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입술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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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입술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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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입술을 훔치다
2022.12.26.
“소명 씨, 너무 보고 싶어서 못 참았어요.”
도하의 다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도하 씨…….”
자신이 보고 싶어 달려왔다는 도하의 말에 소명의 안색이 환해졌다.
아까 잠시 통화를 하면서 도하가 주소를 물어봤었는데, 소명은 그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소명은 가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퇴근하고 피곤할 텐데. 고마워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감동이었다.
생각보다 멀어서 오기가 힘들었을 텐데. 소명은 도하의 깜짝 이벤트에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빨리 도하 씨를 만나고 싶어!’
소명은 도하와 전화를 하면서 방에 있는 전신거울을 보며 얼굴과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하를 보고 싶은 맘에 그녀는 한걸음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명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하를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도하 씨?”
그녀가 도하를 부르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살짝 돌아본 소명은 도하가 자신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걸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나 보러 와줘서…….”
그녀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나도 고마워요. 얼굴 보여줘서.”
그는 살짝 몸을 굽혀 소명과 눈을 맞추었다.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소명 씨 본다고 생각하니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어머님은 잘 만났어요?”
“네. 엄마한테 도하 씨 얘기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말에 도하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께 얘기를 했다는 말에 자신을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해준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명의 어머니가 자신을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도하는 긴장한 맘으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하세요?”
소명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도하 씨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요. 나중에 한번 엄마랑도 만나요.”
“그래요.”
소명은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소명은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도 도하의 키가 너무 커서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바라만 봐도 이렇게 좋을까?
그와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 꿈만 같아서 이 달콤한 꿈에서 깰까 봐 너무 두려워졌다.
“도하 씨, 우리 잠시 걸을래요?”
“네.”
소명의 집은 시골이라 바로 옆에 호수가 있고 호수 옆에 산책로가 있었다.
“우리 동네 호수 보여드릴게요.”
“호수요?”
“네. 조금만 걸어가면 호숫가 산책로가 나와요.”
도하는 소명과 산책할 생각을 하니 설레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
도하가 자기 손을 소명에게 내밀었다. 소명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소명의 작은 손이 도하의 큰 손 안에 쏙 들어갔다.
소명과 도하는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소명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도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이렇게 많다니. 와, 진짜 예뻐요.”
‘내 눈에는 소명 씨가 더 예뻐요.’
도하는 속으로 혼잣말했다.
“호숫가 경치도 정말 멋져요. 보여주고 싶었는데…….”
“나중에 꼭 보여줘요.”
“네. 그럴게요.”
소명의 미소를 본 도하는 또 심장이 요란하게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도하는 지금 그녀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벅찼다.
그녀 손의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에 전해졌다. 그 온기로 인해 그의 마음마저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도하는 조금만 지나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는 오늘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산책로를 걷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하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도하 씨, 힘들어요?”
소명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도하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 눈빛을 본 소명의 심장도 쿵쿵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미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 반짝거리는 눈, 오뚝하고 곧게 선 코, 촉촉한 그의 입술.
소명은 보고 또 봐도 도하를 계속 바라보고만 싶었다. 온종일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소명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며 앞으로 닥칠 일을 걱정하며 살기 싫었다.
고된 풍파를 다 겪은 그녀이기에 다시 찾아온 사랑에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그에게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소명은 지성의 끈질긴 구애에 이만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그와 결혼했었다.
하지만 도하는 달랐다.
도하에게 일어나는 감정은 지성과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차분한 그녀의 숨겨진 열정을 끄집어내 준 사람이었다.
도하는 사랑에 눈치를 보지 않고 조건을 내세우지 않으며 오직 그것에만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도하가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명 씨랑 헤어지기 싫어서요.”
도하의 말에 소명은 그에게 다가가 까치발을 하고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살짝 갖다 대었다.
소명의 귀여운 짧은 입맞춤에 도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도하는 손으로 자기 입술을 살짝 만지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도하에게 뽀뽀를 해 버리자 부끄러운 마음에 몸을 돌렸다. 그녀는 도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입을 뗐다.
“도하 씨, 이제 갈까요?”
“아니요.”
그 순간 도하는 소명의 팔목을 붙잡았다. 놀란 소명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도하가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감쌌다.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빛나는 밤에 두 사람은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입맞춤이 끝난 후 도하는 다정한 눈빛으로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명 씨, 나만 믿고 따라와 줘요. 소명 씨만 내 옆에 있으면 나 뭐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명 씨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도하 씨.”
