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가져
(65/101)
제65화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가져
(65/101)
제65화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가져
2023.02.13.
서빈이 우울한 표정으로 자리에 계속 앉아 있자 오 여사가 서빈을 보며 말했다.
“서빈아, 일어나야지. 가자.”
서빈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여사는 서빈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늦겠다. 빨리 출발하자.”
서빈이 순순히 자신을 따라 나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다고는 했어도 막상 당일 고집을 피우며 안 가겠다고 해도 서빈의 성격상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빈은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하 때문에 애가 타 죽겠고 머릿속에는 도하와 소명이 단둘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만 꽉 차 있었다.
그녀는 계속 소명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소명보다 나은 점을 곱씹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 아빠 기분을 맞춰줘야 일주일이 편할 것 같았다.
이 회장은 한다면 하는 사람으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면 진짜 다시 미국으로 보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한숨만 새어 나오고 기분은 쭉 가라앉아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서빈이 따라 나오긴 했지만, 얼굴은 짜증이 가득한 걸 보고 오 여사는 입을 열었다.
“서빈아, 너 계속 그런 표정하고 있을래?”
“내가 뭘 어쨌는데?”
“거울 보여줄까?”
“그러든가.”
“말이나 못 하면. 너 그런 표정으로 선 자리에 앉아 있으면 상대한테 예의가 아니야.”
“내가 지금 그 사람 기분 맞추러 선 보러 가는 거야?”
서빈은 자신의 처지를 배려하지 않고 상대 편을 드는 엄마가 어이가 없어서 화가 치밀었다.
“또, 또. 엄마한테 대드는 버릇.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해. 넌.”
“엄마는 내가 그렇게 미워? 엄마도 내가 남자한테 미쳐서 이 남자 저 남자 찾아다닌다고 생각해?”
“서빈아…….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왜? 아닌 척해? 나 소문 안 좋게 날까 봐 얼른 시집보내려는 거잖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너 어쩜…….”
“하아, 말하기도 지겹다. 나 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예전처럼 놔두면 안 돼? 답답해 미쳐버리겠다고!”
서빈의 참을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 자신도 모르게 엄마한테 막말을 하고 말았다.
김 기사는 서빈과 오 여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눈치를 보며 운전하고 있었다.
“이서빈. 거의 다 왔어. 집에 가서 얘기하고 일단은 표정 펴.”
“…….”
서빈은 오 여사의 말을 무시하며 오히려 더 인상을 구겼다.
이윽고 서빈이 선을 보는 호텔 커피숍에 도착했다.
서빈은 계속 똥 씹은 표정을 하며 앞서가는 오 여사의 한참 뒤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오 여사는 그런 서빈을 보고 속에서 천불이 났다.
어떨 때 자식은 정말 원수 같을 때가 있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노력해도 요즘 서빈은 오 여사의 눈 밖에 날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이미 정훈은 자리에 나와 있었다.
그는 서빈과 오 여사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와 그녀의 어머니를 본 서빈의 얼굴은 더 굳어졌다.
맞선남의 얼굴은 서빈이 생각하기에 최악 그 자체였다. 서빈은 항상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만 만나왔는데 이렇게 평범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서빈은 그 사람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한 번 쓱 보더니 이내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렸다.
‘아, 또 귀찮게 생겼네. 또 쫓아다니면 어떡하지?’
오 여사는 맞선남을 보고 나서 마음에 쏙 들었다. 얼굴은 평범했지만, 그의 입소문은 대단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머리 좋기로 유명해서 영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유학을 다녀와서는 회사에서 탁월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형보다 일을 더 잘해 아버지의 뒤를 곧 그가 이을 거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워낙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선 자리를 다 거절했는데 서빈은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였다.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잘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여사는 정훈의 얼굴을 보다 자기 딸을 한 번 흘끔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서빈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디에 내놔도 모자라지 않을 미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두 사람이 잘되어 서빈이가 그만 도하를 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훈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훈의 어머니 김 여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 여사도 김 여사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서빈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서빈은 김 여사와 정훈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정훈도 오 여사와 서빈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최정훈입니다.”
정훈이 인사를 하자 순간 서빈은 깜짝 놀랐다. 정확한 발음과 안정된 음색으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상당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그가 조금은 달라 보였다.
정훈은 서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빈은 거만한 표정으로 정훈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이서빈입니다.”
그때 오 여사가 테이블 아래로 서빈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으, 짜증 나.’
서빈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서빈의 마음을 모르는지 오 여사는 김 여사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애들은 얘기하라고 하고 우리는 좋은 데 가서 식사할까요? 만난 지도 오래됐는데.”
“그럽시다. 정훈아, 엄마 먼저 갈게.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
서빈과 정훈은 커피숍을 나가는 오 여사와 김 여사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후 서빈과 정훈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서빈은 어색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훈은 뭔 자신감인지 표정이 너무나 당당했다. 당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빈은 정훈을 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 그만 일어날게요.”
서빈은 자신이 그렇게 나오면 정훈이 귀찮게 질척거릴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네?”
“조심히 가시라고요.”
