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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사랑해 (67/101)


제67화 사랑해
2023.02.20.


도하는 자신이 변한 줄도 모른 채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어둡고 차가웠던 그의 얼굴은 이제 생기가 넘치고 밝은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 비서는 새삼 깨달았다.

이런 도하의 모습이 흐뭇해 이 비서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뒷자리에서 도하가 입을 열었다.


“준공식 준비는 잘되고 있는 거죠?”

“네. 대표님.”

도하는 SD 랜드 준공식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소명이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일에 몰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회사에 도착했고 도하는 빠르고 경쾌한 걸음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자리에 앉아 자신의 업무에 집중했다.

차 회장은 도하가 회사에 왔다는 연락을 받고 대표실에 아무 연락 없이 방문했다.

대표실의 비서실 직원들은 차 회장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인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하의 방은 전면 창으로 되어 있고 필요시 블라인드를 사용하는 구조여서 차 회장은 도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비서실 직원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들이 열심히 일하느라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걸 보고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도하를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잔소리하게 될 것 같았다.

그 여자와 같이 지내고 있는 도하의 모습은 깔끔하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와이셔츠도 잘 다려져 있었고 얼굴도 반들반들 윤이 나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차 회장은 준공식이 끝나면 그때 다시 도하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차 회장은 도하가 여자한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일을 소홀히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자신의 걱정이 기우임을 알게 되었다.

차 회장은 점점 도하의 마음을 뺏은 홍소명이라는 여자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잠시 도하를 쳐다보다 이내 자리를 떴다.

이 비서는 차 회장이 도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고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도하를 못마땅해 하고는 있지만 그가 얼마나 도하를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도하는 차 회장이 다녀간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그때 이 비서가 도하의 방에 들어와서 말했다.


“마케팅부 부장님 오셨습니다.”

“네.”

부장은 들어와서 정중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사전 야외 행사하고 그 후 준공식 파티가 있을 예정이고 식순은 기재되어 있습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네, 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도하는 부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부장은 생전 처음 도하와 악수를 해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 가득 냉기를 머금고 다니던 그가 악수를 청하다니 부장은 놀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기 손을 도하에게 내밀었다.


“끝까지 행사 잘 치를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네, 대표님.”

부장은 도하에게 인사를 하고 기분 좋은 얼굴로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부장이 나가자 이 비서가 들어와 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아까 회장님 다녀가셨습니다.”

이 비서의 말에 도하는 서류를 보고 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요?”

“네.”

“근데 왜 안 들어오시고.”

“대표님 일하시는 거 보고 가셨습니다.”

“그래요…….”

도하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만 갔다는 사실에 놀랐다. 분명 또 언짢아하며 목소리를 높이고도 남았을 텐데.

도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 소명 씨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도하는 분명히 아버지도 소명을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도하는 어떤 사람도 소명을 싫어할 수는 없을 거로 생각했다. 소명은 분명히 그런 힘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를 알면 알수록 그는 그녀가 더 좋아졌다.

그녀를 만난 건 그의 인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하는 그녀라는 끈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소명을 생각하니 또 소명이 그리워졌다. 한시라도 빨리 업무를 끝내야 소명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그는 점심시간이 온 줄도 모른 채 일에 집중했다.


 

******

서빈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오 여사랑 부딪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오 여사는 그새를 못 참고 서빈을 찾아 이층으로 올라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서빈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빈아, 벌써 자는 거야?”

“아니, 피곤해서 자려고.”

“서빈아, 정훈이가 일이 바빠서 먼저 갔다는데 왜 엄마한테 말 안 해?”

오 여사는 서빈의 표정을 살피며 어떻게든 다시 정훈과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 안달을 부렸다.


“뭐? 일이 바쁘다고?”

“어.”

“하아…….”

“서빈아, 엄마는 정훈이 마음에 들어. 예의 바르지, 능력 있지, 똑똑하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정훈이 바빠서 그런 거니까 한 번 다시 자리 마련해볼게.”

“아우, 엄마!!”

서빈은 오 여사가 답답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솔직히 말할까?”

“어?”

“나 보고 싸가지 없어서 실망했다고 앞으로 선볼 때는 그러지 말래.”

“뭐?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그래도 또 만날까? 다시는 나한테 남자 만나라고 하지 마. 나 혼자 살 거니까.”

“서빈아…….”

“나가.”

서빈은 너무 화가 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서빈아, 미안해. 엄마는 너…….”

“또 날 위해서라고? 그래서 미국도 보낸 거고? 어?”

“서빈아…….”

“나가라고.”

서빈은 화가 나서 이제는 엄마도 꼴 보기가 싫었다.

