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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괘씸죄 (38/101)


제38화 괘씸죄
2022.11.10.


도하는 한시라도 빨리 소명을 보고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도하는 소명의 집에 매달려 있는 지성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나타나다니!’

자신이 지은 잘못을 알지도 못한 채 뻔뻔하게 자꾸만 소명 앞에 나타나는 지성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참기가 어려웠다.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확 질러버렸다.

그의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서 지성을 강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지성이 소명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때 도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도하 쪽으로 획 돌리고 그를 미친 듯이 노려보았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꺼져.”

“남의 일 아닌데.”

도하의 말에 지성은 너무 화가 나 도하 쪽으로 달려갔다.

지성은 저번에 도하에게 맞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또 자기 일에 끼어들며 남 일이 아니라며 자신을 도발하는 도하가 죽이고 싶도록 얄미웠다.

그는 항상 도하가 대표이사라는 게 마음에 걸렸었다.

하지만 소명이만 다시 돌아온다면 이깟 회사 때려치우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눈치 안 봐. 너 죽었어.’

지성은 도하에게 달려들면서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렀다.

도하는 무표정으로 달려드는 지성의 팔을 잡아 뒤로 꺾어 버렸다.

도하의 손에 팔이 꺾인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러댔다.


“이거 놔. 아! 아! 아파.”

그때 지성의 어머니가 달려와 도하에게 팔을 놓으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안 놔. 빨리 놔. 이러다 사람 잡겠네.”

지성의 어머니가 야단법석을 떨자 그제야 도하는 지성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소명 씨, 인제 그만 괴롭혀. 그만큼이면 충분한 것 같은데.”

“네가 뭘 알아? 소명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

지성의 말에 도하는 그를 조롱하며 한껏 비웃었다.


“웃어? 너 지금 나 비웃냐?”

“정신 차려. 어떤 사람이 이렇게 구는데 참겠어. 지금 당신 이러는 거, 사람 괴롭히는 거라는 거 몰라?”


“난 소명이 마음만 돌려놓으면 돼. 나 소명이랑 이혼 안 할 거니까 너나 꺼져.”

“당신이 이혼 안 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뭐? 이게 그냥.”

지성이 또다시 도하에게 달려 들려 하자 정 여사가 아들을 가로막았다.


“지성아, 그만. 이제 가자. 상종 가치도 없는 인간이랑 더 이상 무슨 말을 해. 가자.”

“엄마.”

“얼른.”

정 여사가 소리를 꽥 지르고 지성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도하는 말없이 소명의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받는 고통을 자신이 대신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명이 다시 일어서려고 하면 또 나타나 괴롭히는 이 상황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를 힘겹게 만들었다.

도하는 그녀가 안쓰러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

도하는 우선 집으로 돌아와 곧 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명이 자신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해서 나서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아왔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대표님.”

“쉬시는데 죄송해요.”

“아, 별말씀을요. 괜찮습니다.”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네. 대표님. 말씀하시죠.”

“사설 경호업체 좀 알아봐 주세요.”

“네? 아……. 네. 무슨 일로? 우리 회사 경호업체에 연락할까요?”

“아니. 회사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소명 씨 모르게 경호해주시고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 도와주는 걸로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 비서님, 정말 감사합니다.”

도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예전의 도하랑은 비교도 안 될 변화였다.


“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도하가 얼마나 소명 씨를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서 이 비서의 마음이 씁쓸해졌다.

이 비서는 절대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도하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도하는 이 비서와 전화를 끊고 바로 현관문을 나섰다. 소명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 너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현관문을 두드리면 그녀가 놀랄까 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에 소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 씨…….”

지쳤는지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소명 씨? 괜찮아요?”

“네. 전 괜찮아요.”

“문 좀 열어줄래요?”

“네?”

“소명 씨, 보고 싶어요.”

도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 현관문이 열렸다.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그녀의 표정이 아주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소명은 이내 웃으며 도하를 바라봤다.


“또, 도하 씨를 힘들게 했네요. 저 이러는 거 너무 싫은데……. 자꾸만 지쳐요.”

소명의 눈에 또 눈물이 맺히자 도하가 소명을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소명 씨, 그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 소명 씨 탓 아니에요. 내가 좀 더 일찍 못 와서 난 그게 더 미안해요.”

“도하 씨…….”

“저 오늘 서빈이 만나고 왔어요.”

“네?”

“병원에 입원했다고 아버지가 가보라고 해서요.”

“네…….”

“서빈이한테 다시는 안 온다고 말하고 왔어요. 다시는 소명 씨 불안하지 않게 할게요.”

