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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차 회장의 결단 (53/101)


제53화 차 회장의 결단
2023.01.02.


라희는 병원 간판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손에 식은땀이 저절로 맺혔다. 그녀의 긴장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막상 발길을 이리로 돌렸지만, 자신이 정신과 병원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라희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병원 입구까지 간신히 걸어갔다.

하지만 막상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그렇게 병원 입구에서 계속 서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재윤이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이 생각났다. 그날 재윤은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라희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었다.

재윤은 라희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다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라희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희야, 내가 인터넷도 뒤지고 후기도 많이 봤는데 진짜 좋은 병원 같아. 같이 가보자.”

재윤은 라희를 바라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라희는 재윤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됐다.

그리고 곧 그녀의 숨소리가 몹시 가빠졌다. 그녀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병원에 가보라는 재윤 때문에 라희는 몹시 화가 났다.

라희는 재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재윤은 라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니. 나는 진짜 좋다길래.”


“너 나랑 왜 만나?”

라희는 재윤을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라희의 질문에 재윤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정신병자랑 왜 만나냐고?”

라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씩씩댔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나는 네가 스트레스도 심하고…….”


“너 아직도 나 못 믿지? 내가 또 딴 남자 만날 것 같아? 병원엔 네가 가야지. 나 의심하잖아.”

라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한껏 비웃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진짜 미안해.”

재윤은 라희의 뒤로 와 그녀의 허리를 와락 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자기 얼굴을 문질렀다.


“간지러워. 하지 마.”

재윤은 라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상처 줬다면 미안해. 이젠 안 그럴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라희의 표정이 더 슬퍼졌다.


‘그렇게 나를 생각해줬었는데…….’

‘그때 재윤이와 이곳에 함께 왔으면 우리 둘은 행복했을까?’

예전에 재윤이가 보내 준 링크를 보고 병원에 찾아오긴 했지만 라희는 너무 두려웠다.


‘나 진짜 정신병 걸린 걸까? 아니야. 절대 아니야.’

라희는 아무리 용기를 내려고 해도 자꾸만 자신이 없어졌다.


‘들어가지 말까? 내가 미쳤어? 아니잖아.’

‘그래도 잠도 못 자고 손도 떨리고 계속 눈물만 나잖아.’

‘이렇게 살 수 있어?’

‘기록이라도 남으면?’

라희는 병원 입구 앞에 선 채 들어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화장실을 다녀오는지 가운을 입은 중년 여성이 병원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라희를 유심히 보았다.

라희는 그녀의 눈빛에 순간 기분이 나빠 그녀를 째려보며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라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의사는 짧은 헤어스타일에 조금 통통한 몸매를 가진 푸근한 옆집 아줌마 같은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그녀가 라희를 쳐다보는 눈빛은 조금 남달랐다. 카리스마 있고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라희를 보며 물었다.


“병원 오시는 거죠?”

“…….”

라희는 순간 갈등이 일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든지 아니면 들어가서 새 인생을 살아보려고 노력이라도 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들어오시기 전에 망설이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자,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시죠?”

‘이 여자 뭐지?’

얼핏 평범했고 예쁘지도 멋지지도 않았지만 뭔가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에너지는 대단했다.

라희는 외모도 출중했고 몸매도 뛰어났지만, 라희의 표정을 보면 옆에 있는 사람도 다 우울할 정도였다.

라희가 망설이자 그녀는 문을 열고 미소를 지으며 라희에게 고개를 끄덕했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 여자가 자신을 도와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머릿속에 스쳤다.

라희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떨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이렇게 살다간 진짜 죽을지도 몰라.’

라희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병원 안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 그녀를 보고 여의사는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며 라희의 뒤를 따라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

한편 소명은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인지 몸이 조금 피곤했다.

도통 도하 생각 때문에 흥분했는지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종일 두근거리고 마치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아마 그가 그녀에게 해준 깜짝 이벤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세상 다정한 남자였다. 소명은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믿음이 갔다.

지성의 외도 이후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한 소명이지만 도하를 만난 이후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는 그녀의 아픈 마음을 치료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소명이 잠에서 깨 부엌으로 나가보니 정희는 벌써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엄마, 나 뭐 시켜. 혼자 하지 말고.”

“아니야. 우리 딸 오늘 올라가면 또 못 볼 텐데 엄마가 차려주고 싶어서 그래.”

소명은 정희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자, 앉자. 다 차렸어.”

