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이 여자를 사랑해
(45/101)
제45화 이 여자를 사랑해
(45/101)
제45화 이 여자를 사랑해
2022.12.05.
소명의 말을 들은 도하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지성이란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더러워졌다. 또 집착하며 물고 늘어져서 소명을 괴롭히려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이혼하겠다고, 한 번만 만나자고 해서 얘기를 들어봐야겠어요. 저…… 그 사람한테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제가 지금 당장 갈게요.]
“아니요. 금방 가서 잘 해결하고 올게요.”
[그래도 걱정이 돼서…….]
“도하 씨,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 돌아오면 바로 연락할게요.”
[네. 그럼 잘 얘기하고 와요.]
“네.”
소명의 목소리에 단단한 결심이 느껴졌다. 자신이 같이 있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걱정도 되었지만, 도하는 소명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었다.
소명과 전화를 끊은 도하는 곧 이 비서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
“저번에 맡긴 경호는 잘 되고 있죠?”
“네.”
“오늘 소명 씨 특히 잘 경호해달라고 말씀드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도하는 초조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손으로 턱을 받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서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소명이 지성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다.
도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소명이 하고 싶다는 일은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 자리에 나가려고 마음먹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도하는 오늘따라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명이 지성을 만나고 돌아올 때까지 계속 이렇게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
전화를 끊은 소명은 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지성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소명아?]
“진짜 할 거야?”
[그래……. 넌 내가 받자마자 바로 그 말이 먼저 나와?”]
수화기 너머로 지성의 섭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 앞 카페에서 보자. 길 건너편에 있는 곳으로 와.”
[그래. 알았어.]
“몇 시까지 올 수 있어?”
[지금 바로 갈게.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
“알았어. 거기서 봐.”
소명은 지성이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예전의 소명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지성의 기분이 씁쓸해졌다.
항상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주었었는데.
지성은 소명을 생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소명이 웃는 모습 진짜 예쁜데…….”
자신이 그 말을 하고서도 깜짝 놀랐다. 지성은 어두운 얼굴로 소명을 만나러 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소명은 지성을 만나기 위해 카페를 향했다. 아파트와 거리가 가까워서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소명이 아파트를 벗어나 걸어가면 소명의 경호원 은현이 소명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주변 차량에는 다른 경호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은현은 긴 생머리를 질끈 묶고 청바지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상큼한 여대생 분위기가 풍기었다. 날씬한 몸에 귀염성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무술 유단자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은현은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경호에 신경을 쓰라는 지시를 받고 신경을 더 곤두세웠다.
은현이 소명을 따라가다 보니 그녀가 아파트 앞 카페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은현도 얼른 따라갔다. 소명이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자 은현도 소명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은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핸드폰을 하는 척하며 소명을 지켜봤다.
소명이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 뒤 한 남자가 소명의 자리로 가 앉았다.
은현은 그 남자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남자를 지켜보는 은현의 눈매가 오늘따라 더 날카로웠다.
지성은 급하게 와서인지 숨을 헐떡거렸다. 멀리 카페 안에 소명이 보였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니? 소명아.’
그녀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함께 살고 사랑을 속삭이던 자기 여자였던 그녀와의 관계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기다렸어?”
지성은 소명을 보며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조금.”
소명은 지성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명아, 잘 지냈지?”
지성의 친한 척에 소명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런 안부 주고받을 사이 아니잖아.”
“소명아, 왜 그렇게 냉정해?”
“하……. 어이가 없으려니까.”
“소명아…….”
“나 불러내려고 거짓말한 거야?”
소명이 화를 버럭 내며 지성을 쏘아보자 지성이 소명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런 거. 근데 너 얼굴 보니 좋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하다.”
“…….”
“할게. 어차피 내가 이길 수도 없는 소송이잖아.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래. 그럼 하루라도 빨리 해줘.”
소명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지성은 소명의 팔목을 잡았다.
“놔.”
소명이 질색하자 지성을 얼른 소명을 잡은 손을 놓았다.
멀리서 소명을 지켜보고 있던 은현 역시 일어서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지성을 주시하는 은현의 눈동자는 멈추지 않았다.
“소명아, 미안. 잠시만 얘기할 게 있어. 좀 앉아봐. 금방 끝나. 부탁이야.”
소명은 어두운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명아, 근데 한 번만 다시 기회 줄 수 있어?”
“뭐?”