“도하 씨……. 도하 씨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게 맞나 싶……어요. 우리 더 깊어지기 전에 제가 도하 씨 보내주는 게…….”

“소명 씨 그렇게 말하면 제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알아요?”

“…….”

“저 이제 소명 씨 없음 안 돼요.”

“그래도…….”

도하는 아무 말 없이 소명을 꽉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와락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도하 씨…….”

소명은 자꾸만 자신이 도하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파졌다.

하지만 이 남자의 따뜻함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때문에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자신을 이토록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인데.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에 폭 안겨서 지금의 힘듦을 위로 받았다.

그의 품에서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소명은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

한편 라희는 화장을 정성 들여 하고 옷도 얌전한 스타일로 골라 입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웨이브 진 화려한 긴 머리도 쫙 폈다.

그녀는 오늘 최대한 순수하게 보여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장착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변호사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라희는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젊고 능력 있어 보이는 남자 변호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채라희씨?”

라희도 변호사를 보고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변호사는 편안해 보이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라희가 소파에 앉자 변호사도 라희의 건너편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변호사 한 지석입니다.”

그는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했고 라희는 명함을 받아서 핸드백 안에 넣었다.

그러고 난 후 그녀는 핸드백에서 어제 온 소송 고지서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지석은 라희가 내민 소송 고지서를 펼쳐서 면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고지서를 보는 지석의 눈치를 보며 라희는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지서를 다 본 지석이 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지석을 보며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네…….”

“제가 어떻게 대처하셔야 하는지 알려 드릴게요.”

“네? 변호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소장을 받은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로 소송이 진행되는 겁니다. 이 소장을 꼼꼼하게 읽어 보시고 답변을 제출해야 합니다.”

“아……. 네.”

소장 안에 틀린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라희는 너무 초조해서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자존심이 구겨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간신히 참고 앉아 있었다.

‘참자. 참아야 해. 어차피 이 사람 소송 끝나면 다시는 안 볼 사람이야.’

라희는 최대한 얌전한 자세로 앉아서 이 시간이 빨리 흘러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근데 같은 회사에 다니시니까 유부남이라는 걸 모르고 만나시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지석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네.”

‘이런 젠장.’

라희는 자꾸만 꼬여가는 자신의 인생에 화가 치밀었다.

반박을 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지성이 유부남인 걸 알고도 일부러 그에게 접근했으니까.


“그리고 헤어지지 않고 본인 의지로 계속 만남을 이어오신 거네요.”

라희는 자꾸 자신을 몰아가는 지석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지금은 헤어졌어요.”

“라희 씨, 지금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아니라고, 지금은 헤어졌다고 하는 거는 아무 도움이 안 돼요.”

“네?”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할 시에는 오히려 괘씸죄가 적용돼서 더 큰 위자료까지 청구될 수 있어요.”

“뭐라고요?”

라희는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답변에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법원의 판결로 받을 수 있는 최고 위자료 액수가 오천만 원인데 좀 줄일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요.”

“오천만 원이요? 저도 그 사람한테 이용만 당했는데……. 저도 억울하다고요.”

라희는 화가 나자 자신도 모르게 본성이 드러났다.

그녀는 지석을 무섭게 노려보며 씩씩댔다.


“최대한 그쪽 부인 분 만나셔서 합의하시는 게 더 나을 듯해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당신……. 변호사 맞아? 나보고 무조건 빌라고? 나도 억울한데.”

지석은 라희의 안하무인 태도에 질려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고객님 입장에서…….”

“어디 변호사 사무실이 여기뿐이야?”

라희는 무섭게 지석을 노려보며 지석 앞에 놓여 있는 소송장을 집어 들어 핸드백에 쑤셔 넣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라희는 그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갔다.


“별 미친 여자를 다 봤네.”

지석은 라희한테 당한 일이 억울해서 어이가 없었다.


“허, 참. 어딜 가봐라. 위자료 줄여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지. 어쩜 저렇게 뻔뻔하냐.”

그는 기가 차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온 라희는 화가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상황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오천만 원! 누구 집 애 이름도 아니고.’

라희는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아니, 비싼 돈 주고 왜 변호사를 써? 여기밖에 없는 줄 알아? 내가 다 알아볼 거야.’

속으로 큰 소리를 쳐도 자꾸만 자신은 없어졌다.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다만 그것까지 인정하면 자신이 더 무너질까 봐 참고 있을 뿐이었다.


‘울지 마.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돼. 재윤아, 너 언제 오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

라희는 걸어갈 힘도 없어 버스 정류장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았다.


‘하아, 나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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