“오늘 나한테 차인 거 쪼르르 얘기하는 거 아니죠?”
“차여요? 누가요?”
“정훈 씨요.”
“내가요?”
“아니면 말고요.”
서빈은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필요도 못 느꼈다. 정훈은 서빈을 보며 다정하게 씩 웃었다.
‘아, 또 쟤 나 좋아하네.’
서빈은 정훈이 자신을 엄청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제가요. 이런 자리에 나올 여유가 없어서 그래요. 정훈 씨 맘에 안 든 게 아니고요.”
“전 서빈 씨 사진보다 별로여서 좀 실망했어요.”
“뭐라고요?”
서빈은 정훈이 무례하게 굴자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저는 예쁘지 않은 건 참을 수 있어도 무례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잘 못 참겠더라고요. 오늘 서빈 씨 행동을 보니 서빈 씨가 안 예뻐 보여요. 그럼 제가 한 충고 잘 기억해서 다음번엔 선 잘 보세요. 그럼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정훈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서빈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본 후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커피숍을 나가버렸다.
“어,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뭐 저런 재수 없는 인간이 다 있어.”
서빈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자신을 이렇게 차버린 남자는 그동안 도하 빼고 없었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를 통 알 수 없었다.
요즘 왜 이리도 되는 일이 없는지 기가 찼다. 원래의 대본대로라면 자신이 먼저 이 커피숍을 당당히 빠져나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저 남자는 당당해도 너무 당당했다. 당당했지만 거만하지 않고 무언가 모르게 자신에 차 있었다.
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눈치를 보며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누군가 아까 이 상황을 봤다면 너무 창피할 것 같았다.
서빈은 주변을 살피다가 얼른 택시를 잡아탔다.
******
소명을 아파트에 내려 주고 도하는 곧바로 회사로 향했다. 오늘은 조금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운전도 오래 하고 체력 쓸 일이 많았지만, 도하는 신기하게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몸도 가볍고 기분도 상쾌했다.
요 며칠 잠잠한 아버지가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또다시 어려운 상황이 와도 견디리라 마음먹었다. 소명을 만나고 나서 그는 한층 더 어른스러워졌다.
도하는 곧 있으면 SD 랜드 준공식이 열려서 준공식 준비에 한창 바빴다. SD 랜드는 도하가 심혈을 기울인 그의 숙원 사업이었다.
한편 도하가 회사에 들어와 밀린 업무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차 회장은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자기 아들이어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하는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했다.
그에게는 도하가 늘 자랑이었다.
오늘 도하를 불러 잔소리를 퍼붓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 퇴근 준비를 했다.
우선 SD 랜드 준공식을 마무리하고 그 이후에 다시 해결을 볼 참이었다.
******
도하가 일에 한창 집중하고 있는 타이밍에 멀리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렸다.
이 비서도 먼저 퇴근시켰고 올 사람이 없어서 도하는 궁금한 맘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하얀색 투피스를 입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도하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걸어오는 사람이 서빈이라는 걸 알고 표정이 굳어졌다.
서빈은 오늘따라 다른 사람 같았다.
예전의 옷차림도 아니고 머리 스타일도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서빈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하를 바라보았다.
도하는 그런 서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서류를 보며 일에 집중했다.
서빈은 일에 몰두하는 도하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었다.
그런 자신의 감정이 한심하고 답답하면서도 자신의 마음 안에는 도하가 굳게 자리 잡고서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시하는 도하의 행동에 너무 슬퍼졌다.
서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도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 나 좀 봐. 오빠한테 예쁜 모습 보이고 싶어서 이렇게 입고 왔어. 나 안 예뻐?”
도하는 서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어떻게 들어왔어? 여기 네가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니야.”
“오빠, 약혼녀라고 말하고 들어왔어. 왜 안 돼? 오빠? 나 사랑했었잖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던 도하가 서빈을 무섭게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니, 난 너 사랑 안 했어.”
“뭐? 우리 좋았잖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서빈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명 씨 만나고 알게 됐어. 너랑은 비교도 안 된다는 걸. 나 요즘 너무 행복해. 네가 나한테 준 상처가 기억이 하나도 안 날 만큼.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려. 너도 나 사랑하는 거 아니야. 집착이야. 넌 내가 다른 사람 사랑하는 게 열 받는 거야. 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도하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슈트 재킷을 넣어둔 스타일러 문을 열었다.
“오빠…….”
도하의 말에 서빈은 너무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 있었다.
도하가 슈트 재킷을 들고 나가려고 하자 서빈의 그의 팔목을 잡았다.
그녀의 분노에 찬 눈동자 아래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나는…… 우리 좋았던 때, 그때 진심이었어. 그리고 오빠 아직도 사랑하고.”
“이거 놔.”
“오빠, 진짜 나한테 이런 거 후회 안 하지?”
도하는 자기 팔목을 잡은 서빈의 손을 다른 손으로 빼내고 차갑게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서빈은 도하가 나간 빈 사무실에 혼자 서서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았다.
“너 보여주려고 이렇게 달려왔는데…….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가져.”
서빈은 날 선 표정으로 이를 악다물었다.
“두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