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5화 아무것도 모르면서 (85/101)


제85화 아무것도 모르면서
2023.04.24.


라희는 재윤이라는 남자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재윤에게 한 짓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그녀를 생각해주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다시는 재윤이만큼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재윤이 무서우리만큼 자신을 쳐 내지 않았다면 평생 쓰레기 같은 삶을 살면서 자기 잘못도 인지하지 못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라희는 재윤 때문에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마음속 깊이 자기 자신을 증오했는지 알게 되었다. 오늘 라희는 진정으로 재윤과 이별을 했다.

그를 잊지 못하겠지만 그의 행복을 진정으로 원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을 깊이 사랑해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본 적 없는 라희는 처음으로 재윤의 행복을 빌었다. 이렇게 기쁜 마음인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라희는 이제부터라도 달라지고 싶었다.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라희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

상견례를 마치고 얼마 후에 소명과 도하는 웨딩드레스를 고르러 웨딩드레스 전문 숍에 가기로 했다.

오늘은 왠지 소명보다 도하가 더 들떠 보였다. 그는 운전하는 내내 싱글벙글 텐션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소명은 그런 그가 너무 귀여웠다.


“도하 씨, 뭐가 그리 기분이 좋아요?”

소명이 도하를 보며 미소를 띤 채 묻자 도하가 신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오늘 소명 씨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볼 수 있잖아요. 요즘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나 모르겠어요.”

소명은 그의 대답을 듣고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마 후 웨딩드레스 숍에 도착하자 실장이 숍 현관 앞까지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명과 도하가 내리자 실장은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들어오시면 안내 시작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소명과 도하는 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드레스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신랑님은 이쪽에 앉아 계시면 드레스 입고 나오실 겁니다.”

실장의 안내를 받고 도하는 소파에 앉았고 실장은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님은 저 따라오시면 됩니다.”

실장의 말은 들은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도하 씨 저 갔다 올게요.”

“네.”

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왜 이러지?’

도하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그동안의 소명과의 일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첫 만남의 황당함과 화초를 파는 농원에서의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소명이 쓰러진 날까지……. 그는 병원에서의 그녀의 슬픈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이상하게 신경 쓰인 걸 사랑인지도 몰랐었는데……. 알면 알수록, 그녀에 대한 베일이 벗겨지면 벗겨질수록 그는 더 소명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많은 일이 지나간 후 지금 그와 소명은 웨딩드레스 숍 안에서 한 명은 신부로 또 한 명은 신랑의 이름으로 마주 서 있었다.

그는 소명을 만난 이후로 운명에 대해 믿게 되었다. 그에게 그녀는 운명이자 삶의 전부였다.

피팅룸 안에 들어간 소명이 나오기까지 긴장감은 멈추지 않았고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멀게만 느껴졌다.

어서 빨리 그녀가 나와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순간 커튼이 스르르 열렸다.

안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목 부분은 레이스로 가슴골 까지 파여 있고 나머지 부분은 도톰한 광택이 돋보이는 하얀 드레스였는데, 소명의 얼굴은 베일에 가려져 신비롭고 몽환적으로 보였다.

베일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도하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숨이 멎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본 어떤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

실장이 손으로 베일을 살며시 걷어 올리자 소명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가 쓴 왕관은 유난히 반짝거려 그녀의 하얀 얼굴을 살려주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청순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소명을 보고 도하가 아무 말이 없자 실장은 궁금한 듯 도하를 불렀다.


“신랑님?”

“…….”

그런 도하를 본 소명이 얼른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도하 씨.”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도하가 툭하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예쁘다.”

그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을 들은 소명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쏙 하고 패였다.

도하는 다시 한마디를 꺼냈다.


“우와.”

“괜찮아요?”

“네. 너무너무 예……뻐요.”

도하는 단 한순간도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나의 아내가 된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소명도 그와 함께 이 자리에 오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커튼이 열리기 전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궁금해졌다.

커튼이 열리는 순간 도하와 눈이 마주친 소명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보고 너무 놀라 눈이 커지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그는 요동하지 않고 오로지 눈에 세세히 그녀를 담는 듯했다.

그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그때 실장이 나와서 드레스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신부님의 목선을 살릴 수 있는 네크라인이 좀 깊게 파였고 레이스는 청순함을 살리게 디자인되었고 신부님 자체가 피부가 하야시고 아름다우셔서 이 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신랑님은 어떠세요?”

실장이 궁금한 듯 도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무 예쁘네요.”

실장은 도하를 보며 살짝 웃은 뒤 소명에게 말했다.


“신부님 다음 드레스 입어 보실 거예요.”

“네.”

도하는 소명이 다음번에는 어떤 드레스를 입고 나올지 너무 궁금하고 설레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였다.

