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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죗값 (86/101)


제86화 죗값
2023.04.27.


비뇨기과에 처음 가 봐서 너무 어색했지만 그래도 소명을 위해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쓰고 간호사에게 내밀자 간호사가 지성을 보며 말했다.


“조금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네.”

지성은 소파로 가 앉아서 주변을 눈으로 쭉 훑어보았다. 혼자 비뇨의학과에 앉아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예전에 소명이 그렇게 같이 가 보자고 조를 때 왜 안 갔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노력했다면 그와 그녀의 사이에 예쁜 아가가 있을까? 그럼 나는 소명과 헤어지지 않았을까?’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끝까지 지성도 자기 잘못보다 운명을 들먹이며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다.


“하아…….”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아무것도 아닌 일 같은데 그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간호사가 지성의 이름을 불렀다.


“안지성 씨?”

“네.”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지성이 진료실 앞에 들어가니 의사가 지성을 보고 말했다.


“앉으세요.”

“네.”

“어떤 일로?”

“정자……. 검사를 좀.”

“아, 네. 그럼 간호사가 안내하는 방으로 가서 검사받고 오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성은 지금 이혼한 몸으로 정자 검사를 받으러 온 자신이 너무 웃겼다.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은 놓고 싶지 않았다.

지성은 간호사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가서 아까 건네받은 작은 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미련을 가질 거면 왜 그랬는지. 다 떠나고 나서야 그녀의 빈자리에 괴로워 미쳐버릴 것만 같은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됐다. 그녀가 내일이라도 예전에 자신에게 다정히 웃어주었던 것처럼 다가와 안길 것만 같았다.

온통 자신의 안에 그녀의 말투, 몸짓, 버릇 등의 기억이 스며 있어 틈만 나면 생각이 났다.

안 하려고 해도 자꾸만 그의 머릿속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소명아.’

그녀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 봐도 이미 그에 곁에 그녀는 없었다.

간신히 검사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왜 이리 떨리는 건지.


‘그래, 아무 이상 없을 거야.’

지성은 수없이 자신을 다독였다. 검사를 하고 며칠 뒤에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지성은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아무 일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며 며칠을 버텼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고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지성은 몹시 긴장한 듯 호흡소리가 거세졌다.

간호사의 호명을 들은 지성은 떨리는 표정으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지성 씨?”

“네. 결과가 어떻게 됐나요?”

“아……. 그게.”

지성의 검사지를 보고 있는 의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생각보다 좀 심각하네요.”

“네?”

의사의 말을 들은 지성의 얼굴이 몹시 굳어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결혼생활 한 지 얼마나 됐죠?”

“네?”

“1년 동안 부부가 시도를 꾸준히 해봤음에도 임신이 안 되면,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해요.”

“아…… 네.”

“안지성 씨 검사 결과를 보니깐……. 아하. 흠.”

“…….”

지성은 뜸을 들이는 의사가 답답해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뭔데요?”

참다못한 지성이 급한 목소리로 의사를 다그치자 의사는 지성의 눈치를 힐긋 보더니 말했다.


“양도 적고 정자 수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다가……. 있어도 운동성이 없는 기형 정자들이네요.”

“네? 제가요?”

지성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의사를 바라보았다.


“저 건강 하나는 자신 있는데…….”

“이 정도 수준이면 시험관 아기도 힘들겠어요. 우선 부인이랑 상담하셔서 시험관 시술하는 병원에 가서 상담 받아보세요.”

“……네.”

진료실을 나온 지성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잠시 멍해졌다. 이제야 꼬였던 실타래가 풀리듯 그동안의 모든 일의 궁금증이 사라졌다.

왜 소명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성은 너무 큰 충격으로 방금 들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잘못된 걸 거야. 이 병원 너무 이상하다.’

괜한 병원 탓을 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성의 희망은 곧 꺾이고 말았다.

시험관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가서 검사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시험관도 어려울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내가 불임이었다니…….’

 

그 일은 겪은 후 지성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소명이 아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구박을 받았는지 생각만 하면 많이 미안해졌다.

그가 불임이라는 사실은 소명과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그의 원대한 포부도, 아이를 갖고 완벽한 가정을 꾸미겠다는 그의 의욕마저도 사라지게 했다.

그는 소명과 살면서 평생 아프게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자신이 불임인 걸 알게 된 지성은 인제 그만 소명을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 때문에 상처만 받고 아팠는데 이제는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랐다.


‘이제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게 없구나. 상처만 줬지.’

그는 소명을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미안하게 느껴질 만큼 큰 죄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불임 판정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큰 사건이었다.

소명에 대한 혼란하고 복잡한 감정을 깨끗이 정리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소명에 해줄 수 있는 건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뿐이었다.


‘잘 살아. 소명아. 나 죗값 받으면서 살게.’

지성은 작은 술집에서 꽤 많이 마셔서인지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풀린 눈으로 비틀거리며 간신히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여는데 정 여사가 아직 자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엄마……. 왜 안 자?”

