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4화 나 재워줘요. (54/101)


제54화 나 재워줘요.
2023.01.05.



“오늘부터 집으로 들어와.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이 아비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할래?”

“아버지, 어떻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실 수 있어요? 제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제 의사는 없는 겁니까? 왜 허락도 없이…….”

도하는 너무 화가 나서 뒤에 말을 끝맺지 못할 정도였다.

항상 강압적인 아버지가 도하에게 두려운 존재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도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아버지는 비굴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차 회장이 한 행동에 도하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아버지, 제가 그렇게 못마땅하세요?”

“요즘은 그렇다. 당분간 떨어져 있으면 다 해결돼.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법이야.”

“아버지……. 진짜 너무하시네요.”

도하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차 회장을 노려보았다. 생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던 차 회장은 놀란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놈의 새끼, 그 눈 뭐야? 아비 노려보는 거야?”

“아무리 그러셔도 전 본가에 안 들어갑니다.”

도하는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차 회장에게 또박또박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차도하!”

차 회장은 순순히 도하가 말을 듣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강한 반발에 당황한 눈치였다.


“아버지. 엄마 사랑하시잖아요.”

도하의 말에 차 회장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도 소명 씨 사랑해요.”

“……도하야, 나는 너를 위해서.”

“제 짐 다 가져가셔도 저는 본가에 안 들어갑니다. 소명 씨랑 헤어질 마음 추호도 없습니다.”

도하는 차 회장은 쏘아보다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회장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차도하, 도하야.”

차 회장은 애타게 도하를 불렀지만, 도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도하는 너무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소명과 같은 라인의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었는데…….

하지만 그는 절대 본가로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지하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며 이 비서에게 말했다.


“전 제 차 타고 출발할게요.”

그는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며칠 입을 수 있는 슈트랑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좀 사다 주세요.”

“네?”

이 비서는 도하의 말에 놀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도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 사시고 전화 주세요.”

“아…… 네. 저, 대표님, 본가로 안 가십니까?”

조심스럽게 도하에게 묻는 이 비서를 바라보며 도하는 입을 뗐다.


“네. 절대. 회장님이 혹시 이 비서님 부르면 바로 저한테 보고하세요. 저번에 제가 한 말 잊지 않으셨죠?”

“네. 대표님.”

이 비서는 도하를 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도하는 차 문을 열고 재빨리 올라탔다. 그는 빠른 속도로 회사를 빠져나갔다.

******

한편 소명은 한시라도 빨리 도하를 만나고 싶었다.

요리를 잘하는 엄마가 만들어준 맛있는 밑반찬을 도하에게 얼른 주고 싶었다. 소명은 도하도 자신처럼 엄마가 만들어준 요리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명은 차를 세우고 한 손에는 캐리어, 다른 손에는 밑반찬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밑반찬이 양이 많아서인지 꽤 무거워 팔이 아팠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순간 저 멀리 도하가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명이 깜짝 놀라 도하에게 걸어가자, 도하는 소명의 짐을 보고 얼른 달려와 그녀의 짐과 캐리어를 번쩍 뺏어 들었다.


“도하 씨, 하나는 제가 들게요.”

“아니에요. 소명 씨 힘들어요.”

소명은 이런 도하의 모습에 그가 더 남자답게 느껴졌다.

그런데 도하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근데 도하 씨? 왜 우리 집 앞에 서 있었어요? 옷도 안 갈아입고. 피곤할 텐데 집에 들어가 있지 그랬어요.”

“아. 네.”

도하는 뭔가 겸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하가 먼저 소명의 현관 앞으로 가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명 씨, 문 좀.”

소명은 얼른 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뒤를 돌아 있는 도하를 보며 소명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도하 씨, 들어오세요.”

“네.”

도하는 소명의 집에 들어갔다. 소명은 도하에게 캐리어를 받고 드레스 룸으로 가지고 갔다.


“도하 씨, 그 짐은 식탁에 올려줄래요.”

“네.”

도하는 소명의 말대로 밑반찬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소명은 캐리어를 얼른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도하 씨, 소파에 좀 앉으세요.”

“네.”

도하가 소파에 앉자 소명이 주스를 가지고 와서 도하의 앞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도하 씨, 주스 드세요.”

“고마워요.”

아무것도 모르는 소명에게 어차피 말을 해야 하는데 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너무 걱정되었다.

그는 소명의 눈치를 흘긋 보며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피하지 말자.’

도하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저, 소명 씨?”

“네.”

소명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도하를 쳐다보았다.

막상 말을 하려니 입에서 도저히 나오지를 않았다. 그때 소명이 도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입을 뗐다.


“도하 씨,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죠?”

