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9화 반드시 내가 갈라놓을 거야 (49/101)


제49화 반드시 내가 갈라놓을 거야
2022.12.19.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다.

라희는 이렇게 비를 맞고 서 있으면 혹시라도 재윤이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하는 구차한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여전히 재윤의 집 창문의 불은 꺼져 있고 재윤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재윤과 마주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라희는 너무나 힘이 빠졌다.

재윤은 언제든 자신이 부르면 달려와 주고 자신이 그를 떠나면 늘 기다려줄 줄 알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가 비록 화는 났지만, 그 화도 곧 얼마 못 갈 거라고, 또 자신이 그리워 달려와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재윤은 차갑게 돌아섰고, 이제 그와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은 그의 집 앞에서 언제 올 줄 모르는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라희는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오래 서 있었더니 체력에 한계가 왔다.

어차피 백수 신세니 밤새도록 기다려 볼까 하고 오기가 나기도 했지만 이내 라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섰다.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린 건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를 이제 못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너무 외롭고 쓸쓸했다.


‘세상에 나 혼자 남았네. 나 뭐 하러 이렇게 아등바등 살았지?’

라희는 자신이 주목받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 언제나 남한테 얻어 온 촌스러운 옷을 입고 다녔고 집안도 찢어질 듯이 가난해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도 늘 걱정하며 살았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녀는 그 흔한 친구 하나 없었다.

어느 날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 같은 동네에 사는 또래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그 아이는 라희를 이상한 아이 취급하며 무시하고 가버렸다.

라희는 그 후에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까 하는 생각에 몰두했다.

그러려면 우선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만 잘하면 자신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 믿었다.

그 후 그녀는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에 들어갔고 그 뒤 자기 외모를 쉴 틈 없이 가꾸기 시작했다.

그 뒤 사람들이 라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라희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게 너무 좋았다.

그들의 관심을 받으면 어렸을 때의 결핍을 다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남자들이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더 이상 그녀는 예전의 구질구질한 채라희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연인에게 사랑받은 후에는 곧 그 사람에 관한 관심이 사라졌다.

그녀는 더 많은 남자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자신이 좋다고 하면 모든 남자가 자신을 좋아해 줄 거라 믿었다.

라희는 온몸에 비를 맞으며 처량하게 서서 예전에 재윤이 했던 말이 떠올렸다.
 


“라희야, 치료받자.”

 
그는 라희가 외로움과 두려움을 치료받아 달라지길 원했다. 그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남자는 없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를 유일하게 걱정해준 고마운 사람은 바로 너였어. 너는 나한테 친구였고, 남자였고, 가족이었어.”

라희는 오늘 그를 기다리면서 깨달았다.

재윤이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선물은 그를 떠나보내는 거라는 걸.


‘재윤아, 안녕.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야 해. 다음번에 나 같은 여자 절대 만나지 마.’

라희는 마음속으로 재윤에게 말하고 불 꺼진 재윤의 집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서서히 몸을 돌려 재윤의 집을 떠났다.

라희는 재윤의 집 골목길 옆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갔다. 이제는 진짜 재윤이와 끝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라희가 골목길을 지나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 비를 맞아 온몸이 젖은 재윤이 골목길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짧은 머리의 재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재윤의 표정은 오늘따라 더 슬퍼 보였다.

비에 젖은 라희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찢어졌지만, 자신이 반드시 그녀를 끊어내야 둘 다 산다는 다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라희야, 이제 정신 차리고 다시 시작해. 난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잘 살아.’

재윤은 어두운 얼굴로 자기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우리 둘 다 살자. 이번엔. 반드시.’

 

 

******

이혼하고 나서 소명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녀는 오늘 엄마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소명의 소식이 궁금할 만도 한데 소명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같았다. 소명은 그런 엄마가 정말 고마웠다.

소명은 엄마의 성격을 똑 닮았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했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아버지 없이 자랐어도 엄마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자라서 구김이 없고 밝았다.

소명은 자신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키워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도하에 관해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엄마가 도하를 본다면 많이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짐을 싸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도하였다. 소명은 입꼬리가 올라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예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전의 소녀였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매사 설레고 떨렸다.


“흠흠.”

소명은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여보세요.”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어요. 오늘 일찍 끝내고 금방 갈게요. 우리 같이 저녁 먹을래요?”

“아……. 저기.”

“왜요? 무슨 약속이라도 있어요?”

“저 오늘 엄마한테 가려고요.”

“아……. 그래요?”

“엄마한테 아직 제대로 얘기를 못 해서요. 결과를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제가 참을게요.”

“네?”

“소명 씨, 보고 싶은 거요.”

도하의 말에 소명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 꼭 참을게요.”

“소명 씨…….”

“네.”