그는 점점 다가오는 결혼식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

한편 소명의 결혼 소식을 들은 지성은 또 며칠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러다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이 찾아오는 건 아닌지 자신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왜 그때 하필 라희를 식당에서 만났는지, 왜 그의 눈에 라희가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한 소명에게 처절한 모욕과 능욕을 주며 그녀를 짓밟았는지. 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성은 후회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타투를 지우고 장모님을 찾아가고 소명의 집 주위를 맴돌았었다.

그는 그녀가 그리 쉽게 포기가 안 됐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지만 결국 소명은 이미 다른 사람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있는 지성을 보는 정 여사의 심정은 지옥과도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외동아들을 홀로 키우며 사랑을 주었는데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고 헤어진 전 부인을 잊지 못해 폐인 생활을 하는 아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아들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오늘은 반드시 아들과 담판을 짓겠다는 심정으로 방문을 확 열고 들어서니 지성은 한낮인데도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이 가여워서 계속 참다 참다 이제 한계점에 이른 정 여사는 지성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새파랗게 젊은 애가 뭔 청승이야? 말해봐. 안지성. 너 소명이 없으면 죽냐? 어? 딴 놈 좋다고 떠났는데. 인제 그만 잊어. 세상에 여자가 소명이뿐이야? 쌔고 쌘 게 여자야. 다시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결혼해서 애도 낳고. 엄마 손주 이 두 손에 한 번 안아 보는 게 소원이다.”

“나 평생 혼자 살 거야.”

“아니, 지성이 너 정말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 환장했어?”

“엄마도 앞으로 내 앞에서 여자 얘기하지 마.”

“지성아. 왜 그래. 소명이는 행복하게 잘 사는데 너만 왜 그래?”

“나 같은 놈이 무슨 연애고 결혼이야.”

지성은 우울한 표정으로 이불을 확 뒤집어썼다. 정 여사는 지성이 너무 걱정돼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애써 격앙된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며 지성을 달래기 시작했다.


“지성아, 새 출발해서 아이 낳으면 너도 생각이 달라질 거야. 엄마는 너 하나로 버텼어. 힘들어 죽고 싶다가도 네가 엄마 보고 방실방실 웃으면 얼마나 힘이 났는지 아니? 너도 이제 새 출발하고 다시 시작해야지.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엄마도 좀 힘들어서 그랬어. 아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가 뭘 몰라? 너랑 소명이 사이에 아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싹둑 인연이 끊어졌겠어. 다시 시작하자. 엄마가 얼마나 너 사람답게 사는 거 얼마나 바라는 줄 아니?”

”사람답게 사는 게 꼭 아이가 있어야 한대?”

지성은 덮었던 이불을 확 내리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정 여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아들이지만 오늘 지성의 눈빛은 너무도 차가웠다.


“엄마는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하아,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어떻게 내버려 두니? 아들이 폐인 생활을 하는데?”

“내가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서 그래. 엄마 제발.”

“뭐가 복잡해. 엄마한테 털어놔 봐. 지성아, 같이 해결해보자. 응?”

“하아, 됐어요.”

지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가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정 여사는 놀란 표정으로 지성의 뒤를 따라갔지만, 지성은 이미 대문 밖을 나간 뒤였다.

항상 말끔하고 귀티가 흐르던 잘생긴 지성은 온데간데없고 슬리퍼에 늘어난 티셔츠에 운동복바지 차림으로 밖으로 나온 지성의 외모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근처 작은 술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눈에선 눈물이 일렁거렸다.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술을 따랐다.


“하아…….”

그는 울기 싫은 듯 눈가를 매만지며 괴로워했다.


“넌 울 자격도 없는 놈이야.”

오늘처럼 자신이 싫은 날이 없었다.


“소명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엄마한테 구박받게 만들고……. 다 내 잘못인데도……. 바보같이.”

그는 눈을 감고 안타까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그는 소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끝까지 그녀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도하와 헤어지면 곧 소명과의 재회를 기다리면서…….

그는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타투를 지웠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가 찾아간 곳은 바로 비뇨의학과였다.

소명이 그토록 같이 검사 받아보자고 하던 그곳이 그는 정말 소름 끼치게 가기 싫었다.

그냥 노력하면 저절로 남들처럼 아이가 생길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노력해도 아이의 소식이 없었다. 한 해 두 해 지나갈수록 정 여사의 구박은 점점 더 심해졌고 소명도 지쳐 보였다.

결국 소명이 백기를 들고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자기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임신을 준비했었는데……. 그녀의 부탁을 안 들어준 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소명을 기다리는 동안 검사도 받고 운동도 하고 노력할 결심을 한 것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처음 오셨나요?”


“네.”


“여기 이름이랑 주소 좀 적어주세요.”


“네.”

 
지성은 긴장했는지 눈동자가 몹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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