소명은 앉아서 밥을 한 숟가락 뜨다 말고 정희를 바라보았다.


“엄마, 나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그게 무슨 말이야. 딸이니까 항상 엄마가 신경 써야지. 엄마 하나밖에 없는 보물인데.”

정희는 소명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엄마한테 말하니까 그래도 좀 후련해.”

“잘 얘기했어. 안 하고 속였으면 엄청 엄마 서운할 뻔했어.”

소명은 정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근데 어제 그 사람 너 보겠다고 이 먼 데까지 찾아온 거야?”

“어? 어.”

“우리 소명이 엄청 좋아하나 보다.”

정희는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올리며 불고기를 젓가락으로 덜어 소명의 밥 위에 얹어주었다.


“자, 얼른 먹어. 갈 때 반찬 좀 가져가고. 그 사람 것도.”

“응?”

“좋아할까 모르겠다. 엄마 반찬.”

“엄마, 고마워.”

항상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엄마에게 소명은 깊은 감사를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소명은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정희가 싸준 반찬이 한가득이었다.

소명은 트렁크에 짐을 싣고 대문 앞에 서 있는 정희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았다.

소명과 포옹을 하는 정희의 표정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딸, 자주 못 오더라도 연락은 해. 알았지?”

“그럼. 당연하지. 엄마 갈게.”

포옹을 풀고 소명이 차에 올라타자 정희가 입을 열었다.


“소명아, 조심해서 운전해.”

“알았어. 엄마, 얼른 들어가.”

소명은 차에 시동을 걸고 서서히 차를 움직였다. 정희는 소명이 떠난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소명아, 행복해야 해.’

정희는 그 자리에 서서 간절히 소명의 행복을 빌었다.

******

한편 차 회장은 요즘 통 도하를 볼 수 없어 너무 답답했다.

도하를 보려고 하면 이미 그는 퇴근하고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고 업무를 등한시하는 성격이 아닌 걸 알기에 계속 참고 있었다.

차 회장도 도하의 능력을 인정했다. 일할 때 어떤 면에서는 자신보다 나은 것 같았다.

두뇌 회전도 빨라 도하가 대표가 된 후에 재정이 더 안정되었다.

차 회장은 도하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어디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을 외모에 이지적인 아들이 있어 차 회장은 늘 든든했다.

그런 도하 때문에 차 회장의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도하는 말수는 적었지만 차 회장의 속 한 번 썩인 일이 없던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요즘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꼴이 너무 안타까웠다.

도하가 좋아하는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도하가 붙여놓은 경호원들이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 회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여자가 스스로 도하를 떠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가 포기하고 도하 옆에서 사라져야 도하도 단념할 것 같았다.

차 회장은 이 일을 어찌 해결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인데도 그는 아들 생각하느라 퇴근 시간도 잊고 있었다.

그때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네. 처리했습니다.”

“알았네.”

차 회장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얼마 안 있으면 곧 도하에게 전화가 올 것이다. 그는 퇴근도 하지 않고 도하의 전화를 기다렸다.

******

퇴근하고 도하는 집으로 오면서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아까 소명과 전화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발한다는 소식에 가슴이 떨려왔다. 이 비서는 자꾸만 달라지는 도하가 너무 신기했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느꼈다.

그때 이 비서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이 비서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이 비서님, 큰일 났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왜요?”

[대표님 댁에…….]

이 비서의 통화 소리가 도하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대표님 댁이 왜요?”

이 비서는 너무 놀라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에 집중했다.


[지금 대표님 짐을 다 빼내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아무래도 회장님 지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도하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갔다.


“아, 우선 알았어요. 상황 지켜보고 보고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이 비서가 도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회장님께서 대표님 짐을…….”

“대충 들었어요. 차 돌리시죠. 회장님 어디 계신지 물어봐 주시고 그쪽으로 가 주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던 도하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눈빛이 이글거렸다.

이 비서는 차 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회장이 아직 회사라는 말에 도하가 탄 차는 다시 회사를 향해 무서운 속도를 내며 달려갔다.

지하 주차장에 내린 도하는 빠른 걸음으로 회사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도하의 걸음이 너무 빨라 이 비서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간신히 도하를 따라잡았다.

도하의 뒤를 따라가는 이 비서의 안색이 불안해 보였다.

회장실 앞에 선 도하는 노크도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도하의 행동을 본 비서실 직원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도하가 회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차 회장은 태연한 표정으로 도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왔니?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네 얼굴을 보는 게냐?”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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