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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행복해요 (60/101)


제60화 행복해요
2023.01.26.



 
서빈은 자꾸만 자신을 몰아세우는 가족들에게 화가 났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걸핏하면 그걸로 자신을 협박하다니 이럴 땐 아빠가 너무 치사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편이었던 아빠마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현실 또한 너무 서글퍼졌다.


‘다 차도하때문이야. 둘만의 일을 그렇게 떠벌리다니.’

자신이 다른 남자를 만난 걸 절대 이야기 안 할 줄 알았는데…….

그 여자가 얼마나 좋으면 그렇게 입 무거운 도하가 말을 했을까?

살면서 이렇게 괴로웠던 순간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갖지 못하는 이 현실과 부모에게까지 구박덩어리가 되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너무 지치게 했다.

자꾸만 부아가 치밀었다.

서빈은 속이 안 좋아서 침대에 눕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당장 도하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오 여사를 찾았다.

그때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도우미들이 보였다. 서빈은 주방 안으로 들어가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엄마는요?”

도우미 아주머니는 혹시 서빈에게 책이라도 잡힐까 봐 눈치를 보며 말했다.


“욕실에 계십니다.”

“북엇국 끓여요.”

서빈은 항상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는 버릇이 있었다.


“네?”

도우미 아주머니는 서빈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다시 물어보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나 속 안 좋으니까 북엇국 끓이라고요.”

“아가씨, 죄송한데 이미 오늘 국 다 끓여놔서요. 지금 바로 드실 수 있게 식사 준비해드릴까요?”

“아 놔. 참. 끓이라면 끓여요.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해.”

서빈은 자기 엄마뻘 되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서빈이 엄마에게 가기 위해 바로 자리를 뜨자 도우미 아주머니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를 열어 북어채를 꺼냈다.


“하아……. 오늘은 내가 잘못 걸렸네.”

이 회장의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 중에 서빈에게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했고 기분이 안 좋은 날에 서빈에게 걸린 사람은 운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소리 지르는 걸로 마무리돼서 그나마 끝나서 다행이었다.

서빈은 엄마를 찾으러 한참을 걸어가 오 여사 전용 욕실에 도착했다.

오 여사는 욕조에 물을 받아 한창 거품 목욕을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욕조 근처에 캔들을 켜고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제 서빈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서빈 때문에 잠을 설쳐서 몸이 너무나 피곤했다.

그녀가 몸을 따뜻한 욕조 속에 집어넣고 스르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 때마침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곧 서빈이 머뭇거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오 여사는 서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말했다.


“왜?”

그녀는 딸이 어제의 일을 잘못했다고 사과하려고 자신을 찾아온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서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내 핸드폰 못 봤어?”

서빈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오 여사는 그녀를 째려보며 말했다.


“나가.”

“엄마, 어제 나 데려왔잖아. 방에 없던데.”

“이서빈, 너 어제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그 꼴이 뭐야? 옷 하며.”

“아, 그만. 알았고. 핸드폰 어디 있냐고?”

“서빈아, 너 왜 이래? 요즘? 응?”

“어디 있냐고?”

서빈은 화난 표정으로 오 여사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놀란 오 여사는 서빈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엄마 방에 있어.”

서빈은 오 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욕실을 쌩하고 나가버렸다.

오 여사는 화가 나고 답답하고, 서빈이 걱정돼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안하무인인 서빈을 어떻게 해야 철이 들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서빈은 얼른 오 여사의 방으로 뛰어가서 자신의 핸드폰을 냉큼 꺼내 온 후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부재중 전화가 2통이나 와 있었다. 서빈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어요? 어제 오빠 그 집에서 몇 시에 나왔어요?”

[그게……. 안 나오셨습니다. 어젯밤에는.]

“하아, 이런. 차도하새끼.”

서빈은 화가 나다 못해 쓰러질 것 같았다.


[근데, 아가씨. 차 회장님이 홍소명 씨를 부르신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서빈은 도하가 소명과 한 집에서 밤을 지새운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자신은 다른 남자와 어떤 짓을 해도 괜찮았지만, 그가 그러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

그가 예전처럼 자신을 사랑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도하가 사랑에 빠져서 소명이라는 여자에게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서빈은 도하를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도하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차 회장은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자신에게도 조금의 기회는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그러다 또 속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너무 속이 쓰렸다. 그녀의 마음처럼.

서빈은 식탁에 앉아 기어이 북엇국을 먹고야 말았다. 그녀의 더러운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다들 그녀와 눈을 안 마주치려고 노력했다.

서빈이 국을 먹을 때 옆에서 오 여사는 슬픈 눈으로 자기 딸을 바라보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저번에 말한 선 자리 아버지가 보라고 하시니 그냥 봐.”

“…….”

