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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무슨 일이든 감당하리라 (69/101)


제69화 무슨 일이든 감당하리라
2023.02.27.



 
서빈이 나가버리자 오 여사는 허탈한 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새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어쩌려고 그러니? 너 정말…….’

오 여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어마어마한 재력에 능력 있고 다정한 남편과 별 탈 없이 행복했었다.

서빈의 문제를 알기 전까지는 그냥 오냐오냐 키운 딸이 조금 버릇이 없다는 걱정 빼고는 다른 고민은 없었다.

하지만 서빈이 도하와 사귀는 사이였고, 사귀는 도중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도하의 아버지인 차 회장의 입을 통해 듣고 나서는 너무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서빈을 밖에 못 나가게도 해보고 선 자리를 마련해서 다른 사람과 만나서 정신을 좀 차리길 바랐지만 하나도 그녀의 뜻대로 해결되는 게 없었다.

그녀는 서빈이 왜 하필 준공식에 간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빈의 성격상 그냥 갈 리가 없었다. 오 여사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서빈 때문에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입에서는 연신 한숨만이 새어 나왔다.

서빈은 밖으로 나와 김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나와요.”

전화를 끊고 신경질이 잔뜩 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 김 기사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왔다.

김 기사가 내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서빈은 차 문을 열고 바로 뒷좌석에 타며 말했다.


“우선 숍으로 가요. 머리 좀 하게.”

“네, 아가씨.”

서빈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 세상에 자기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를 좋아했고, 남자 없인 못 살 것 같았지만 이제는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을 냉정하게 거부한 도하가 얄미웠고, 도하의 눈을 돌아가게 만든 그 여자는 더 싫었다.

둘이 잘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절대!

둘을 찢어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어느새 숍 앞에 도착한 서빈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직원이 안내하는 자리에 서빈이 앉고 얼마 뒤 헤어 디자이너가 나타나자 서빈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최대한 어울리는 스타일로 해줘요. 엄청 중요한 자리에 가야 하니까.”

“아, 네.”

서빈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네가 뭔데 나를 무시해? 너 행복한 꼴 못 봐. 차 도하 가만 안 둘 거야!’

서빈은 도하를 사랑하는 맘보다 증오하는 맘이 자꾸만 더 커졌다.

서빈은 머리를 조금 더 어두운 색깔로 바꾸고 세팅으로 파마해서 그녀의 얼굴과 너무 잘 어울렸다.

예전의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바뀐 자기 모습을 보고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서빈은 만족하는 얼굴로 숍을 나와 이번엔 백화점으로 가서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서빈은 조금이라도 맘에 들면 다 사들였다. 그녀는 옷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보였다.

김 기사는 손에 가득 들린 쇼핑백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빛이 안 좋아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도 서빈은 아랑곳없이 쇼핑에 몰두했다.

쇼핑을 마치고 트렁크에 쇼핑한 물건을 다 싣고 나서 김 기사는 팔이 아픈지 자기 손으로 팔을 여러 번 두드렸다.

그런 김 기사의 모습도 서빈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비쳤다.

서빈이 인상을 구기며 쳐다보자 김 기사는 얼른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굼뜨기는.”

서빈은 김 기사를 보며 이죽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하아…….”

김 기사는 그 순간 자기 주먹을 꽉 쥐고 짧을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운전석에 앉았다.


“빨리 좀.”

“네, 아가씨.”

김 기사는 얼른 시동을 켜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때 서빈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빈은 발신인을 확인하고 냅다 전화를 받았다.


“잘 돼 가고 있죠?”

[네. 열심히 조사하고 있습니다. 두 분이 백화점에 가셔서 쇼핑하시고.]

“하아, 그런 것까지 말해요? 쇼핑?”

[커플링을 나누어 끼셨습니다.]

‘커플링? 참나.’

서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히 소명이 준공식에 나타나리라는 걸.


‘어떻게 망신을 줘야 속이 시원하지?’

“그 여자 전남편 전화번호 보내요.”

[네?]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심부름센터 소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녀의 전남편은 이혼을 하고도 그 여자에게 매달린다고 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곧바로 지성의 전화번호가 그녀의 핸드폰으로 들어왔다. 서빈은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지나간 후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지성 씨?”


“누구시죠?”

“저 기억하시나요? 차 도하 대표 약혼녀.”

“아…… 네. 무슨 일로?”

갑자기 받은 전화에 차 도하의 얘기가 나와 당황스러웠다.


“우리 같은 입장인 것 같은 데 잠시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나요? 안지성 씨도 전 부인 못 잊으신 거고 저도 전 남친 못 잊고 있고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알고?”

“어디서 볼까요?”

갑작스러운 전화에 놀란 지성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에 들려오는 서빈의 음성은 너무도 당당하고 거만했다.

