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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네 잘못 아니야 (75/101)


제75화 네 잘못 아니야
2023.03.20.



 
지금 서빈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린 느낌이었다.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엉켜서 좌절감이 몰려왔다.

가슴에 불이 있어서 자꾸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동안 망설였던 일을 치고야 말았다.


‘왜 나만 불행해야 하는데!’

서빈은 가슴을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수화기 너머로 심부름센터 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서빈은 이 기분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김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놓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그는 대기를 하고 있었다.

서빈은 김 기사를 쏘아보며 차에 올라탔고, 그는 서빈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 채 운전석에 앉았다.


“우선 달려요.”

“네.”

김 기사는 서빈의 표정이 평상시보다 더 가라앉아 있어 몹시 불안했다. 저번에도 서빈이 무언가 일을 꾸미는 것 같아서 너무 불안했는데 오늘 예감은 더 안 좋았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계속 씩씩거렸다.

서빈이 화가 많이 나 보여 김 기사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또 어떤 트집을 잡아 자신을 괴롭힐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서빈은 소명을 찾아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선포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하가 소명과 꼭 붙어 있을 게 뻔했기 때문에 소명을 찾아가지 못해서 아쉬움을 삭였다.

서빈은 소명이 도하가 대표직을 맡고 있는 SS 물산의 설계팀장의 아내였고, 도하와 소명은 같은 아파트 같은 층의 이웃집에서 살고 있다가 서로 호감이 생긴 사이라는 내용을 파파라치로 유명한 잡지사에 보냈다.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고라고 자부하는 SS 물산 차기 후계자가 이혼녀를 사귄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반응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서빈은 차에 앉아서 인상을 쓰다가 갑자기 키득거렸다. 그녀의 미소가 너무 교활해서 김 기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서빈은 김 기사에게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럽으로 가요. 오늘 좀 축하할 일이 있네요.”

“아……. 네.”

김 기사는 서빈이 자주 가는 클럽을 향해 차를 몰았다.

******

소명은 옷장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며 서 있었다. 오늘 무슨 옷을 입고 갈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도하의 본가에 갈 생각을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번에 만남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도하는 벌써 씻고 와서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소명 씨?”

“아……. 네.”

“옷 입는 거 고민돼요?”

도하가 옷장 앞에 서 있는 소명이 귀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네. 좀. 오늘은 많이 고민되네요.”

“소명 씨는 어떤 옷 입어도 다 잘 어울려요.”

“그러지 말고 골라줄래요?”

“음…….”

도하는 소명의 옷장 안을 들여다보다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를 골랐다.


“이거.”

“이건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요?”

“그 위에 재킷 입으면 좋을 것 같아요.”

도하의 패션 감각을 믿고 소명은 그가 추천해준 옷을 입기로 했다. 오늘따라 소명의 준비 시간이 길어졌다. 오늘 저녁 식사는 그만큼 그녀에게 중요한 자리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소명은 여성스러우면서 세련되어 보였다.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잘 어울려요. 예뻐요.”

소명은 도하의 말에 떨리는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두 사람은 도하의 차를 타고 그의 본가를 향해 출발했다. 도하의 차 안에 유칼립투스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화초였다. 도하의 어머님께 꼭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가져온 것이었다.

소명은 도하의 어머니가 자신의 선물을 좋아하기를 바라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본가를 향해 달려갔다.

얼마 뒤 본가에 도착해서 차를 대고 두 사람은 현관으로 들어갔다.

현관 앞에는 은영이 도하와 소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영은 도저히 도하의 어머니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동안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하의 손에 들린 화분을 보고 은영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게 뭐야?”

“소명 씨가 가드닝 취미가 있어서. 엄마 주고 싶다고 가져왔어.”

“정말? 고마워. 근데 내가 키우면 잘 죽어서 걱정이 되네.”

소명은 은영을 보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


“햇빛 들어오는 곳에 두시면 좋아요. 화분에 흙이 말랐을 때 물은 주시면 되고요. 공기도 정화시켜줘요.”

“소명아, 정말 고마워. 진짜. 어서 들어와.”

은영은 차 회장이 직접 소명과 도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소명의 깜짝 선물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은영의 자신의 침실에 유칼립투스 화분을 얼른 놓고 나와서 소명과 도하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아버지 모시고 올게. 서재에 계셔.”

“네.”

이윽고 차 회장이 다이닝룸으로 왔고 도하와 소명은 자리에서 일어서 차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차 회장은 어색한 표정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어, 음.”

차 회장은 헛기침을 하다가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요. 식사합시다.”

