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이미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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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이미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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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이미 늦었어
2022.11.07.
라희는 차마 사무실 안에서 봉투를 뜯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법원에서 온 거면 오빠 부인이 보낸 건가? 소송은 안 하고 싶다고 하더니. 할 건 다 하네.’
라희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궁금해 미치겠다가도 열어보기가 두려웠다.
순진한 얼굴로 착해 보였었는데 보통내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라희는 떨리는 감정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이니 집에 가는 길에 열어보려고 꾹 참고 있었다.
라희의 표정이 좋지 않자 연희가 다가와 라희에게 물었다.
“라희 씨? 어디 아파?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아…….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요.”
라희는 연희랑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퇴근 시간이 되자 라희는 연희를 보며 말했다.
“저 오늘 먼저 퇴근할게요.”
“어…… 그래. 푹 쉬고.”
“네.”
라희는 허둥지둥 가방을 들고 서랍에 넣어둔 봉투를 가방에 얼른 집어넣었다.
연희는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이 서두르는 라희의 행동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라희가 숨기듯 봉투를 가방에 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봉투에 적힌 글자를 보고 말았다.
‘법원? 무슨 일이지?’
연희는 라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라희는 겉으로 보기에 싹싹하고 업무 능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연희는 라희와 친한 것 같다가도 막상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점점 멀게만 느껴졌다.
오늘도 자신을 속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라희에게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연희는 속상한 표정으로 뛰어나가는 라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라희는 얼른 뛰어가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1층 로비 화장실로 뛰어갔다.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뜯는데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휴우. 휴.”
라희는 뜯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소송 고지서?’
‘상간녀 위자료 소송?’
‘상간녀?’
라희는 상간녀라는 말에 너무 기분이 나빴다.
‘결국 소송을 하자는 거지? 지금?’
라희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 건 사실이고 소송에서 이길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소송에서 지면 위자료까지 줘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내가 오빠한테 받은 게 도대체 뭔데? 옷 몇 벌 가지고 지금 생돈을 물어주게 생겼네. 하여간 내가 미쳤지. 안지성을 좋아한 내가 바보지. 바보야.’
라희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짜증이 나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연신 한숨만 새어 나왔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라희는 자신이 너무 처량하게 생각되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후회해 봐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성과 결혼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잘생긴 지성의 외모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만, 막상 사귀고 나니 지성은 더 매력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마마보이에다가 자기 부인을 못 잊고 질척거려서 라희의 애를 태웠다.
라희는 자기 남자에게 자신이 가장 일 순위이길 바랐지만, 지성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부도 그의 얼굴도 싫어졌다.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그녀였기에 지성의 어머니는 정말 무섭고도 피하고만 싶은 존재였다.
시집살이를 감당하면서 살 자신은 추호도 없었다.
라희의 달콤한 핑크빛 미래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는 졸지에 상간녀라는 주홍 글씨를 안고 살아갈 위기에 처했다.
라희는 떨리는 숨소리를 가다듬고 서류를 다시 가방에 구겨 넣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후 무작정 밖으로 걸어 나왔다.
원래 지하철을 타야 하지만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걷다가 자그마한 카페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자리에 앉자마자 빨대를 빼고 컵을 입에 가져다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분해.’
자신이 잘못한 일투성인데도 라희는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자신은 지성과의 만남으로 손해만 봤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화가 나서 감정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라희는 핸드폰으로 열심히 변호사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뚝뚝 묻어났다.
******
지성은 소명의 집 지하 주차장에 다 와 갈 무렵 살짝 긴장감이 몰려왔다.
사실 소명의 반응이 걱정되기도 하였다.
소명이 자신에게 보이는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 쉽게 용서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에 소명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나서 소명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스무 살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땐 그의 전부가 소명이었다.
그의 세계에 소명이 발을 디딘 순간 지성이 느꼈던 행복감의 기억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지성은 소명이 자꾸만 아쉬워졌다. 이대로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것만 같았다.
지성은 굳게 결심하고 차에서 내린 후에 자신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녀의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지성은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안에서 소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초인종이 울려 인터폰을 확인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명이 다시 베란다로 나가려 할 때 또 한 번 벨이 울렸다. 그녀는 인터폰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그때 지성이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나야……. 소명아.”
‘헉.’
