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구제불능
(43/101)
제43화 구제불능
(43/101)
제43화 구제불능
2022.11.28.
라희는 재윤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재윤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확인했다.
“그 꽃 나 주려고 산 거야?”
라희가 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재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꽃다발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재윤아……. 왜 그래? 가뜩이나 나 힘든데.”
라희는 갑작스러운 재윤의 과격한 행동에 놀라 그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넌 정말 구제불능이야.”
순간 라희는 자신이 민서와 한 통화를 재윤이 들은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다 들었어?”
“다 들었냐고? 그 새끼랑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또 그래?”
“미안해.”
라희는 재윤의 눈치를 보며 또 이 상황을 모면하려 애썼다.
사실 재윤은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말을 일부러 라희에게 하지 않았다.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그녀가 좋아하는 꽃다발을 샀다.
그녀가 자신이 선물한 꽃다발을 보고 좋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라희가 제발 이제는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바랐다. 이번에는 진짜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출장이 길어져 라희를 못 본 시간만큼 그녀가 너무 그리웠다.
설레는 맘으로 그녀의 집으로 가는 내내 재윤은 마냥 행복했다.
그녀를 만나면 꼭 안아 줄 거라 다짐하며, 그녀의 집 현관 앞에 섰는데 라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하는지, 들뜬 라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라희의 예쁜 목소리만 들어도 재윤은 기분이 좋았다.
현관문을 열려는데 라희가 하는 말을 정확히 듣고 말았다.
‘소개팅? 또? 다시 시작이야?’
재윤은 그동안 예전과 달라진 라희에게 자신의 전부를 걸겠다고 다짐했었다.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변화된 라희를 기대한 그의 앞에서 그녀는 여전히 다른 남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난 힘이 없어. 너 포기할래.’
재윤은 배신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숨도 쉬어지지 않을 만큼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라희는 예쁜 미소로 자신을 보며 또 그를 속이려 들었다. 재윤은 라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진짜 이번에 끝이야. 죽을 때까지 다신 너 안 본다.”
재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은 안 되는, 이 상황이 너무 비참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분노의 강도가 예전과 달랐다. 라희를 이번에는 진짜 믿었고 행복한 그녀와의 결혼도 상상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아직 그는 젊기에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내가 너무 한심해. 너 같은 여자를 사랑했다니.”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어때서?”
재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나 회사 잘리게 생기고 그 여자는 나한테 소송 걸고 너무 힘든데 넌 전화도 안 되고 그래서 민서하고 만나려고 전화했던 거야. 기분 풀려고.”
“끝까지 거짓말!”
재윤은 무서운 눈초리로 라희를 노려보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재윤아. 재윤아.”
라희는 급하게 재윤을 뒤따라갔지만 재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재윤의 전화는 이미 꺼져 있었다.
라희는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병처럼 남자를 찾아 헤매는 자신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진짜 간 거야? 넌 나밖에 없잖아.’
라희는 며칠 지나면 다시 재윤이 돌아올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좀 이상해서 갑자기 두려워졌다.
‘재윤아, 나 정말 미친 것 같아.’
재윤이 가 버리고 나서 라희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공허하고 허탈했다.
라희는 외출하려고 빼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화장한 얼굴을 클렌징 티슈로 벅벅 닦아댔다.
거울을 보고 있자니 거울 안에 초라하고 슬픈 표정의 자신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얼굴마저 못나 보였다.
라희는 화장대의 거울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화장을 지워댔다.
“재윤아, 미안해.”
라희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한편 집으로 돌아온 도하는 소명이 준 휴케라를 베란다에 놓지 않고 자신의 침대 맡에 두었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선물한 이 화분이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그와 그녀는 비슷한 점이 참 많았다. 서로 비슷한 아픔을 겪었고, 화초를 좋아하는 것도 닮았고, 아프거나 고통스러울 때도 이겨내려 애쓰는 성격까지도 닮았다.
그녀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작고 여린 몸에도 그녀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대단했다.
도하는 어쩜 그녀와 자신은 언젠가는 꼭 만날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앞길이 비록 꽃길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자신감이 있었다.
도하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맘껏 사랑하는 날만 고대하고 고대했다.
휴케라를 바라보며 그는 침대에 올라가 그녀를 생각했다.
같은 시간 소명도 도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오늘 본가에 가서 자신 때문에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졌다.
그녀에게 이제 그도 큰 의미였다. 그가 고통을 느낀다면 같이 아프고 그가 행복하다면 같이 행복했다.
소명도 침대에 누워 그를 생각했다.
두 사람은 비록 함께 있지 못했지만 서로 같은 생각을 했다.
도하는 소명을 생각했고 소명은 도하를 생각했다.
