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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악순환의 고리 (52/101)


제52화 악순환의 고리
2022.12.29.



 
피부과에서 나온 지성은 빨갛게 부어오른 자기 팔목을 바라보았다.

상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공허했다. 이 지겨운 타투를 하루라도 빨리 그의 손목에서 지워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의 팔목에 새겨진 RH란 이니셜은 조금 희미해져 있을 뿐, 계속 그의 팔목에 남아서 마음을 괴롭혔다.

지성은 타투 자국을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이렇게라도 하면 없어질까? 내가 한 더러운 짓이?

하지만 타투 자국은 여전히 그의 팔목 안에 남아 있었고 세게 문지른 탓에 화끈거리는 통증만 더 심해졌다.

지성은 이 타투가 다 지워지면 자신이 한 모든 짓이 깨끗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그는 소명이 생각났다. 지성은 결코 소명과의 인연의 끈을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소명은 인생이자 전부였다. 그걸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지성은 지금 당장 소명을 보지 않으면 미쳐 돌아갈 것만 같았다. 예전의 소명과의 행복한 추억만 계속 떠올랐다.

지성이 쉬는 날 둘이 함께 화원에 가서 화초들을 고르는 날이면 소명의 입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었는데.

소명이 배란일이라고 일찍 들어오라고 애원한 날 그는 라희와 함께 있었다.

생각해보면 자신 같은 쓰레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을 행복인 줄 모르고 일상처럼 여겼던 지난날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소명과 CC가 된 날 그가 느낀 성취감은 말로 표현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학교를 같이 걸어갈 때 지나가던 남학생들이 자신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 표정이 아직 눈에 보이듯 생생했다.

지성은 이 기분으로는 오늘 그냥 잠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는 집으로 가는 차의 방향을 급작스럽게 확 틀었다. 한참을 달려가서 도착한 곳은 바로 또 소명의 집 주차장이었다.

그녀를 찾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또 오고야 말았다.

차를 세워놓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명에게 올라갈까 그냥 돌아갈까를 망설였다.


“하아.”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결심이 선 표정으로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웬 남자가 지성의 옆으로 당당하게 걸어왔다.

지성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살짝 훔쳐보았다.

그 남자는 무표정으로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180센티미터인 지성보다 키가 훨씬 컸으며 온몸은 근육질이었다.

그는 무심한 듯 지성의 옆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매는 매우 날카로웠다.

이윽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성은 이상하게 이 남자가 신경 쓰였다.

그가 소명의 집 층수를 눌렀는데 이 남자는 꿈쩍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층수를 누르지 않는 걸 보니 같은 층인 것 같았다.

지성은 이 남자가 아무래도 도하의 사람일 것 같다고 직감했다.

그가 도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지성은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지성은 엘리베이터에서 얼른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도 지성과 함께 내렸다.

지성은 소명의 집 앞으로 달려가 벨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지성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소명아, 나 왔어. 잠깐만 이야기하자.”

지성은 간절한 표정으로 문을 계속 두드렸다. 그런데 뭔가 뒤통수가 따가워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남자가 지성의 뒤에서 지성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지성은 그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지성은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은데 잘 걸렸다 싶었다.

지성은 날이 선 목소리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뭔데?”

그 남자는 지성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죠.”

언뜻 보면 정중한 것 같지만 그의 표정에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뭐?”

“그만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여긴…….”

지성은 차마 이혼한 전 부인 집이라는 건 말하고 싶지 않아 얼버무렸다.

그 남자는 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홍소명 씨, 근처에 접근하지 마십시오.”

지성은 그 남자가 소명의 이름을 알고 있자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당신 뭐야? 어떻게 소명이 이름을 알고 있지?”

“좋은 말할 때 돌아가십시오.”

“당신 뭐냐고 물었잖아.”

지성은 화가 나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홍소명 씨 경호를 맡고 있고, 안지성 씨 접근 못 하게 하라는 명령받았습니다.”

“누가? 차도하. 그 X끼가?”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계속 이러시면 저도 책임 못 집니다.”

지성은 너무 어이가 없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 바람을 불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를 썼다.


“차도하, 그 X끼가 뭔데 내 마누라 내가 만나겠다는데.”

“이제는 부인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돌아가세요.”

말은 부드럽게 하고 있지만 그 남자의 표정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당신 나한테 이러는 거 내가 그냥 안 넘어가. 알아?”

“됐고. 가세요.”

