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이런 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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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이런 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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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이런 게 사랑
2023.05.22.
“라희야, 엄마가 죄인이야. 엄마 잘못 만나 고생했어. 그리고 고맙다.”
라희는 혜숙을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엄마, 한 번만 안아줘.”
“……!”
라희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도 준 적 없는 혜숙은 라희의 말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 엄마가 필요해.”
“라희야.”
라희는 엄마가 그리웠고 엄마를 사랑했다. 그게 솔직한 그녀의 마음이었다.
자신을 버린 엄마가 미워 복수를 꿈꾸다가도 남들 엄마처럼 혜숙이 자신을 사랑해주면 어떨까 하는 달콤한 꿈을 꾸기도 했다.
혜숙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자신을 사랑한다는 라희의 말에 딸에게 정말 미안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 라희야. 아이고 내 딸.”
혜숙은 라희를 와락 끌어안았고 라희는 생전 처음 맛보는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진작 이렇게 솔직히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안하다. 라희야. 미안해.”
“엄마, 이젠 내가 정말 잘할게.”
“한 번도 표현 못 했지만 라희야, 엄마도 너 사랑한다.”
“엄마.”
엄마의 말에 라희의 잇새로 퍼져 나갔던 울음이 오열이 되고 그러고는 엉엉 소리 내 울부짖었다.
라희의 인생의 큰 상처에 약을 발라 고통이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두 모녀는 오랫동안 서로 끌어안았다.
******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차츰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다가도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라희가 찾아왔다.
그에게는 첫사랑이었고, 그가 가진 모든 걸 주고도 아깝지 않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준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녀를 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어느새 라희를 그리워하는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한번 빠지면 서서히 깊게 박혀 나중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았다.
그는 간신히 발에 힘을 줘서 고생 끝에 한 발을 뺐고 나머지 발도 겨우 빼냈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써버려 고되고 힘이 들어 그는 그만 녹초가 됐다.
재윤은 라희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시렸다.
하지만 라희와 헤어진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할 수 없다는 진리도 깨우쳤다.
내려놓아야 가벼워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 재윤은 라희를 생각하는 대신에 일에 몰두했고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다행히 라희의 치료 소식을 알게 되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누군가를 또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는 이렇게 아픈 상처를 또 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혼자가 나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자꾸만 재윤에게 다가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와 같이 근무하는 지우였다.
그녀는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환한 여자였다.
예쁘고 상냥하고 밝은 그녀이지만 그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았다.
주변에서 지우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재윤은 지우를 받아들이기가 두려웠다.
사실 재윤도 그녀가 싫진 않았다. 하지만 라희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혹시라도 자신이 밝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오늘도 재윤은 일에 몰두하느라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일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드니 지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어? 지우 씨?”
재윤은 놀란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퇴근 안 하셨어요? 혹시 하고 와 봤는데…….”
“어, 그렇게 됐네요. 왜 다시 왔어요?”
영문을 몰라 지우를 보며 묻는데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녀의 눈동자가 더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대리님.”
“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
“저……저기. 오늘 좀 바빠서.”
재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자신이 상처를 많이 받아봐서인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이면 돼요.”
재윤은 지우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이 됐다. 지우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꼭 얘기하고야 말겠다는 태세였다.
재윤은 한 발 물러섰다.
“네. 그래요. 그럼.”
재윤과 지우는 카페로 향했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재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곧 그녀의 눈에 눈물이 일렁거렸다.
“지우 씨? 무슨 일 있어요?”
“다 알고 계시죠?”
“뭘요?”
“제가 대리님 좋아하는 거요.”
그 말을 끝내자마자 지우의 눈 밑으로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지우의 눈물을 본 재윤은 마음이 아팠다.
“저는 그날 같이 밥 먹은 거 너무 행복했어요.”
“저도 좋았어요.”
“저 계속 기다렸어요. 대리님 좋아하니까요.”
“지우 씨, 좋은 사람이에요.”
“근데 왜요? 대리님이 저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 그만 접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안 돼요.”
“지우 씨 때문이 아니라 제가 지금 누굴 만날 처지가 못돼요. 미안해요.”
“……저 기다리면 안 돼요? 기다릴 수 있어요.”
“그건 못 할 짓이에요. 너무 미안해요.”
재윤은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누구보다 자신이 거절당하는 기분을 알기 때문이다.
“지우 씨, 미안해요. 사실 저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랑 헤어졌고 상처가 너무 깊어서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는 게 너무 두려워요.”
“대리님…….”
지우는 자신을 거절한 재윤 때문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가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우는 그 얼굴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꼭 안아주었다.
갑작스러운 지우의 행동에 놀란 재윤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지우 씨…….”