******
지성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짐을 쌌다. 이미 홈페이지에 공고가 떴고 오늘은 자신이 몸담았던 이 회사와 이별하는 날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세가 이렇게까지 전락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항상 자존감 높고 능력 있고 잘생긴 그는 어디를 가나 인정을 받았고 사람들도 그를 다 좋아했다.
자신이 SS 그룹을 다닌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부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었는데…….
지성은 오히려 잘 됐다 싶다가도 한편으로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이 슬퍼졌다.
잘못된 한 번의 선택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만들어 버렸다.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회사에서 쫓겨나 짐을 싸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눈물이 찔끔거렸다.
하지만 애써 의연한 표정 연기를 하며 그는 자신의 서랍을 정리했다.
짐을 싸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료들의 시선은 너무나 싸늘했다.
같은 시간 라희 역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지금 그녀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재윤을 또다시 배신한 대가로 그녀는 세상에 혼자 남았다.
주변에 자기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고 맘을 열지 않는 성격 때문에 속상한 맘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고 다니고 싶었던 대기업이었는데……. 오늘 그녀는 불륜녀라는 낙인을 찍고 회사에서까지 쫓겨나고 말았다.
“헉, 하아.”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한숨이 났고, 눈에서는 비 오듯 눈물이 떨어졌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울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요즘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다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상자에 자신의 물건을 마구 세게 집어 던졌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주변 동료들이 그녀를 짜증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짐을 다 싼 라희가 상자를 들고 일어서자 동료들이 흘끔흘끔 라희를 쳐다보았다.
라희는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이 다니던 사무실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연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라희가 사납게 노려보자 연희는 신경도 쓰기 싫다는 듯 그녀를 외면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눈빛을 보고 더 화가 치민 라희는 상자를 들고 몇 발자국 걷다 소리쳤다.
“뭘 봐? 사람 쫓겨나는 게 그렇게 재밌어?”
라희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동료들은 그녀의 말에 누구 하나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아이 씨. 짜증 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어?”
라희는 신경질을 내며 사무실을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고 상자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때 아래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지성이 상자를 들고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성은 라희를 보자마자 얼른 닫기 버튼을 눌렀다. 이젠 라희와 상종하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라희는 잽싸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성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라희를 못 본 척했다.
라희는 지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같은 새끼 만나 내 인생 망쳤어. 평생 후회해. 너 만난 거.”
라희가 이를 갈며 이야기하자 지성은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무시해버렸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지성이 라희를 무시하며 가 버리자 라희가 그를 따라가며 말했다.
“너까지 나 무시하는 거야? 얘기 좀 해.”
“그만 치근대.”
“뭐?”
“아우, 지겹다. 진짜.”
지성은 라희를 보며 무섭게 화를 냈다.
“이제 내 인생에서 좀 꺼져줄래.”
지성은 라희에게 인상을 확 쓰고는 곧 자신의 차에 올라타 무서운 속도로 라희를 두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상처받은 라희는 손에 힘이 풀려 그만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그녀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내동댕이쳐졌다.
라희는 물건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떡하다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냐?’
그녀는 맘속에서 끓어오르는 절망감에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간신히 힘을 내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재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재윤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
한편 서빈은 자신의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각종 과일이 화려하게 놓여 있었고 서빈과 오 여사, 이 회장은 단란하게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오 여사가 서빈을 보며 말했다.
“서빈아, 과일 좀 먹어.”
“싫어. 밤에 먹으면 살쪄.”
“지금이 무슨 밤이야?”
“6시 지났잖아.”
모녀가 귀엽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이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보, 당신은 그냥 서빈이가 예쁘지?”
오 여사가 질투하는 시늉을 하며 이 회장을 보고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누구 딸인데. 예쁘지.”
서빈은 살짝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는 애교 섞인 말투로 입을 뗐다.
“아빠.”
“왜 우리 딸.”
“저기 차 회장님한테 전화해서 밥 먹자고 해.”
“어?”
“나 오빠 보고 싶단 말이야.”
서빈이 말을 꺼내자 오 여사가 서빈을 째려보며 말했다.
“서빈아. 아빠 바쁘셔. 오늘도 간신히 시간 내신 건데.”
이 회장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 여사는 도하의 표정을 보고 직감했기에 서빈이 자꾸 이러는 것이 마음 아팠다.
이제 딸이 그만 외사랑을 정리했으면 하고 바랐다.
며칠 내내 기분이 안 좋았던 서빈이 오늘은 좀 나아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또 속에 이런 꿍꿍이가 있었다는 걸 눈치채니 서빈이 더 가엽게 느껴졌다.
‘뭐가 부족하다고. 지 싫다는데…….’
“아무리 바빠도 우리 딸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이 회장은 서빈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핸드폰을 집어 들어 차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