불안한 그녀의 맘을 알기라도 하듯이 믿음을 주는 그를 소명은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떤 시련이 와도 그와 함께 버티고 싶었다.
도하는 소명의 몸을 끌어당겨 그녀를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
한편 서빈은 도하의 집 앞에 차를 주차했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심부름센터 소장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로?]
“오빠 집에 들어왔어요?”
[오늘 저기…….]
“또 시작이다. 아 답답하니까 그냥 말하라니까요.”
심부름센터 소장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목소리까지 더듬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머……멀리 지방 가셨습니다.]
“뭐? 출장?”
[아니요.]
“그럼 뭔데요?”
[그 여성분 본가에 찾아가셨다고.]
“뭐요? 아이, 진짜 열 받네.”
서빈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열이 받아서 계속 씩씩거렸다.
“진짜 미쳐 돌아가네.”
서빈은 화가 뻗쳐 주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도하가 올 때까지 기다려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서빈은 곧 돌아가야만 했다. 갑자기 운전하기가 싫어졌다.
서빈은 김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기사님 택시 타고 이리로 오세요. 도하 오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에요.”
[……네.]
서빈은 전화를 끊고 나서 이리저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와 그 여자가 같이 있을 걸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차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푹푹 한숨을 쉬어댔다.
“하아, 진짜. 왜 이렇게 안 와?”
서빈은 애꿎은 김 기사를 탓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김 기사가 택시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고 차에서 내린 그는 서빈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빈은 거만한 자세로 차 앞에 삐딱하게 서 있다가 키를 김 기사에게 휙 던졌다.
서빈이 갑자기 차 키를 던지자 김 기사는 놀란 눈으로 키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만 놓치고 말았다.
자동차 키는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김 기사는 화가 난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쭈그리고 앉아 차 키를 주웠다.
“하…….”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서빈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김 기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요? 열 받아요?”
“아닙니다.”
“똑바로 받아야지. 그것도 못 받는 주제에.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김 기사는 그 순간 인간적으로 너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갔다.
‘참자. 참아.’
“죄송합니다. 얼른 타시죠.”
김 기사는 뛰어가 서빈이 탈 수 있도록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서빈은 거만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곧 김 기사가 운전을 시작했다. 서빈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엄마한테 말했다간 알아서 해요.”
“네.”
어두운 표정으로 김 기사는 운전에만 몰두했다.
******
한편 지성은 타투를 잘 지워주기로 유명한 피부과에 예약을 했다.
피부과 안으로 들어가 원장과 상담하기 시작했다.
진료실 안에는 반백의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원장이 앉아 있었다.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지성을 보고 원장은 친절하게 말했다.
“안지성 씨? 어서 오세요. 우선 좀 볼까요?”
지성은 진료실 의자에 앉은 후 자기 팔목을 원장에게 슬며시 내밀었다.
그의 팔목 안쪽에는 RH라는 이니셜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지성은 원장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작고 글자도 두 개밖에 안되니까 금방 지울 수 있겠죠?”
지성의 팔목을 보던 원장이 고개를 들어 지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한 번에 지운다고 생각하고 오신 거 아니죠?”
원장은 지성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타투가 새길 때도 힘들지만 지우는 것도 만만치가 않아요. 지울 때 고통도 따르고요.”
“그래도 꼭 지우고 싶습니다.”
“한 번으로 안 되니 반복적으로 치료받으셔야 됩니다.”
“네. 선생님. 꼭 깨끗하게 흔적 없이 부탁드립니다. 금액은 상관없어요.”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지성의 심정은 간절했다.
반드시 타투를 지워서 자기 몸에 새겨진 라희의 흔적을 모조리 깨끗이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 팔목을 소명에게 꼭 당당하게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소명아, 기다려줘. 나 차근차근 달라진 모습 보여줄게.’
지성은 수술실로 들어가 팔목 안쪽 레이저 치료를 시작했다.
주황색 불꽃이 지성의 팔목을 따닥따닥 쏘아댔다.
지성은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너무나 통증이 심했다. 날카로운 도구로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따갑고 아팠다.
“윽…….”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고, 입에서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지성은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다시 예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정말로 소명에게 모든 걸 다 바치고 그녀만 바라보며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와의 세월을 끊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자꾸만 그녀를 처음 본 스무 살 때의 기억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소명아, 내가 잘못했어. 제발!’
팔목 안쪽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성은 팔목의 통증보다 자신의 곁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소명아, 나 가슴이 너무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