 아들이었는데……. 상상도 못 할 이런 일로 자신의 속을 썩이다니!
차 회장은 머리가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도하는 전화를 끊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도하 옆에서 서 있던 이 비서는 도하의 통화 내용을 엿들으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도하는 세단에 올라타자마자 이 비서에게 물었다.
“오늘 일정은 다 끝난 거죠?”
“네. 대표님.”
“집으로 바로 가주세요.”
“네.”
도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소명을 생각했다.
******
라희는 회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도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에 계속 소명이 한 말과 지성이 한 말이 번갈아서 반복됐다.
입에서는 계속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일어나지도 않은 일, 사서 걱정하지 말자.’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려고 애쓰면서도 뭔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들어서 힘들었다.
라희는 업무를 하다 말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마다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소문 안 났어. 다들 내가 그런 거 아무도 몰라.’
라희는 침착하려고 애를 쓰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지성은 이번 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소명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봤지만, 소명이 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라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소명이와 비교하는 자신을 느꼈다.
이번에 라희의 배신을 겪으면서 지성의 생각은 더 확실해졌다.
‘그래, 내가 잘못 걸린 거야. 라희한테. 내가 라희한테 넘어간 거야. 순간.’
지성은 끝없이 자기 합리화를 해댔다.
자신의 첫사랑 소명과 결혼하기 위해 했던 수많은 노력과 결혼식 때 눈부시게 아름답던 그녀를 바라보며 벅차했던 지난날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소명이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소명의 마음속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히 남아 있을 거라고 자신하면서.
지성은 어서 퇴근 시간이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퇴근 시간이 되기도 전에 지성은 가방을 메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고 발걸음을 디디는 순간 어머니 정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성아, 법원에서 서류가 왔어.”
“네? 법원이요?”
“네 책상에 올려놨어.”
“네.”
순간 안 좋은 예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지성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찢어서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지성은 너무 놀라 입이 턱하고 벌어졌다.
‘소명이가……. 어떻게 이래!’
편지 안에는 소명이 보낸 이혼 소장 소송고지서가 들어 있었다.
‘소명아……. 난 오늘 너한테 가려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근데 넌 나한테 이걸 보낸 거야?’
지성은 눈빛은 절망감에 휩싸였고 그의 얼굴은 분노에 일그러졌다.
‘안 해, 못 해. 난 너랑 이혼 안 할 거야.’
지성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그가 제일 아끼는 슈트를 꺼내 바라보았다. 그는 슈트를 바라보며 소명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옷은 소명이 받은 월급으로 백화점에 가서 사준 슈트였다.
그가 탈의실에서 그 슈트를 입고 나오자 소명의 얼굴이 환해지며 해맑게 웃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소명아, 나 이렇게 비싼 옷 안 입어도 돼.”
“와, 진짜 잘 어울려. 아니야. 내가 꼭 사주고 싶어서 그래. 맘에 들어?”
“응.”
“잘 어울린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은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었는데…….
지성은 소명이 사준 슈트를 입고 정성껏 머리를 매만지고 자신의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치장을 마쳤다.
어떻게든 소명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너도 나밖에 없지? 너 나 사랑했잖아. 우리한테 그동안 쌓은 추억이 있어.’
한껏 꾸민 지성의 모습은 나무랄 데 없이 멋있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넓은 어깨를 가져서 슈트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는 소명을 만날 준비를 마치고 캐리어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 조그마한 상자를 간신히 찾아 꺼냈다.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짓고 그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안에는 결혼반지가 들어 있었다.
라희가 버리라고 했었는데 차마 버리지 못해 캐리어에 처박아 뒀었다.
그는 반지를 꺼내 자기 손가락에 꼈다. 한동안 안 껴서 안 맞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그의 손에 꼭 맞았다.
지성은 반지를 끼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후에 자신의 방을 나왔다.
지성이 깔끔한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오자 놀란 정 여사는 지성을 보며 말했다.
“어머, 지성아, 어디 가니? 오늘 너무 잘생겼다. 우리 아들.”
“엄마…….”
“응?”
“나 소명이 만나러 가.”
“소명이?”
“나 소명이랑 다시 시작해 보려고.”
“아이고, 잘 생각했어. 요새 폐인처럼 하고 다녀서 엄마가 말을 못 하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엄마, 속 썩여서 죄송해요.”
“아니야. 지성아, 소명이 잘 만나고 와. 알았지?”
“네. 갔다 올게요,”
“그래.”
지성은 정 여사를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짓곤 밖으로 나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결연한 표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
한편 라희는 피곤한 몸으로 자신의 자리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이런 자신의 맘을 재윤에게라도 털어 놓고 싶은 데 하필 재윤이 출장을 가서 그녀 곁에 아무도 없었다.
그가 없으니 또 그녀의 고질병, 외로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신의 옆에 없으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자신이 꿈꾸고 바라던 일이 자꾸만 꼬여가고 망가지는 모습에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때 우체국 배달원이 라희에게 다가왔다. 라희는 그를 보자 놀라 눈이 커졌다.
“채라희씨?”
“네?”
“본인 맞으세요?”
“네.”
“여기 이름 정자체로 써 주세요.”
라희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배달원이 내민 단말기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라희의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떨리자 배달원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안면에 미소를 띠며 간신히 서명을 끝마쳤다.
‘법원?’
라희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편지 봉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꼬리를 치켜뜨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