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좋아했다면 그런 짓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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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좋아했다면 그런 짓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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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좋아했다면 그런 짓 못 해
2022.12.01.
곧이어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 차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빈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 회장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오 여사는 그런 서빈의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어, 차 회장. 잘 지냈나?”
[응. 나야 잘 지내지.]
오늘따라 차 회장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어 이 회장은 차 회장에게 물었다.
“어디 안 좋아? 목소리가 안 좋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우리 또 조만간에 식사나 한번 하자고 전화했어. 본 지도 좀 된 것 같고.”
[그러지.]
“아 그리고 만날 때 애들도 같이 보자고. 이제 서서히 애들 얘기 좀 해야지.”
[…….]
가만히 듣고 있던 차 회장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이 회장은 혹시 전화가 끊겼나 하고 다시 차 회장을 불렀다.
“여보세요?”
[응.]
“아니 왜 말이 없어?”
[저기 이런 얘기를 통화로 하기는 좀 그런데.]
“뭔데?”
[도하랑 서빈이 결혼 얘기 없었던 걸로 하지.]
“뭐?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차 회장의 말에 이 회장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하. 내가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 싫은데 안 하면 이해를 못 할 것 같아서…….]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자꾸만 말을 끄는 차 회장이 답답해 이 회장은 재촉을 해댔다.
[서빈이랑 도하랑 예전에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고 하더군.]
“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이 회장은 너무 놀라고 말았다.
[근데 서빈이가 도하를 두고, 아하…… 거, 참.]
“차 회장 말을 해. 답답해 죽겠네.”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고 하더라.]
“…….”
[이 회장한테 감정은 없지만 그런 말을 듣고 부모 입장으로 어떻게 결혼시키나. 도하가 싫다는데.]
“!”
[이런 말은 만나서 해야 하는데……. 계속 결혼 얘기하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얘기하는 거야.]
“서빈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 회장은 방금 차 회장에게 들은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럼 서빈이한테 직접 물어보게. 그럼 나중에 연락하지.]
차 회장이 전화를 끊자 이 회장은 한참을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허공을 응시했다.
자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딸이 도하와 사귀다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운 것도 모르고 차 회장에게 결혼 얘기를 계속 꺼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하아…….”
이 회장의 얼굴은 심하게 어두워지고 입에서는 한숨만 계속 새어 나왔다.
옆에서 상황을 대충 파악한 오 여사는 서빈을 바라보았다.
서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꼼짝 안 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차 도하, 입 싼 새끼. 결국 말한 거야?’
서빈은 자신의 비밀을 도하가 폭로한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도하는 이 사실을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서빈은 자신이라면 껌뻑 죽는 부모님에게 실망을 안겨 준 것 같아 마음이 아파졌다.
그녀는 자신이 한 짓을 엄마, 아빠까지 알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서빈이 이 회장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이 회장은 고개를 돌려 서빈을 바라보았다.
딸을 바라보는 이 회장의 눈빛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서빈아, 아빠가 들은 소리가 사실이야?”
서빈에게 조심스럽게 묻는 이 회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
“이서빈. 맞아?”
“응.”
“뭐? 내가 딸자식을 잘못 키웠다. 잘못 키웠어. 어쩌자고 그런 짓을 도하한테 한 거야?”
“그때……. 그때는…….”
서빈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내가 철이 없었어.”
“하, 아빠는 진짜 너한테 실망이다.”
“아빠……. 미안해. 근데 오빠랑 헤어지고 나서 계속 오빠 생각만 나. 나……. 오빠 좋아했나 봐.”
이 회장은 서빈을 무섭게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좋아했다면 그런 짓 못 해. 너 당장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아빠! 아빠까지 나한테 왜 그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도하가 왜 그렇게 냉정한가 했다. 내가 차 회장을 이제 무슨 낯짝으로 보겠니? 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아빠도 이젠 가만 안 있어. 지금 이 일 입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이 회장에게 혼나는 서빈을 보며 오 여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딸을 잘못 키웠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오 여사는 서빈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서빈, 오늘부터 외출 금지야.”
“엄마!”
서빈은 너무 화가 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안 되겠어. 앞으로 질 떨어지는 사람들 만나고 늦게 들어오고 하는 거 못해. 알겠어?”
“엄마 나 애 아니야. 나도 너무 힘들다고.”
“엄마가 널 잘못 키웠어. 너무 오냐오냐해서 이렇게 된 거야. 엄마 지금 너무 충격받아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에이 씨,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몇 년이나 지난 일 갖고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벌떡 일어나 씩씩대는 서빈을 보며 오 여사가 말했다.
“앉아.”
“싫어.”
