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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내 앞에 나타난 운명 (79/101)


제79화 내 앞에 나타난 운명
2023.04.03.



 
다음 날 도하는 업무를 마치고 본가로 향했다. 차 회장은 거실에서 은영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도하를 본 차 회장과 은영은 놀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도하야?”

놀란 것도 잠시 아들을 본 반가움에 은영의 입가에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저녁은 먹었어?”

“그것보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차 회장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들을 보며 말했다.


“우선 앉아라.”

“네.”

은영은 도하를 보며 상냥하게 물었다.


“그럼 차라도 줄까?”

“아니. 괜찮아.”

차 회장은 도하를 바라보며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도하는 심각한 표정으로 차 회장을 보며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그리 심각해? 말해봐.”

“기자회견을 할 생각입니다.”

“기자회견?”

“반박 보도문 냈잖아.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될 것 같은데.”

“소명 씨, 잘못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저한테 미안해하는 것도 마음 아프고 이번에 확실히 다 밝히고 소명 씨랑 떳떳하게 결혼하고 싶습니다.”

“결혼?”

결혼이라는 말을 들은 차 회장의 표정이 일순간 굳는 듯했다.

하지만 도하는 굽히지 않은 채 차 회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저 하루라도 빨리 소명 씨랑 식 올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소명 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

아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차 회장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쩜 은영과 같이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던 자신의 젊었을 때 모습을 이리도 닮았는지 신기하기도, 아들의 성장이 대견하기도 했다.

차 회장은 또 한편으로는 남자가 된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는 소명이라면 도하가 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게 도와줄 수 있는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겪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반대한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다시금 알게 해준 존재였다.

조건만 보고 서빈과 도하를 맺어주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도하가 소명을 만나 사랑을 한 것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연 순간 이미 소명은 SS 물산의 사람이었다.

차 회장이 도하를 보고 웃자 도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좋아?”

“네?”

옆에서 은영도 해맑게 웃으며 차 회장의 말을 거들었다.


“당신도 나한테 저랬는데……. 부전자전이네요.”

“그러네.”

차 회장과 은영은 외동아들이 귀엽다는 듯 웃음보가 터졌다.


“도하야.”

“네. 아버지.”

“아버지는 이미 소명이 내 며느리로 인정했다. 나도 하루빨리 우리 소명이가 서류상으로도 우리 가족이 되면 좋겠다. 이번 서빈이 일로 깨달은 게 많아. 돈이 어디 인생의 전부니? 사람이 잘났고 못난 게 어디 있어. 난 소명이 아주 마음에 든다.”

“저도요. 여보. 둘이 너무 사랑하는 게 보이니까 엄마도 너무 좋아. 엄마는 아들이 행복하면 그만이야.”

“고맙습니다. 아버지. 엄마.”

“기자회견하고 날짜도 빨리 잡자.”

그 말을 들은 도하의 입이 귀에 걸렸다. 차 회장과 은영은 계속 도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도하 입이 귀에 걸렸네. 그렇게 좋아?”

“네. 저 그럼 가볼게요.”

“벌써 가?”

은영은 아쉬운 듯 아들을 붙잡았다.


“더 있다 가. 도하야. 엄마는 아들 와서 너무 좋다.”

“소명 씨 기다리고 있어서 가볼게요. 쉬세요.”

“그래.”

차 회장은 도하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도하도 은영과 차 회장을 보며 인사를 하고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빠져나왔다.

그는 아버지와 엄마가 소명을 좋아해 줘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과 빨리 가서 허락받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심장이 벌렁거렸다.

도하는 시동을 걸면서도 연신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그가 그토록 원하는 일이 곧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꼭 꿈만 같았다.

그는 너무 행복했다. 그녀를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도하가 돌아간 거실에 앉아 은영은 차 회장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여보, 우리 아들 잘 키웠지요?”

“그래. 우리 도하 내 아들이지만 정말 멋있는 구석이 많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

한편 서빈의 기사가 뉴스에도 보도되자 정한 그룹은 난리가 났다. 주가도 폭락하고 여론도 안 좋아졌다.

서빈의 갑질이 온 국민의 관심을 이끌었고 인터넷 게시판은 온통 서빈을 향한 분노의 글로 가득 찼다.

여론이 점점 악화하자 정한 그룹은 무언가 방법을 취해야 했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서빈의 아버지 이 회장이 책임을 지고 공개 사과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서빈의 문제로 주주총회까지 열리게 되었다.

주주총회에서 이 회장의 해임 건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었다. 서빈의 집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서빈의 뉴스를 본 오 여사는 큰 충격으로 몸이 더 안 좋아졌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운도 너무 없어서 결국 오 여사는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서빈은 자신을 사랑해준 엄마가 자신 때문에 병원 신세까지 지게 돼서 가슴이 찢어졌다.

덜컥 겁이 났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준 엄마가 만약 이 세상에 없다면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두려워졌다.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효도조차 하지 못했는데…….

서빈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 나 왜 이렇게 됐지? 엄마 이렇게 아프게 하고 아빠는 나 땜에 회장직 그만두게 생겼고. 흑흑 엄마, 아프지 마. 엄마 없으면 나도 못 살아.”

