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눈빛만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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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눈빛만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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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눈빛만 봐도
2023.01.23.
도하가 한창 회사에서 일에 몰두하던 중 갑자기 이 비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평소에 더듬지 않던 말까지 더듬거렸다.
“대표님……큰, 큰일 났습니다.”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에 놀란 도하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일인데요?”
“회장님 댁으로 홍소명 씨가 지금 가고 있다고…… 여……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요?”
그 말을 들은 도하의 표정이 차갑게 굳더니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하는 이 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행동에 분노가 치밀었다.
어제는 짐을 빼고 오늘 소명을 만나다니!
도하는 그녀가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차를 몰아 본가로 달려갔다.
그녀가 혹시 아버지한테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그녀가 아프고 슬퍼하고 우는 모습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속도를 내며 달려왔는데 아쉽게도 소명은 아버지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우선 그녀를 이곳에서 나가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소명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화가 잔뜩 난 채로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도하였다.
‘도하 씨!’
자신의 소식을 듣고 그가 여기까지 달려와 준 것이었다. 소명은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도하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소명은 그를 본 순간 그동안 몰려왔던 극심한 긴장감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가 왔다. 나에게!’
소명은 아까까지 꾹꾹 참았던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도하가 자신을 걱정할까 봐 얼른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도하는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차 회장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못난 놈. 이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회사 일까지 팽개치고 달려와! 달려오긴.”
차 회장은 또 소명의 소식을 듣고 번개같이 달려온 도하가 한심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차 회장이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도하는 곧바로 소명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소명 씨?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차 회장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그녀를 향해서는 세상 다정한 눈빛을 지어 보이는 아들의 행동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너, 너 아비 앞에서 무슨 짓이야?”
차 회장은 너무 화가 나서 도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도하는 차 회장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여기를 절대 못 오게 해야 했는데.”
소명을 바라보는 도하의 표정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불려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안하고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몰려왔다.
“아니에요. 제가 온다고 했어요. 저 괜찮아요.”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하의 마음이 더 아파졌다.
“자, 일어나요.”
“네?”
“나가요. 여기 더 있을 이유 없어요.”
“그래도…….”
도하는 소명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소명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런……. 차도하. 멈추지 못해?”
차 회장은 도하의 행동에 화가 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화가 안 풀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하가 나가고 은영이 뛰어 들어와서 차 회장 옆에서 그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여보, 괜찮아요? 이렇게 화내시면 혈압에 안 좋아요.”
“하아, 저 못난 놈. 도대체 왜 저러는지…….”
“여보. 들어가서 좀 누우세요.”
차 회장은 너무 화가 나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소명은 강하고 올곧았다.
앞으로의 일이 절대 평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차 회장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은영의 부축을 받고 자신의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은영은 그런 차 회장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졌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맘과, 한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아들의 맘을 둘 다 알 것 같아 가슴이 쓰라렸다.
도하가 그 여자와 결혼한다면 이혼녀와 결혼했다는 딱지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텐데. 아들의 이미지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해서 정말 신중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하가 그 여자에게 하는 행동은 그녀가 살면서 아들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도하는 말수 적고 내성적이었지만 항상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아이였다.
여자에 관심이 너무 없어서 혼기가 차자 슬슬 걱정이 앞서기까지 했는데…….
그 아들이 사랑에 목숨을 거는 모습이 너무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은영은 복도 끝에서 아까 소명을 몰래 훔쳐보았다.
긴 생머리와 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도하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나 너무 궁금했는데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모든 궁금증이 사라졌다.
차 회장의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표정에 근심이 서려 있었다.
은영은 그 모습을 보고 과거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도 그때 사랑밖에 눈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모진 시집살이와 차별을 겪고 살았지만, 은영에게는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아들이 있었고 그녀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옆에 있었다.
아들이 그렇게 좋다는데……. 그녀는 차 회장을 설득하고 싶었다.
앞으로 헤쳐 나갈 일이 많지만, 도하는 충분히 이겨낼 거라 믿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을 정말 사랑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얼마나 한 여자에게 진심인 줄 비로소 알게 되었다.
SS 그룹의 차기 회장직보다 지금 도하는 그 여자의 남자가 더 되고 싶다는 사실도.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인상을 쓰고 있는 자기 남편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차 회장의 얼굴이 아주 피곤하고 고돼 보였다.