“금방 올 거죠?”

“아……. 며칠 있으려고 했는데.”

“며칠씩이나요?”

도하의 귀여운 투정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소명의 입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요즘,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이 행복을 마음에 담고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소명은 도하의 말을 귀여운 투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진심이었다.

도하는 소명과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일이니 잘 다녀오길 바랐다.


“조심히 다녀와요.”

“네.”

“소명 씨, 보고 싶은 거 꾹 참을게요.”

소명은 도하의 애정 표현에 너무 행복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받는 기분은 너무나 달콤했다.

소명은 짐을 마저 싸고 작은 캐리어에 넣었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자신의 차에 짐을 실었다.

오늘도 은현은 소명을 멀리서 경호하고 있었다.

소명은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 엄마를 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더 보고 싶었다.

한참을 달려 엄마가 사는 그리운 집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미리 해 놓았더니 엄마는 집 앞에 벌써 나와 소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명은 엄마가 힘들까 봐 걱정이 되었다.

얼른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엄마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소명을 와락 껴안았다.


“아이고, 어서 와. 우리 딸.”

“엄마, 왜 나왔어. 힘들게.”

“우리 소명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나왔어. 방금 나왔어. 걱정하지 마.”

“알았어. 엄마 잘 있었어? 어떻게 엄마 딸 잘 사는지 안 궁금했어?”

“궁금해 죽는 줄 알았지.”

소명의 엄마는 소명을 바라보며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소명은 캐리어를 꺼내 들고 엄마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의 집은 작았지만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고 반짝반짝 윤이 났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엄마, 또 뭘 했어. 힘든데.”

“울 소명이 먹이는데 왜 힘들어. 행복하지. 너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차리는 거 내가 차릴게. 쉬고 있어.”

“아니야, 운전하고 왔는데. 얼른 옷 편한 거 입어. 금방 차려줄게. 배 많이 고파?”

“응.”

소명은 엄마를 바라보며 애교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금방 차려.”

소명은 자신의 방에 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자 엄마는 소명을 불렀다.


“얼른 와. 거의 다 차렸어.”

“응.”

소명은 식탁에 앉았다.


“와,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우리 딸 좋아하는 잡채랑 갈비하고 또 너 국물 좋아하니까 엄마가 국 끓였지.”

“미역국이네?”

“응. 우리 딸 다시 태어났으니까 미역국 많이 먹어.”

“엄마……. 나 어제 지성이랑 아주 정리했어.”

“짐작했어. 잘했어. 소명아, 이혼이 죄는 아니야. 아닌 건 아닌 거지. 많이 먹고 힘내.”

“엄마.”

“어서 먹어. 국 식는다.”

정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대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소명은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다 가져다 넣었다.

요리 솜씨 좋은 엄마의 요리는 너무나 맛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사랑해주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에 소명은 너무나 감사했다.


“엄마……. 너무 맛있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 땜에 많이 속상했지?”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는 하나도 속 안 상해. 네가 많이 힘들까 봐 전화 못 했지. 엄마는 항상 소명이 믿어.”

소명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아이고, 소명아. 왜 울어 울긴.”

“엄마, 내가 진짜 잘할게. 나 열심히 살 거야.”

“그래. 소명아.”

엄마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가져와 소명에게 건넸다.


“자, 눈물 닦고 먹어. 얼른.”

“응.”

소명은 엄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맛있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엄마 밥이 제일 맛있어. 엄마도 먹어. 얼른.”

“그래. 소명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맛있는 식사를 했다.

******

한편 서빈은 오 여사의 외출 금지 명령 때문에 요 며칠 집 안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오 여사가 이렇게 자신을 냉정하게 대한 적이 처음이기 때문에 서빈은 이번에는 잠자코 몸을 조금 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바람 쐬고 싶다.’

가슴이 답답해서 드라이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도하였지만, 도하의 뒤에는 그 여우같은 여자가 떡하고 버티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감히 네까짓 게. 어디. 도하 오빠를 넘봐.’

서빈은 자신이 한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누군가를 원망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 자신이 갖고 싶은 건 한 번도 갖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가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가져야 했다.

도하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줄 때 그녀는 도하의 사랑을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도하만 모른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잠시 답답하고 지루한 똑같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 도하를 떠나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날 도하가 모든 것을 봐 버렸고 그는 그 뒤로 차갑게 그녀를 떠나 버렸다.

서빈은 비로소 그가 옆에 없으니 알 것 같았다.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인지를.

그녀는 늦게 깨달은 사랑 때문에 몹시 괴로웠고, 그 사람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도하를 갖지 못하게 된다면 그 여자도 도하를 가질 수 없었다.


‘반드시 내가 갈라놓을 거야.’

그때 서빈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