서빈은 아무 말 없이 국만 떠먹으며 오 여사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다른 사람 만나면 마음 달라질 수 있어.”

“나 오빠 아니면 안 돼. 그렇지만 아빠가 저러니 만나는 볼게.”

“그래, 잘 생각했다.”

서빈은 내키지 않은 선 자리에 갈 생각을 하니 잘 먹던 북엇국이 갑자기 안 들어갔다.


“하아, 엄마 나 좀 올라가서 쉴게.”

서빈은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

오 여사는 자꾸만 폐인처럼 행동하는 서빈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타일러도 서빈은 통 말을 듣지 않았다.

이번에 서빈이 좋은 남자를 만나 그만 도하를 잊고 정신을 차리길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어제 엄마가 사준 하얀색 투피스를 입고 도하를 찾아가 볼까, 그러면 그가 자신을 봐줄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자신이 바보같이 생각돼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녀의 머리만 아파질 뿐이었다.

그녀는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

한편 공원에서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소명은 당연히 도하가 집으로 갈 거로 생각했는데 그는 갑자기 고속도로를 탔다.

깜짝 놀란 소명은 그를 바라보며 동그래진 눈을 하고 물었다.


“도하 씨, 어디 가는 거예요?”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는 소명을 도하는 살짝 쳐다보다 입가가 스르륵 올라갔다.

도하는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비밀.”

“네? 비밀이요?”

“놀라게 해주고 싶어요. 더 이상 묻지 않기.”

“네, 알겠어요, 그런데요. 너무 궁금해요.”

몹시 궁금해하는 소명이 도하는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도하는 그녀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오늘처럼 속상한 날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도하는 휴게실에서 소명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이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서 모든 조치를 해 놓았다.


‘소명 씨가 좋아하면 좋을 텐데.’

그녀가 좋아할 걸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명은 자신의 기분을 생각해주는 이 섬세한 남자가 고마웠다. 매번 그는 기대 이상으로 그녀에게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는 사람이었다.

소명은 자신이 이렇게 깊게 도하에게 빠질 줄은 몰랐었다.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도하만 보였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을 절대 한순간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고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명은 그곳을 요리조리 바라보았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소명이 여기가 어딘지 아직 구분되지 않아서 주변을 살폈다.

주차장을 지나 걸으니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SD 랜드.”

소명은 자신도 모르게 간판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어? 이건?”

“우리 회사가 짓고 있는 놀이공원이에요.”

“와!”

소명은 놀라서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놀이공원을 바라보았다.


“거의 다 지은 거예요? 기사로 본 적 있어요. 예전에.”

“네.”

“와, 너무 멋지네요.”

SS 물산은 대부분 아파트 설계만 하고 있어서 도하가 놀이공원을 짓는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소명 씨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말 안 한 거구요.”

“도하 씨…….”

소명은 놀이공원이 개장하기 전에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도하의 말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경치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놀이공원에 오니 마치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놀이공원은 거의 완공되어 완공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자 구경해 봐요. 나랑.”

도하가 손을 내밀었다. 소명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입구에 도착하니 커다란 성이 눈이 들어왔다.


“와 너무 예쁘다.”

소명은 아까의 일을 다 잊고 소녀가 된 듯이 소리치며 기뻐했다. 그녀가 좋아해 줘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명 씨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자, 따라와요.”

도하의 손을 잡고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왔다.

아까 미리 이 비서를 통해 연락한 터라 도하가 건물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뛰어나와 도하를 보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도하도 직원들을 보고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곧 도하와 소명의 앞에 케이블카가 멈췄고 두 사람은 케이블카 안으로 들어갔다.

집과 거리가 꽤 멀어서 한참을 달려온 탓에 거의 해가 지고 있었다.

케이블카에 단둘이 앉아서 전망대에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이 이벤트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꿈꾸던 동화 속의 왕자님을 만난 걸까?

서른네 살의 소명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버렸다.

소명이 웃자 도하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명 씨? 왜 웃어요.”

“저 동화 속 공주가 된 기분이에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웃겨서.”

도하는 해맑은 소명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당당하게 자신에게 인사하던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동화 속 공주보다 내가 더 행복하게 해줄게요.”

도하는 소명을 보며 그녀의 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 대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렇게 심장 뛰는 사람, 소명 씨뿐이에요.”

“아…….”

 

 
소명은 그의 고백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돼요?”

소명이 그의 가슴에 얹어 놓았던 손을 떼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도하는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 역시 지금 행복했다. 말없이 타워에 올라갈 때까지 두 사람은 꼭 껴안고 있었다.


“소명 씨가 좋아하니 다행이에요.”

케이블카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타워 건물로 올라갔다. 놀이공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소명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무엇보다 그와 함께라는 사실이 가장 행복한 이벤트 선물이었다.


“올라갈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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