오 여사는 더 이상 서빈을 건드리면 안 되겠다 싶어 방에서 나왔다.


“진짜. 하.”

딸이 그런 꼴을 당했다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하건대 서빈이 정훈을 향해 어떤 기분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서빈이를 어떻게 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다음 날 아침 오 여사는 서빈을 깨우고 오랜만에 온 가족이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표정이 좋지 않은 서빈을 보며 말했다.


“서빈아, 어디 아파?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아니, 안 아파.”

“잘 먹어야지.”

이 회장은 하나밖에 없는 딸의 표정이 좋지 않자 속이 상했다.

식사를 하다가 이 회장이 오 여사를 보며 말했다.


“차 회장네 SD 랜드 준공식 가야 하니까 준비해요.”

“네.”

오 여사는 솔직히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차 회장과 오랜 친분이 있어서 아무리 서빈이 일 때문에 껄끄럽다고 해도 만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그때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젓가락질만 해대던 서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준공식?”

서빈이 놀라 묻자 이 회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오지 마.”

“왜?”

“안 불편하겠어?”

“내가 뭐가 불편해? 아빠 나 창피해?”

서빈이 따져 묻자 이 회장은 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딸이 얼마나 아빠의 자랑인데.”

“나 갈 거야. 꼭.”

오 여사는 서빈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빈은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빈아, 왜 일어나?”

“다 먹었어.”

서빈은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 서빈을 오 여사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하에 대한 맘을 왜 이리도 못 버리고 매달리는지, 자신의 딸이 가엽기도 안타깝기도 답답하기도 했다. 크게 혼을 내서라도 해결 난다면 그러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닌 자기 딸의 인생에 언제까지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답답한 게 자식 농사라면 두 번 다시 짓고 싶지 않았다.

******

도하는 밤늦게까지 일하고 소명의 집에 도착했다. 아까 소명에게 먼저 자라고 전화 통화를 해서 혹시라도 소명이 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집 안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현관 앞에 소명이 서 있었다.

놀란 도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해맑게 그를 보며 활짝 웃는데,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팼다.

살짝 웃을 때 들어가지 않는 보조개는 그녀가 활짝 웃을 때, 진짜 기쁠 때만 나타나는 귀한 존재였다.

그녀의 보조개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그를 향해 자신의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아……. 아.”

자신도 모르게 도하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예쁜 나의 소명이.’

그 역시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쏙 안았다.

두 사람은 잠시 이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항상 불 꺼진 집에 혼자 돌아왔는데……. 오늘은, 그리고 앞으로도 도하는 절대 혼자가 아니었다.


“소명아, 사랑해.”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소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저 진심이 뚝 하고 튀어나왔다.

그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나도 사랑해요.”

“왜 아직 안 잤어요?”

“도하 씨 안 와서 잠이 안 와요.”

“고마워요. 기다려줘서.”

어쩜 그는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그녀는 이 순간의 자신의 머릿속에 꼭꼭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포옹을 풀고 도하의 얼굴을 바라본 소명은 깜짝 놀랐다.


“도하 씨, 눈이 빨개요. 피곤한가 봐요.”

“아니, 안 피곤한데요. 이렇게 기운이 팔팔한데요.”

도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안으로 꺾으며 근육을 자랑하는 시늉을 했고 소명은 그를 보며 살짝 웃었다.


‘어……. 어떡해? 또 구경했어.’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그의 몸매를 구경하게 되는 자신이 조금 웃겼다. 도하는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다정하게 말했다.


“소명 씨?”

“네?”

“SD 랜드 내일모레 준공식이에요.”

“정말요? 너무 잘 됐어요. 도하 씨 진짜 고생 많았어요.”

“소명 씨? 준공식에 와 줄래요?”

도하는 소명의 생각을 몰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공식에 제가 가도 될까요? 회장님도 오실 테고 도하 씨한테 여러모로 피해가 갈까 봐.”

“소명 씨만 괜찮다면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도하 씨…….”

소명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사실 그의 준공식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가 SD 랜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를 꼭 축하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맞는지, 자신 때문에 도하에게 어떤 불이익이 가기라도 할까봐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 소명의 마음을 알기에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소명 씨가 꼭 같이 와줬으면 좋겠어요. 소명 씨가 와서 절대 피해 보고 그런 자리 아니에요. 우리 부딪혀요. 소명 씨는 내 뒤에 숨어요. 제가 다 책임질게요.”

“도하 씨, 자꾸 두려워요. 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도하 씨가 걱정돼서.”

도하는 진심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소명 씨, 어떻게 되면 절대 안 돼요. 나 믿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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