하지만 소명이와 다시 잘 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일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한동안 집 안에 처박혀 나가지 않던 지성이 갑자기 씻고 외출 준비를 하는 것에 놀라 정 여사는 아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성아, 어디 가니?”

“응. 잠깐만 나갔다 올게.”

“그래. 조심하고.”

“알았어.”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 서두르는 모습에 무슨 일인지 너무 궁금해졌다. 정 여사는 그래도 아들이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루라도 빨리 다시 새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폐인처럼 사는 모습을 보는 어미의 심정은 비참했다.

가슴이 쓰라리고 무언가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고 사는 기분이었다. 정 여사는 지성이 나간 빈자리를 바라보며 작은 희망을 품었다.

지성과 전화를 끊은 서빈도 김 기사에 말했다.


“삼성동으로 가주세요.”

“네.”

김 기사는 서빈이 뭔가 큰일을 꾸미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김 기사가 서빈의 눈치를 보며 운전을 하는데 서빈이 차갑게 말을 뱉었다.


“오늘 일 엄마한테 말 하면 알죠?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네……. 아가씨.”

서빈은 입 무거운 김 기사를 믿었지만 다시 한번 주의를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김 기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운전에 집중했다.

******

도하는 새로 산 슈트를 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넘기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도하의 모습은 너무나 멋있어서 빛이 났다.

그는 거울을 보며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오늘은 그가 그토록 열정을 다 바친 SD 랜드의 준공식 날이었다.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다. 공사를 시작할 때는 그는 혼자였고 우울했지만, 공사가 끝난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소명이 함께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너무 행복했다.

소명을 준공식장에 데리고 오리라고 상상도 못 할 테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없으면 안 되는지 차 회장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하는 도발일 수도 있지만 그는 이 길을 택한 일에 결코 후회는 없었다.

거울을 보며 한 번 더 다짐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넥타이를 집으려는 순간 소명이 등 뒤에서 그를 살짝 껴안았다.

그는 뒤돌아 소명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소명 씨…….”

“오늘 너무너무 너무 멋있어요.”

항상 차분한 소명이 오늘은 들떠 보였다. 어떨 땐 지적이고 또 어떨 때는 귀여웠다. 그녀를 볼 때마다 매번 다른 매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

소명이 손을 풀고 테이블에 놓인 넥타이를 가져와 그의 앞에 선 후 그의 목에 넥타이를 걸고 매 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 또 도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쿵쿵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온통 넥타이 매는 일에 집중한 듯 보였지만 도하의 시선은 오직 소명을 향해 있었다.

그녀가 넥타이를 다 매고 기쁜 듯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번지며 소리쳤다.


“됐다.”

그 순간 도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도하의 입술에 놀란 소명은 눈이 커졌지만 이내 눈을 스르르 감고 그의 입술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도하가 그녀에게 입맞춤할 때 그녀의 얼굴을 감싸주고 또 그녀의 몸을 꼭 안아줄 때 너무 좋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해졌다.

입맞춤이 끝나고 도하는 아쉬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이따 소명 씨 태우러 올 거예요. 그 차 타고 오면 돼요.”

“네.”

“오늘 긴장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행사 끝나면 계속 나랑 같이 있을 거니까.”

도하는 끝까지 소명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소명도 그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도하는 소명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소명 씨, 좀 이따가 만나요.”

그는 가면서도 소명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다정해도 너무 다정해.’

도하가 왜 화초를 좋아하는지 소명은 알 것 같았다. 그는 한없이 사랑을 주고 보살펴주고 끝없는 애정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정의로웠다.

그를 향한 믿음과 신뢰는 점점 더 깊어졌다. 소명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어 보았다.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소명은 이 기분 좋은 떨림이 그녀의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진짜 사랑이었다.

도하가 가고 나서 그녀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제 도하가 사준 흰색 블라우스와 베이지색 스커트를 입었다.

소명이 입으니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어 내렸다.

거울 속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소명의 모습이 비쳤다. 예전의 우울하고 어두운 홍소명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반짝거리는 그녀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정성스레 화장했다. 막상 준공식에 가려니 너무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도하만 그녀 옆에 있어 준다면 무슨 일이든 감당하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에게 속삭였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명은 핸드백을 챙기고 하이힐을 신고 당당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당차고 활기차 보였다.


 
주차장에서 차를 대기하고 있는 은현은 멀리서 소명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차에서 내렸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녀는 이제 진짜 경호원처럼 보였다. 은현은 검은색 정장이 꽤 잘 어울렸다.

소명이 거의 다 오자 은현은 정중하게 소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은현을 본 소명도 그녀를 보며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소명은 정말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공식에 가려고 한껏 꾸민 소명의 모습은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 아름다웠다.

은현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소명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 주었고 소명은 차에 타면서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소명을 태운 기사가 예의 바르게 말했고 곧 소명이 탄 차는 준공식장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명은 긴장됐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수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할 수 있어. 긴장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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