지성의 말에 결국 소명의 화가 폭발해버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지성을 향해 소리를 꽥 질러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소명아, 나 달라질게. 나 한 번만 지켜봐 줘. 여기 있는 이 타투도 지우고 네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우리 아이 갖자. 네가 나 용서해주면 그때 재결합하자. 나…… 병원 가서 검사도 받을게.”
“끝까지! 이런 식이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나 기다릴게. 그 새끼가 너랑 결혼이라도 할 것 같아? 꿈 깨. 가당키나 해? 나 너 감정 흔들린 거 이해해. 당연히 그럴 수 있어. 오히려 내 맘을 알게 된 기회였어.”
“그만 말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네가 그 새끼 만난다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더라. 그래서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고, 라희도 신경 안 쓰였어. 이게 뭐겠어? 내가 아직도 너 사랑한다는 증거잖아.”
“진짜 소름 끼쳐.”
소명은 지성의 궤변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그가 두렵기까지 했다.
“지성아, 그냥 깨끗이 끝내 주면 안 돼? 난 이제 너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
“소명아, 넌 지금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는 거야. 그게 다 내 잘못이지. 너한테 너무 상처를 줬으니까. 기다릴게. 돌아와.”
“싫어. 절대. 너랑 산 십 년의 세월까지 소름 끼치는 추억으로 만들게 하지 마. 그냥 나 놔줘.”
지성은 소명과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하지만 자신이 소명을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자기 여자로 만들기까지 수없이 노력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기다릴 수 있어.’
‘나 노력해 볼 거야.’
‘진짜 멋진 사람 되고 싶어. 너를 위해서.’
소명은 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어차피 끝났어.”
“나 회사 잘렸어.”
“…….”
“근데 오히려 잘 됐지. 이제는 그 새끼랑 상하 관계가 아니니까. 난 언제나 기다릴 거야.”
“하아.”
소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지성을 보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소명아, 나…… 갈게.”
“어?”
“서류 써서 빨리 처리하자.”
“그래.”
소명은 지옥 같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얼른 대답을 해버렸다.
지성은 소명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결심했다.
소명과의 인연의 끈을 끊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소명과 도하가 이루어지리라고 절대 믿지 않았다.
소명이 도하에게 버림받으면 바로 자신을 찾아올 거로 생각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소명은 그의 여자였다.
지성은 소명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맑은 눈동자, 검은색 생머리는 윤기가 흐르며 찰랑거렸다.
‘예쁘다. 우리 소명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소중한지 모르고…….
자신이 한 행동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소명이 자신을 바라보며 울며 사랑한다고 애원하던 때가 생각났다.
“미안했어.”
이번에 하는 지성의 말이 진심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후면 남이 되는 이 여자가 왜 이리도 아쉬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성은 소명을 바라보며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갔다.
******
소명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왔다.
‘이제 진짜 끝인가?’
소명은 이번에 한 지성의 약속이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여파로 그녀는 지옥에서 살았다.
이제는 좀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주체, 도하와 함께.
아까 지성의 말처럼 너무 허황한 꿈을 꾸는 걸까?
그래도 지금은 그가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심하고 배려 깊고 너무나 따뜻한 나머지 뜨거운 남자.
이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명은 아파트로 걸어가면서 도하를 생각했다. 요즘 계속 도하 생각만 나서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를 둘러막고 옭아매는 이 사슬을 깨끗이 끊어버리고 도하 앞에 당당히 서고 싶었다.
은현 역시 아무 일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의 집 앞까지 확인을 마치고 대기 중인 차로 돌아갔다.
소명이 집에 다다라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내리려는 순간, 그녀의 눈에 도하가 들어왔다.
그는 자기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녀의 현관 옆 벽에 기대서 있었다.
자신을 걱정해서 회사에서 나와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정말 고맙고 미안해.’
소명은 매력적인 도하의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울컥하는 게 가슴에서 치고 올라왔다.
이렇게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바로 차도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도하 역시 소명과 눈이 마주치자 벽에 기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소명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도하에게 달려가 그의 넓은 품에 와락 안겼다.
도하 역시 팔을 벌려 그녀를 반겼다.
소명은 아무 말 없이 도하의 넓은 가슴에 안겨 맑은 눈물을 흘렸다.
도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소명을 꼭 안아주었다.
지금이라도 소명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져다 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걱정했어요?”
그의 품에 안겨 소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소명 씨, 너무 보고 싶어서. 소명 씨 잘 해낼 거라 믿었어요.”
“믿어줘서 고마워요.”
도하는 소명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이 여자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