“야! 네가 뭔데? 난 소명이 보고 갈 거야.”

“앞으로도 홍소명 씨 또 찾아오면 똑같이 이런 꼴 당할 테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게 정말?”

지성은 도저히 자신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지성의 팔이 남자의 얼굴로 날아오는 순간 남자는 지성의 팔을 자신의 양팔로 잡고 뒤로 확 꺾어버렸다.

지성은 그 순간 너무 고통스러워서 저절로 입에서 괴성이 새어 나왔다.


“아, 악.”

그 남자는 지성을 노려보며 지성의 팔을 잡은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지성과 같이 탄 후에야 그 남자는 지성의 팔을 풀었다.

그제야 팔이 풀린 지성이 그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너 가만 안 둘 거야.”

그는 정중하게 지성에게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지성은 분노에 찬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남자는 지성이 갈 때까지 그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지성은 차에 타 문을 있는 힘껏 세게 닫고 무서운 속도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지성은 새삼 도하의 재력이 너무 두려워졌다.

살면서 한 번도 부족하다 느낀 적이 없었다. 외아들인 자신을 위해 뭐든지 다 사주고 받쳐주었던 정 여사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하의 재력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남부러운 것 없는 재력에 잘생긴 얼굴까지, 같은 남자인 지성이 봐도 도하는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도하가 왜 소명을 이리 감싸는지! 하지만 그래도 소명은 결코 도하의 여자가 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명의 집안이나 조건이 도하와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하는지, 소명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을 원망해도 소명은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소명을 잘 아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하의 감시 때문에 이제 소명의 집에도 마음대로 찾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한편으로는 도하에게 소명을 진짜로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절대 그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지성은 이를 부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차도하,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운전대를 붙잡은 지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한편 소명을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하의 마음 한구석이 너무 허전해졌다.

빨리 소명이 집으로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

그녀를 생각하며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하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하는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 비서의 전화였다. 그 순간 도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네.”

“안지성 씨가 홍소명 씨 집 앞에 찾아오셨습니다.”

“하아.”

도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인제 그만 물러설 만도 한데 끝까지 집요한 그의 행동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경호원 한 명이 제지시켜 돌려보냈습니다.”

“네. 고생하셨네요. 피곤하실 텐데 어서 쉬세요.”

“네. 대표님.”

도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운전에 집중했다. 그는 반드시 지성에게서 소명을 지켜 내리라 다짐했다.

집에 돌아온 도하는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와 휴케라에 물을 주었다.

그는 휴케라를 바라보며 소명을 생각했다.

오랜 시간 운전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온몸에 기운이 나고 내일이 기다려졌다. 내일 소명이 돌아오면 뭘 할까부터 생각했다.

그는 소명을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꾸만 찾아와 소명을 들쑤셔대는 지성이 신경 쓰였지만, 소명이 없을 때 찾아와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소명을 위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라희는 번화가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서 있는 그녀는 오늘따라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 희미해서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재윤마저 자신을 떠나가 버려서인지 이제는 진짜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즘 불면증이 온 건지 통 잠을 자지 못해서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기고 날씬하고 육감적이던 그녀의 몸은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라희는 오늘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천천히 걸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버스를 타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의 봉안당이었다.

그녀는 봉안당에 들어가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걸어가기도 전부터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준 사람이 할머니였다.

이윽고 할머니 봉안당 앞에 도착했다.


“할머니, 나 왔어. 미안해. 자주 못 와서. 또 나 힘들다고 찾아왔네.”

라희는 봉안당 문을 열고 쓸쓸한 표정으로 봉안함을 어루만졌다.

봉안당 안에는 라희와 할머니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 액자가 들어 있었다.

그때의 라희는 정말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할머니, 나 어떻게 살아야 해? 나 너무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아.”

라희는 아무 말이 없는 할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흐느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자신도 자기 잘못을 알지만 고칠 수 없이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가 너무 어려웠다.


“할머니 나도 행복해지고 싶은데……. 나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도 상처를 줬어.”

라희는 또 재윤이 생각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살고 싶지만,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라희는 속에 있는 모든 말들을 쏟아냈다. 이렇게 말하면 할머니가 자기 말을 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 보고 싶어.”

라희는 한참을 그렇게 그곳에서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납골당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어떤 건물이 나와서야 걸음을 멈췄다.

라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의 간판이 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마음 정신 건강 의학과 의원]

그녀는 병원의 간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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