은영이 남편이 안쓰러워 그의 이마를 자기 손으로 쓸어 올렸다.
******
도하의 손에 이끌려 소명은 현관 밖으로 나왔다. 현관 밖에는 도하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는 얼른 버튼을 누르고 소명이 차에 탈 수 있도록 조수석의 문을 열며 말했다.
“소명 씨. 타요.”
“네.”
소명이 조수석에 타자 도하는 소명에게 안전띠를 메어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다.
도하는 운전하면서 소명에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아버지가 심한 말 했을까 봐 너무 걱정돼요.”
“아니에요.”
소명은 도하가 맘 아파할까 봐 아까의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도하는 운전하고 가면서도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참을 달린 후에 한적한 공원에 차를 세웠다.
두 사람은 호수가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소명은 슬픈 표정의 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하 씨, 회사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도하는 그녀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에게 보내는 그의 미소는 왠지 슬퍼 보였다.
“소명 씨, 미안해요.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나오실 줄 몰랐어요.”
“제가 간다고 했어요.”
그 말을 하는 소명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제 맘을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네?”
“말씀드렸어요. 저 도하 씨 사랑한다고요.”
소명은 도하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도하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소명 씨, 진짜 잘할게요. 소명 씨 마음 아프게 하는 일 없어요. 이젠…….”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소명은 그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코끝이 찡해졌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그들의 의지는 강해졌다.
“소명 씨, 사랑해요.”
“저도 도하 씨 사랑해요.”
소명은 포옹을 풀고 그를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망울이 눈물로 일렁거렸다. 항상 강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한 그였지만 오늘 눈물을 참기는 어려웠다.
자꾸만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소명은 그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이 자기 얼굴에 닿자 꾹 참았던 감정이 북받쳤다.
점점 차오르던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운다.’
그의 눈물을 본 그녀의 마음이 찢어졌다. 소명은 그가 왜 우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너무 미안해서. 자신의 마음이 아프고 자신이 상처받았을까 봐 속상해서 그런 거라는 걸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명은 그의 눈물을 자기 손으로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늘 그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것처럼.
소명의 손길을 느낀 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절대 포기 안 해요.”
“저도 이제 도하 씨 없으면 안 돼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때론 구구절절한 말보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진심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지금 두 사람이 그랬다.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지만, 소명은 도하와 자기 자신을 믿기로 했다.
한 번의 크나큰 배신으로 상처 입었지만, 그녀의 사랑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그녀 옆에만 있어 준다면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다 내어 걸리라 다짐했다.
소명은 팔을 들어 올려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
서빈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간신히 눈을 떴는데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
“아……. 속 쓰려.”
그녀는 통증이 너무 심해 가슴 부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하아.”
그녀는 애써 몸을 일으키고 침대를 빠져나와 자신의 방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내 핸드폰.”
아무리 찾아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왔다.
씩씩거리며 오 여사를 찾으려는데 그녀는 순간 너무 놀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멈칫했다.
거실 소파에 출근해서 없어야 할 이 회장이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서빈은 순간 안 좋은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빠. 왜 아직 안 갔어?”
이 회장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서빈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 이리 당장 내려와.”
“아빠…….”
항상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던 아빠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서빈은 주눅이 든 표정으로 이 회장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서빈이 소파에 앉자 이 회장은 한참을 서빈을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화장을 제대로 지우지 않아 눈 밑은 까맣고 또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아직 딸에게는 술 냄새가 풍겨왔다.
“넌 언제까지 이럴 셈이야?”
“내가 뭘 어쨌는데?”
서빈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어제 그게 무슨 짓이야? 엄마한테?”
“아, 그건 엄마가 내 맘도 몰라주고.”
“그딴 소리 집어 쳐.”
“아빠…….”
서빈은 평상시와는 달라도 너무도 다른 아빠의 행동에 놀라 순간 말을 잃었다.
“당장 돌아가.”
“어디로?”
“미국 가.”
“싫어. 안 가.”
“강제로 보낼 거야.”
“아빠, 나 싫어. 잘못했어요. 앞으로 엄마한테 잘하고…… 응, 또 다른 사람한테도 잘하고.”
“그럼 선 봐.”
“…….”
이 회장은 서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현관을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