소명이 긴장해서 표정이 경직되자 도하는 테이블 아래에 있는 소명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깜짝 놀란 소명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옆에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차 회장은 도하가 소명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표정을 보고 생각했다.

항상 잘 웃지 않았던 아들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도하가 소명을 많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많이 들어요.”

차 회장이 소명을 보며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은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잘 먹겠습니다.”

은영은 식탁에 놓여 있던 갈비를 집어 소명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많이 먹어.”

“네. 고맙습니다.”

소명은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이렇게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봐주고 신경 써준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저한테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갑작스러운 소명의 인사에 차 회장과 은영이 놀란 눈으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저 많이 부족하지만 노력할게요.”

차 회장은 소명을 바라보았다. 소명은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도하 잘 부탁해요.”

“네?”

차 회장은 소명은 보며 처음으로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맘고생 시킨 거 미안해요. 도하가 좋아하는 사람이니 소명 씨도 이제 우리 가족이지.”

차 회장의 따뜻한 말에 소명은 가슴이 울컥거렸다.


‘안 울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소명에게 은영이 다가가 꼭 안아주며 말했다.


“소명아, 울지 마. 이젠 우리 웃을 일만 있을 거야. 고마워. 난 네가 우리 식구 된 거 선물 같아. 너무 좋다. 진짜.”

“어머니, 너무 감사해요.”

지성과 결혼 생활하면서 이렇게 따뜻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은영은 정 여사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소명은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여기에 오기 전에 그렇게 많이 긴장했었는데 믿어주시는 만큼 정말 도하와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화기애애하게 식사하고 있는데 차 회장의 핸드폰과 도하의 핸드폰이 동시에 요란하게 울려댔다.

도하와 차 회장을 핸드폰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빅이슈에 대표님 기사가 났습니다.”

“빅이슈요?”

“우선 들어가서 기사 확인해 보세요. 전 기사 얼른 막겠습니다.”

“하아.”

이 비서의 전화를 끊은 도하는 어두운 표정으로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검색했다.

곧 헤드라인이 도하의 눈에 들어왔다.

[SS 물산 차기 회장 차도하 대표이사 이혼녀와 열애]

제목부터가 너무 자극적이었고, 내용은 허위 사실로 채워져 있었다. 도하는 자신만 들먹인 게 아니라 소명까지 끌어들인 기사에 분노가 일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기사가.”

도하는 너무 어이가 없이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명은 도하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도하 씨? 무슨 일이에요.”

“아니……. 그게.”

“말해줘요.”

그녀의 간절한 눈빛 사이로 단호함이 비쳤다.


“저도 알아야 하잖아요.”

“우리 기사가 났어요. 소명 씨,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소명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핸드폰으로 자기 기사를 검색했다. 그 기사를 보고 입이 떡 벌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명은 자신 때문에 도하가 얼마나 큰 피해를 볼지 너무나 두려워졌다.

지성과 이혼한 건 백번 만 번 잘한 짓이었지만 자신의 과거로 인해 그녀가 몹시 사랑하는 도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시리고 아파져 왔다.


‘그를 위한 선택은 무엇일까? 그를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건 내 욕심이 아닐까?’

도하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소명의 표정이 창백해지자 옆에 있던 은영이 물을 따라 소명에게 건네주었다.


“소명아? 괜찮아?”

“네. 감사합니다.”

차 회장 역시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아니 이런 거 하나 못 막고 뭐 했어?”

차 회장은 비서실장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 기사 당장 접어. 당장.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불법 있나 확인하고 고소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소명은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도하는 소명에게 다가가 말했다.


“소명 씨,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떳떳해요. 내가 다 해결할게요.”

도하가 말을 하는데 소명은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소명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자 차 회장은 소명을 보며 말했다.

차 회장이 소명의 바라보자 소명은 떨리는 눈빛으로 차 회장을 바라보았다.


“네 잘못 아니다.”

“네?”

 

  


“아무 걱정하지 마요. 내가 다 해결하지.”

“너무 죄송해서…….”

소명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버렸다.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하가 얼른 소명에게 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소명 씨? 괜찮아요?”

“다 저 때문에…….”

차 회장은 소명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소리 이제 하지 마라. 누구 때문에가 어디 있니? 이렇게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일 꾸민 인간을 찾아내야지.”

차 회장은 분노에 찬 얼굴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소명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는 새로운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둘러싸여 있었다.

도하와 은영은 소명을 가운데에 두고 그녀를 지켜보며 함께 해주었다.

도하는 소명과 자신을 괴롭히는 추측성 기사를 내게 만든 인간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다짐했다.

이렇게 반짝거리는 소명의 눈에 눈물 나게 만든 인간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명 씨는 내가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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