“술 마셨니? 또?”

정 여사의 얼굴이 짜증이 확 드러났다.


“응. 마셨어.”

“너 좀 그만 마셔. 언제 정신 차릴래?”

“엄마, 잔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 엄마 잔소리 안 들어도 힘들어 미칠 것 같은데 엄마까지 보태야겠어?”

“지성아, 엄마는 다 너 걱정돼서.”

“나 걱정하지 마. 이제.”

“지성아.”

“이젠 나 엄마 그늘에서 마마보이로 안 살 거야.”

“지성아, 너 말을 왜?”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 살아.”

“너 새 출발하는 게 엄마 소원이야.”

“나 이제 내가 살고 싶은 인생 살 거야. 엄마가 살고 싶은 인생 말고.”

“아, 그러지 말고 선 보자. 응?”

“엄마.”

지성이 갑자기 슬픈 눈으로 정 여사를 바라보았다.


“왜?"

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

“응. 말해. 어서.”

“나. 후. 흠. 불임이래.”

“뭐?”

정 여사는 너무 놀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성은 그런 정 여사를 일으켜 세우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 여사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지성이, 불쌍해서 어쩌나. 아이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소명이한테…….”

정 여사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상상하지 못할 충격으로 그녀는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 여사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새 출발을 강요하고 다시 여자를 만나라고 말하는 엄마에게도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충격은 받았겠지만, 엄마도 알아야지.’

지성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질 뿐이었다.


 

******

한편 도하와 소명의 보금자리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본체는 거의 완성이 되어가고 이제 벽돌을 쌓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하와 소명은 벽돌 공사를 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소명이 고른 벽돌색이 주변 경치와 너무 잘 어울렸다. 도하와 소명은 건물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지어지면 좋겠다.”

도하가 소명을 보며 말했다.


“너무 기대돼요.”

소명도 도하를 바라보며 설레는 표정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곧 그와 그녀의 보금자리가 생겨난다고 생각하니 짜릿해졌다.

두 사람은 새로 지어질 자기 집 앞에서 손을 꼭 붙잡고 서 있었다.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손 꼭 놓지 않을게요.”

“저도 꼭 붙잡고 안 놓을 거예요.”

도하와 소명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집 구경을 마치고 차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에 소명이 도하에 말했다.


“도하 씨? 이번에 내가 도하 씨, 선물 줄 게 있어요.”

“네? 선물?”

도하는 선물이라는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가라는 데로 가요. 길 알려 줄게요.”

“어디 갈려고요?”

“비밀. 가 보면 알아요.”

도하는 궁금하기도 설레기도 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슈트가 아닌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으면 어려 보여 소년미가 풍기고, 슈트를 입으면 남성미가 풍기고, 어떤 때는 한없이 장난꾸러기 같아 귀여우면서도, 어떤 때는 남자다워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을 때가 있었다.

파고 파도 그의 매력의 끝은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아. 궁금하다.”

“좀만 참으세요.”

도하는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운전에 집중했다. 얼마를 달리자 공터가 보였다. 소명이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여기에 주차하면 될 것 같아요.”

“네.”

귀엽게 자기 말을 잘 듣는 도하가 좋아서 소명이 그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차를 대고 얼마쯤 걷자 그의 눈앞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비밀 정원>

도하는 간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밀 정원?”

“네. 비밀 정원.”

“사무실 근처 가 볼 만한 곳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알아냈어요. 여기 이런 곳도 있더라고요.”

“소명 씨, 너무 기대돼요.”

식물을 좋아하는 도하의 눈이 한없이 반짝거렸다. 기대와 설렘과 호기심에 가득한 그의 눈을 보니 소명도 기분이 좋아졌다.


“도하 씨가 나 SD 랜드 데려간 것처럼. 이번에 내가 도하 씨, 여기 꼭 데려오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선물이니 표는 제가 살게요.”

“아니, 내가 사요. 소명 씨. 나 돈 많아요.”

도하가 하는 말에 소명이 살짝 웃더니 곧바로 매표소에 가서 표를 끊었다. 표를 받자 그녀는 신이 난다는 듯 도하를 바라보며 표를 흔들어 댔다.


“와, 신난다. 도하 씨, 빨리 들어가요. 우리.”

소명도 흥이 나는 듯 표정이 밝았다.

그녀는 도하의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진짜 천생연분인 것 같아요.”

도하가 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우리 좋아하는 게 너무 똑같잖아요.”

“그러네요. 진짜.”

“소명 씨, 선물 너무 맘에 들어요. 난 식물만 보며 마음이 편안해져요.”

“어머, 도하 씨도요?”

소명과 도하는 식물원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공기부터가 다르게 느껴졌다.

온통 푸르른 나무와 아름다운 경치가 소명과 도하를 둘러싸고 있었다.


“와, 상쾌해.”

“여기 있으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마냥 신나 하는 도하를 보니 소명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안내도를 보니 진짜 비밀 정원이 있던데요.”

“비밀 정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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