소명은 갑자기 나타난 지성 때문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명아, 잠깐만 얘기 좀 하자.”
안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성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문 쪽으로 가 소명에게 소리쳤다.
“소명아, 할 얘기가 있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제발……. 잠깐만 나와 줘.”
여전히 소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성은 답답한 마음에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쾅쾅쾅
“소명아. 소명아.”
지성이 문을 세게 두드리자 안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
“소명아. 왜 이렇게 냉정해. 나 이혼 못 해. 아니 안 해.”
“이미 소송 들어갔어. 알고 있지? 그래서 온 거잖아.”
“아니. 그래서 온 거 아니야. 나 너 보고 싶어서 왔어.”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이젠 정말 듣기도 싫어.”
“문도 안 열어 주는 거야?”
“돌아가. 나는 네 얼굴 보는 것도 이젠 소름 끼쳐.”
“소명아, 나 라희랑 헤어졌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밖에 없어. 잠시 내가 미쳤었나 봐.”
“지성아……. 그만해. 이제 내가 싫어. 너.”
“뭐? 그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소명아……. 내가 네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게.”
“…….”
“소명아……. 문 좀. 제발.”
지성은 어느 정도 예감은 했었지만 너무나 냉정한 소명의 태도에 섭섭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소명이 냉정할수록 그녀에 대한 마음이 더 차올랐다.
그는 가슴에 턱 하고 위기감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에 자신을 사랑해주던 소명이 아니었다.
‘진짜 나 용서 안 해주면 어떡하지? 나는 소명이 없이 어떻게 살지?’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떻게든 다시 소명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지성은 아무 대답이 없는 소명을 향해 다시 애원하기 시작했다.
“소명아, 나 네가 아무리 그래도 너 사랑해.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어. 나 너 절대로 못 놔.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여전히 소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소명아, 내가 잘못했어.”
지성은 소명의 현관문을 바라보며 결심이 선 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 무릎까지 꿇었어. 제발 나와 줘.”
“소명아……. 보고 싶어.”
소명은 지성의 난동에 너무 화가 났다.
‘인제 와서!’
그의 이기심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에 그에게 모든 걸 걸었었다.
청춘을 포기하고 그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그의 여자가 되었었다.
그런 자신을 기만하고 냉정히 버린 남자가 다시 찾아와 애걸복걸 매달리는 모습을 보니 소명은 그가 더 싫어졌다.
그는 정말로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이렇게 나중에 후회할 짓을 한 순간부터, 이미 잘못된 길로 향한 것이고, 그 길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둠의 길이었다.
‘이미 늦었어.’
소명은 그와 지금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자꾸만 예전의 아픔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왔다.
소명은 괴로운 맘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거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방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그가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 시각 지성은 다리에 쥐가 나는데도 꾹꾹 참으며 소명을 기다렸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녀가 자신을 용서해준다면 그는 견디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착한 소명이 뛰어와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자신의 품에 폭 안기는 상상을 하며 힘든 시간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소명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명아, 제발 나와 줘. 너무 보고 싶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졌는지…….
생각만 해도 너무 슬퍼졌다.
다리에 쥐가 나 힘든 순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누군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성은 혹시 도하가 내렸을까 봐 얼른 일어나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자기 다리를 주물러댔다.
지성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지성아!”
“엄……. 엄마.”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지성의 어머니 정 여사였다.
“너, 왜 이러고 앉아 있어. 얼른 일어나.”
“어…….”
하도 오래 앉아 있어서 지성은 일어서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댔다.
정 여사가 얼른 옆으로 와 팔을 부축했다.
“소명이가 문 안 열어 준다고 이렇게 하고 있어? 어? 엄마 속상해서 죽는 꼴 보고 싶어.”
“어떻게 왔어?”
“소명이가 문자 보냈더라.”
“하아…….”
지성은 오늘 결국 소명이를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엄마. 가세요. 나 오늘 소명이 반드시 보고 갈 거야.”
“오늘은 그만 가자. 나올 생각이 없으니 엄마한테 문자 보냈지. 소명이 마음 좀 추스르고 엄마랑 나중에 같이 오자.”
“소명아. 문 좀 열어. 어?”
지성은 아쉬운 듯 소명의 문을 계속 시끄럽게 두들겨 댔다.
“그만하지.”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도하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