서빈이 잠든 오 여사를 붙잡고 오열하자 오 여사는 눈을 뜨고 서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빈아, 잘못을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해.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해.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너무 잘못했어. 엄마는 서빈이 믿어. 끝까지 너 포기 안 해. 세상 사람들이 다 포기해도 엄마는 그럴 수 없어. 넌 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니까. 엄마 치료 잘 받고 얼른 나을게. 서빈이 너도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자. 우리.”

“엄마……. 내가 너무 잘못했어.”

서빈은 오 여사를 안고 엉엉 울어댔다. 지나친 탐욕과 이기심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녀는 엄마가 한 말을 되새겼다.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였는지, 자신이 얼마나 사악하고 이기적이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힘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서빈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 사모님 어떠세요?”

그녀의 눈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서빈의 눈치를 보면서도 오 여사의 소식이 너무 궁금했다.

오 여사는 항상 자신에게 친절했고, 진심으로 대해준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 왔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 몸이 안 좋아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안 좋고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서빈에게 물어보게 된 것이었다.

서빈이 고함을 치든지 화를 내든지, 무슨 행동을 취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안 좋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서빈이 도우미에게 이렇게 친절히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서빈을 바라보았다.


“아줌마. 제가 그동안 정말 죄송했어요. 조사받으러 가기 전에 일부러 사과하는 거 아니고 저 진심으로 죄송해요.”

“아가씨…….”

서빈은 도우미 아주머니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한 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다시 시작하려고 한 걸음 떼고 보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낼 때는 그녀의 기분도 좋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왕이었다.


‘내가 뭐라고?’

그녀는 방금 자신을 바라보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눈빛을 보고 알게 되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달라졌다는 것을…….


‘위아래가 어디 있어? 인제 보니 내가 가장 밑바닥이야.’

서빈은 자기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흐느꼈다. 자꾸만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나 땜에 아빠까지…….’

‘왜 그랬니? 이서빈…….’

‘엄마, 아빠는 무슨 죄야?’

자신을 아무리 원망해도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한편 이 회장은 퇴근도 하지 않고 쓸쓸히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많은 것을 말하는 듯 여러 표정이 얼굴에 스쳐 갔다.

화난 것 같기도 하다가도 슬퍼 보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비서실장이 침울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데 쉽게 말을 꺼내기 힘든 눈치였다.


“말해봐. 무슨 얘기인지.”

이 회장의 목소리는 모든 걸 체념한 듯 힘없이 들렸다.


“회장님, 이번 정기 주주 총회에서 임시 주총이 열릴 것 같습니다. 회장직 교체 안건을 상정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아직 회장님 지분이 가장 많으시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최대한 움직여 보겠습니다.”

이 회장은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놔둬. 기자회견 일정 잡아놔.”

“네?”

“내가 물러날 때가 온 거 같군.”

“회장님, 그런 소리 마십시오. 우리 정한 그룹 회장님 없이 안 됩니다.”

“어차피 서빈이한테 물려줄 생각 없었고 자식 잘못 키운 벌 받아야지. 나도 이제 조금씩 지치는 것 같다. 고생했어. 최 실장.”

“회장님.”

이 회장은 일어나서 비서실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한편 도하는 소명에게 달려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서 꽃 한 다발을 샀다. 그녀에게 꽃 선물은 처음이라 더 긴장되었다.

소명이 좋아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설레는 맘으로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꽃다발을 든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왔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자 소명은 얼른 현관 앞에서 도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소명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매력 포인트 보조개가 볼 사이로 쏙하고 들어갔다.

도하도 그녀를 보며 활짝 웃으며 뒤에 감추었던 장미 꽃다발을 꺼내 그녀의 눈앞에 내밀며 말했다.


“짠.”

“어?”

장미꽃을 본 소명은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장미꽃?”

“꽃 선물 한 번도 못해준 것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못한 거 꽤 많네요.”

“고마워요.”

도하가 준 꽃다발을 받으며 소명은 활짝 웃었다. 오늘 도하의 깜짝 선물을 받을 소명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꽃은 정말 언제 받아도 행복한 거 같아요.”

소명은 꽃향기를 맡으며 즐거워했다.


 


“소명 씨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요. 매일 사줄까요?”

“아이……. 말만 들어도 고마워요.”

소명은 도하에게 다가가 그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녀의 기습 뽀뽀에 도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소명 씨?”

“네?”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 중에 어떤 것부터 들을래요?”

“네?”

한참을 망설이던 소명이 말했다.


“좋은 소식 듣고 나쁜 소식 듣는 게 더 낫겠네요.”

“좋은 소식은요.”

소명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도하의 입만 쳐다보았다.


“아버지랑 엄마가 우리 결혼 허락하셨어요.”

“정말요?”

소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너무 감사해요. 너무…….”

“소명 씨……. 나쁜 소식은요.”

“나쁜 소식이요?”

“결혼식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도하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소명을 바라보며 웃자 소명은 싱겁다는 듯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장난치지 마요. 놀랐잖아요.”

“나 장난 아닌데. 하루하루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다고요.”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다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도하도 소명을 꼭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도하 씨. 내 앞에 나타나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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