서빈은 화를 내며 이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충격을 받은 이 회장과 오 여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한 딸의 만행을 들은 두 사람의 심정은 충격 그 자체였다.
거대하고 웅장한 거실에는 침묵만이 감돌 뿐이었다.
서빈은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도하에게 미안했다.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행동이었다. 아직도 눈에 생생했다. 그날 밤 그가 자신에게 보인 실망과 절망이 섞인 슬픈 표정을.
하지만 도하가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지는 몰랐다.
갑자기 그녀는 도하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 같아 두려워졌다.
자신을 이렇게 막 대하는 그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매달리고 있다니.
그런데도 도하를 못 잊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다 그 이혼녀 때문이야. 그 여우같은 계집애가 오빠를 홀렸어.’
곧이어 원망의 화살이 소명에게 돌아갔다. 서빈은 너무 화가 나서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씩씩거렸다.
“악.”
머리를 쥐어뜯고 소리를 질러대도 한 번 난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도 잘한 거 없어. 잘못했다고. 이젠 다신 안 그런다고.”
서빈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어느새 올라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 여사의 표정에 슬픔이 가득 묻어났다.
******
한편 이 회장과 전화를 끊은 차 회장은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도하 절대 못 주지.”
차 회장은 서재에 앉아 있다가 이 회장과 전화를 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그 도하가 좋아한다는 여자 한 번 봐야겠어. 데려와.”
[네, 알겠습니다.]
차 회장은 도하의 고집을 꺾기 어려우니 차선책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하가 그렇게 목을 매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
도하는 오후 시간을 비우고 혼자 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린 곳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법무법인 승리]
도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현이 반가운 얼굴로 도하에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차 도하라고 합니다.”
도하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수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수현도 환하게 웃으며 도하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도하가 자리에 앉자 수현도 곧 자리에 앉았다.
“차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도하는 슈트 안에서 명함 한 장을 빼내 수현에게 건넸다.
“여기.”
“아, 네. 감사합니다.”
도하의 명함을 받고 수현은 명함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SS 그룹 건설 부문 대표이사 차 도하?’
명함을 받고 너무 놀라 수현은 입이 떡 벌어졌다. SS 물산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다.
그 그룹의 대표가 왜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왔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수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책상에 놓인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도하에 주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수현은 도하를 바라보았다.
“저 이곳에 이혼소송을 의뢰한 홍소명 씨 아시죠?”
도하가 예의 바른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소명 씨. 그런데 무슨 일로?”
“무조건 이른 시일 안에 승소하게 해 주십시오. 금액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어요.”
“네?”
“그리고 제가 여기 왔다는 건 소명 씨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일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아, 네. 제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하가 수현을 보고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수현도 도하를 바라보며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소명 씨 반드시 이길 거예요.”
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와 소명 씨는 좋겠다. 부럽다. 부러워.’
수현은 멀어지는 도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한편 지성도 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을 받고 있었다.
지성의 앞에 앉은 변호사는 어두운 얼굴로 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송보다는 합의를 보시는 게 훨씬 유리할 것 같습니다. 지금 너무 불리하세요.”
“이혼 안 할 수는 없는 건가요?”
“상대방이 이혼을 요구하는데 어떻게 안 해요. 우선 합의를 보시고 다시 한번 오세요.”
“아……. 네.”
지성은 터덜터덜 걸음을 걸으며 힘없이 집으로 향했다. 일말의 기대를 했었는데 그 기대감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이혼해야 하면 위자료라도 줄일 수 있게 합의를 보시는 게 좋습니다.”
아까 변호사가 한 말이 귓전에 아른거렸다.
‘하, 나는 소명이랑 이혼하기 싫어. 싫다고!’
아무리 가슴으로 소리쳐 봤자 소명의 마음이 돌아선 순간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사에서 잘린 것보다 소명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내가 노력해도 안 될까? 진짜 안 되는 거야, 홍소명?’
지성은 피부과에 가서 타투도 지우고 비뇨기과에서 검사도 받아보겠다고 다짐했다.
늦었지만 자신이 진심을 보이면 소명도 마음을 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성은 결심이 선 표정으로 소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소명아,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정말 잘못했어. 너한테 너무 큰 상처를 줬어. 이혼조정할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제발 한 번만 만나줘.]
문자를 보낸 그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자신의 차로 향했다.
지성이 보낸 문자를 받은 소명은 고민에 빠졌다.
계속 지성을 피하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이혼하려면 조정이혼을 하는 것이 지금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소명은 굳은 표정으로 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명 씨.]
곧 소명을 반기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 씨……. 지성이가 만나자고 해요.”
수화기 너머로 소명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