“많이 힘드셨겠어요. 대리님 마음 다 알지 못하지만, 마음이 아파요.”
“…….”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품은 너무도 따뜻했기에 그녀가 그에게 준 위로에 그의 가슴에 온기가 피어올랐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울어주고 자신을 위로해주다니 재윤은 지우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고마워요.”
“대리님, 저 기다릴게요. 오래 걸려도 좋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저 대리님 이해할 수 있어요.”
지우는 포옹을 풀고 일어나 의자 위에 올려놓은 핸드백을 들고 재윤을 바라봤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지우 씨…….”
지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재윤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재윤은 지우가 참 멋진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우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그녀의 포옹을 상기했다. 그녀의 품은 참 포근했다.
지우의 위로로 재윤의 가슴은 잠시 따뜻한 위안을 얻었다.
******
소명과 도하의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듣고 차 회장은 매우 좋아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무리 표정관리를 하려 해도 되지 않았다.
도하만 키웠다 보니 딸아이에 대해 잘 몰랐다. 손주가 여자라는 사실에 그는 너무나 행복해졌다.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자식이니 그에게는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그가 소파에 앉아 혼자 미소 짓고 있는 걸 보고 과일과 차를 들고 오던 은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여보, 무슨 생각을 그리 즐겁게 하세요?”
“응, 우리 손녀딸 어떻게 생겼을까 너무 궁금해.”
“당신 그렇게 좋으세요?”
“어. 나도 내가 이렇게 좋아할지 몰랐다니까.”
“저도 빨리 안아보고 싶어요. 왜 이리 기다려지는지.”
“그래도 빨리 나오면 안 되고 때 돼서 엄마 고생 안 시키고 나와야 하는데.”
“그럴 거예요. 여보, 차 좀 드세요.”
“고마워. 당신도 마셔.”
******
소명은 정원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바느질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있으면 태어날 사랑이의 배냇저고리가 들려 있었다.
사랑이에게 자신이 손수 지은 옷을 해 입히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손재주가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바느질하고 있었다.
사랑이를 임신한 게 초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소명이의 정원은 푸름을 자랑하고 포도나무에 포도는 탐스럽게 열매를 맺었다.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소명은 가만히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자신 앞에 벌어진 수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 인생의 가장 충격적이고 아픈 기억의 한가운데 한 남자가 나타났다.
자신의 아픔을 감싸 안으며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해준 남자.
그가 해준 사랑은 진짜였다. 어떤 거짓도 위선도, 갖기 위한 속임수도 아닌 자신의 모든 걸 다 드러내 솔직하게 다가온 남자.
그동안 사랑이란 것에 대해 알지 못했구나, 이게 사랑이라는 걸 알게 해준 남자,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렇게 그를 만나고 그의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큰 축복이고 감사였다. 소명은 도하를 생각하며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사랑아,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멋진 남자야.”
그때 소명의 배 속에서 무언가 꼼지락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명은 깜짝 놀라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엄마 배 또 발로 찼네. 대답하는 거지? 우리 사랑이.”
소명은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주차장으로 도하의 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하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걸어오며 소명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도하가 소명에게 다가가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다 완성되어가네요.”
“네. 직접 만드니까 뿌듯해요.”
“너무 예뻐요.”
도하가 배냇저고리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너무 행복했다.
소명이 잊기라도 할까 봐 호들갑을 떨며 도하에게 말했다.
“사랑이가 아까 배를 발로 뻥하고 찼어요,”
“진짜요?”
“너무 신기해요.”
소명은 도하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도하는 조심스레 소명의 배에 손을 얹고
말했다.
“사랑아, 아빠 왔어. 인사해줄래?”
도하는 기대에 잔뜩 부푼 얼굴로 사랑이의 인사를 기다렸다. 한참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자 도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 소명은 도하의 볼을 어루만졌다.
“울 사랑이가 피곤한가 봐요.”
“그런가 봐…….”
도하가 소명의 배에서 손을 떼려 할 때, 도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명의 배의 한 부분이 살짝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어! 어! 발로 찼다. 찼어.”
도하는 신이 나는지 소명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소명이 도하를 와락 껴안았다.
“소명 씨…….”
소명의 포옹이 행복해 도하는 살짝 눈을 감았다.
소명의 배가 많이 나와 꼭 껴안지 못해도 이렇게 그녀를 안고 있으면 사랑이도 함께 껴안는 것 같아 더 행복해졌다.
‘사랑아, 아빠 열심히 살게. 좋은 아빠가 될게.’
도하는 매일매일 사랑에게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그 결실로 두 사람의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한 남자로 인간으로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 어서 빨리 사랑이를 그의 품에 안고 싶어졌다.
소명과 도하는 손을 꼭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언제 가죠? 사진 찍으러?”
도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