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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화 사랑이의 새 이름 (99/101)


외전 8화 사랑이의 새 이름
2023.06.12.



‘소명이가 딸을 낳았구나. 이걸 또 찾아서 보고 있었던 거야.’

소명을 아직도 못 잊고 헤매는 아들이 안타까워서 가슴이 찢어졌다. 아들 잘못이지만 그래도 정 여사는 엄마였다.

아들이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이젠 그만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성에게 일부러 티를 내지 않고 밖으로 나왔지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 여사는 지성이 하루빨리 소명을 잊고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지성은 정 여사가 가고 난 뒤 뒷정리를 시작했다. 찻잔을 치우고 다시 책상 위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펼쳐져 있고 소명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소명의 기사를 보고 정신이 너무 없어서 노트북을 덮는 것도 잊은 채였다.


“하아, 엄마가 본 건 아니겠지?”

지성의 가슴에 답답함이 몰려왔다.

오늘은 그냥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글라스 잔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한 번에 들이키고 다시 소명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소명이가 엄마가 되었구나. 진짜 잘 살아. 근데 나 가슴이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 거 내가 너 아프게 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미안해, 소명아. 나 너 잊어볼게. 노력할게. 행복해라.’

지성은 소명의 행복을 빌었다. 하지만 너무 외로웠다. 소명과 함께 보낸 시간이 그의 인생에서 봄날이었다.

그 행복과 소중함을 저버린 대가가 바로 이거였다. 끝없는 외로움.

지성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 전원을 껐다. 지성은 다시 잔에 술을 부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한편 서빈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집행유예를 받았다. 재판부에서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서빈이 운전기사와 아랫사람들에게 상습적 폭언과 폭행을 한 점이 인정되었으나 반성하고 있는 점과 김 기사가 마지막에 합의를 해주어 실형은 면하게 되었다.

오 여사가 아픈 몸을 이끌고 김 기사에게 가서 눈물의 사죄를 했고, 서빈도 진심으로 사과한 것이 그의 마음을 돌렸다.

실형을 면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갑질녀라는 타이틀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그녀는 외출을 기피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연락을 자주 하던 친구들도 그녀를 멀리했다.

서빈은 자신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물러난 아빠와 몸까지 아프게 된 엄마를 바라보니 가슴이 쓰라렸다.

여태껏 자신이 한심하게 살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큰일을 겪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악마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서빈은 죄를 저지르면 그에 따른 보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경치가 좋은 곳에 다시 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노후를 준비하려고하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많은 걸 잃었는데도 그들은 서빈을 원망하지 않았다. 서빈은 그래서 더 미안해졌다.

오 여사는 말수가 적어지고 힘겨워하는 서빈을 바라보는 것이 속상했다.


“서빈아, 괜찮아?”

오 여사가 서빈의 방에 들어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밥 먹어야지.”

“생각 없어.”

“너 자꾸 왜 이래? 밥을 먹어야 살지.”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서빈아, 이제 진짜 정신 차리자. 엄마는 우리 딸 믿어.”

“나 때문에 엄마랑 아빠가 이 꼴이 되고 나 너무 괴로워.”

“서빈아, 아무리 세상이 너한테 등 돌려도 너는 엄마 아빠 딸이야. 네가 많이 잘못했지. 엄마도 알아. 너도 알 거고. 하지만 반성하고 앞으로 안 그러면 되는 거야. 너도 이번 일로 배웠을 거고. 다시 일어서자. 응?”

”엄마, 나 너무 무서워.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 보고 수근댈까 봐.”

“앞으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돼. 엄마가 도울게.”

“엄마.”

오 여사는 서빈을 꼭 안아 주었다. 서빈은 오 여사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어댔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부모님을 봐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깨진 신뢰가 다시 회복되긴 어렵겠지만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기사에 달린 댓글이 무서워 핸드폰과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도하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결혼은 했겠지. 잘 지내고 있겠지. 도하 오빠 성격이면 엄청 부인에게 잘하겠지.

서빈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검색 창에 도하의 이름 세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차도하]

도하의 이름을 치자마자 그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쉽게 그의 소식을 알게 되다니.

서빈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기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봉사활동도 다니네. 만삭의 몸?’

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도하 오빠가 아빠가 되다니!


“하아.”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또 다른 기사에 들어가 보니 도하의 부인이 딸을 출산했고 순산했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이리도 행복하구나, 내가 없어도.’

서빈은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미 늦었다. 아무리 후회해도.

그녀는 오늘도 또 울고 말았다.

******

오늘은 산후조리원에서 조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날이었다. 소명의 품에는 새근새근 자고 있는 사랑이가 보였다.

그동안 살도 많이 오르고 더 예뻐졌다. 긴 속눈썹과 예쁜 쌍꺼풀이 사랑이의 매력 포인트였다.

눈을 뜨고 소명과 도하를 향해 미소 짓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기 천사였다.