소명의 빠른 눈치에 도하는 지금이 말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임을 깨달았다.


“아…… 네.”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아, 아버지가…….”

그의 입에서 아버지란 말이 튀어나오자 소명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해맑던 그녀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도하의 마음이 약해지고 슬퍼졌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덜 아플까?’

그녀 대신 맞는 매라면 백번도 더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하는 소명을 지키고 싶었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사랑한다. 진심으로.’

“소명 씨, 오늘 아버지가 제 짐을 다 빼셨어요.”

“네? 짐을요?”

도하의 말을 들은 소명은 너무 놀라 소리쳤다.


“어떡해요!”

소명은 잠시 멍하더니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도하는 말없이 소명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두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소명 씨…….”

“흑……. 흑흑”

소명은 잇새로 새어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너무 속상해요. 도하 씨가 저 때문에 힘드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요.”

소명은 울면서도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도하는 소명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소명 씨, 저는 소명 씨한테 너무 미안해요.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울게 만들고. 소명 씨?”

도하는 자신의 품에서 울고 있는 소명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명 씨? 나 봐요.”

소명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는 진심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쉽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약속할게요. 저 소명 씨 곁 절대 안 떠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이겨내요.”

“도하 씨, 도하 씨가 힘든 게 싫어요.”

“나 하나도 안 힘들어요. 지금 신나 죽겠어요.”

“네?”

소명은 도하가 생뚱맞은 소리를 하자 깜짝 놀라 흐르던 눈물이 쏙하고 들어갔다.

그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명이 슬퍼하고 우는 게 너무 속상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속상한 맘을 달래고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었다.


“나 재워줘요.”

“네?”

 

 
갑작스러운 도하의 부탁에 소명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속마음은 대환영이었다.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녀에게도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말고 집으로 들어가요.”

“소명 씨……. 제발.”

도하는 소명을 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다. 그의 부탁을 거절할 재간이 없다.

소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소명 씨, 당분간 집 구할 때까지만요. 최대한 빨리 구할게요.”

잠시 생각을 한 소명은 도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빨리 구해야 해요.”

“고마워요. 소명 씨.”

도하는 소명을 와락 껴안았다.


“소명 씨……. 근데”

“네?”

“저…… 배고파요.”

소명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포옹을 푼 후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엄마가 밑반찬 많이 싸 주셨어요.”

“그래요?”

도하의 얼굴에 기대감에 환해졌다.


“어머니 음식 맛 궁금해요.”

“엄마가 도하 씨 주라고 도하 씨 것도 싸주셨는데.”

“제가 그거 오늘 다 먹으면 되죠.”

소명은 도하의 말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를 힘들게 하기는 싫은데 그와 있으면 너무 행복해져서 앞으로 닥칠 일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와 있는 사소한 이 순간조차도 행복하고 즐거웠다.

소명은 정성스럽게 도하를 위해 식사를 세팅했다. 도하는 소명의 옆에 와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줄게요.”

“아니에요. 얌전히 소파에 앉아 계세요.”

소명은 도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그의 등을 밀어 소파로 가게 했다.

그때 도하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도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다 준비했습니다.”

“네. 나갈게요.”

도하는 소명을 보며 말했다.


“소명 씨,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네? 거의 다 차렸는데.”

“이 비서가 슈트랑 옷을 사 와서요.”

“그럼 이 비서님도 오시라고 하세요. 같이 먹어요.”

그녀의 말에 도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소명과 단둘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하가 잠시 망설이자 소명이 그를 보며 말했다.


“얼른요.”

“알았어요. 이 비서님 밥 먹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물어라도 봐주세요. 드셨으면 어쩔 수 없고요.”

“네.”

도하가 현관문을 열자 바로 이 비서가 서 있었다.


“대표님, 여기.”

도하는 잠시 망설이며 이 비서를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저기 저녁 식사 했습니까?”

갑자기 식사했냐고 물어봐서 놀랐지만, 이 비서는 도하를 보며 말했다.


“아니요.”

“그럼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네요.”

“네? 식사를요? 네. 저야 좋습니다, 대표님.”

도하가 자신을 생각해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이 비서는 도하의 제안이 정말 고맙게 느껴졌다. 도하가 자신에게 조금 마음을 연 게 아닌지 기대감마저 들었다.


“들어오세요.”

“네.”

이 비서가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서 소명을 바라보며 인사를 꾸벅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어서 오세요.”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안에 어울리는 오밀조밀한 예쁜 이목구비를 가진 소명을 보고 이 비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비서는 소명이 상당한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명은 이 비서를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애쓰셨어요.”

거기다가 그녀는 친절하고 상냥하기까지 했다. 이 비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분이 진짜 사모님이 돼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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