아기 모델로 나가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귀엽고 예쁜 외모에 조리원에서 인기도 대단했다.

차 회장은 도하에게 하루에 한 번씩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할 만큼 손녀 사랑이 넘쳐흘렀다.

거기다가 소명을 닮아 웃을 때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사랑이의 매력을 더욱 더 돋보이게 했다.

소명의 품에 안겨 곤히 자는 사랑이를 바라보느라 도하는 정신이 없었다. 소명과 도하는 요즘 사랑이의 이름을 생각하느라 고심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사랑이가 평생 가지고 갈 이름이니 신중하게 짓고 싶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고민했지만 아직 정하지 못했다.

차 회장은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는 게 맞다며 이름 지어달라는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어느덧 집에 도착했고 사랑이는 아기 침대에 눕혔다.

순한 편이라 그리 힘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랑이를 눕히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이 둘에게는 너무 소중했다. 도하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이름은 더 생각해본 거 있어요?”

“정말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저, 내가 생각해본 게 있는데 들어줄래요?”

“네.”

소명은 사랑이의 이름을 생각했다는 도하의 말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서우 어때요?”

“서우?”

소명이 생각에 잠기자 도하는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별로예요?”

“아니요. 사랑이한테 너무 잘 어울려요. 이름 뜻은요?”

“슬기로울 서에 넉넉할 우.”

“와! 뜻도 좋네요. 차 서우, 우리 이걸로 정해요.”

소명이 자신이 지은 이름을 좋아하자 도하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리 서우가 아빠가 이름을 지어줘서 더 기뻐할 거예요.”

도하가 소명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우리 서우 잘 키워요. 좋은 아빠가 될게요.”

“저도 좋은 엄마 될게요.”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약속했다. 서우에게 좋은 엄마, 아빠가 되겠다고.

그때 서우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소명과 도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을 놓고 서우가 자고 있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배가 고픈지 서우가 울기 시작했다. 소명이 얼른 주방으로 가 분유를 타는 동안 도하가 서우를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서우야.”

사랑이의 이름이 서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서우를 품에 안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서우를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다. 이런 감정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하는 서우를 안고 다짐했다.


‘서우야, 좋은 아빠가 될게. 아빠가 널 언제든지 지켜 줄 거야.’

자신에게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준 소명이가 너무 고마웠다. 헐레벌떡 분유를 타고 뛰어 들어오는 소명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소명이 서우를 안고 분유를 먹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명의 눈빛에서 서우에 대한 사랑이 듬뿍 묻어났다.

서우는 배가 고픈지 젖병을 쪽쪽 빨아댔다. 그 조그만 입술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소명은 도하가 자신과 서우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도하와 소명은 서우로 인해 더 단단해졌다. 이 순간 도하와 소명은 서우를 통해 더 행복해졌다.

서우는 도하와 소명에게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

1년 후.

라희는 설레는 표정으로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 그때 라희의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라희야, 다 쌌어?”

혜숙은 다정한 목소리로 라희에게 물었다.


“어, 거의. 엄마 왜 아직도 안 자?”

“야, 나 너무 떨려서 잠도 안 오는 거 있지.”

“떨리기까지 해?”

“응. 너랑 처음 하는 여행이니까.”

“나도 좋아. 엄마.”

라희도 혜숙을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엄마와 극적인 화해를 하고 나서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함께 살아보지 못한 라희는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혜숙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또 혜숙에게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이제 자신도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라희는 용기를 냈다. 더 이상 상처를 받고 그 상처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한 번뿐인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동안의 그녀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모처럼 식사 약속을 잡고 한식당에서 엄마를 기다리는데 왜 그리 떨리는지 숨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테이블에 놓여진 물 컵을 들고 한 번에 들이키고 심호흡을 하는데 혜숙이 웃으며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네가 밥 사준다고 해서 점심도 굶었어.”

“엄마, 왜 그래? 배고프게.”

“맛있게 먹어야지.”

혜숙은 라희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엄마, 좋아하는 거 먹어.”

라희는 혜숙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같이 지낸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비싸 보인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시켜.”

“그럼 난 청국장찌개. 나 청국장 좋아해.”

‘청국장!’

청국장은 예전 그녀의 외할머니가 라희에게 자주 해주시던 음식이었다. 라희도 청국장을 정말 좋아했다.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식성에 라희는 놀라고 말았다.


“나도 청국장 좋아하는데. 할머니가 자주 해주셨어.”

“그래. 엄마 청국장 진짜 맛있는데.”

“여기도 맛있어.”

혜숙은 라희의 말에 살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 뒤에는 뭔가 쓸쓸한 기운이 맴돌았다.

아마도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는 듯했다.

얼마 뒤 주문한 청국장이 나왔고 혜숙은 청국장의 비주얼을 보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어머, 너무 맛있겠다.”

이럴 때는 꼭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숙은 수저로 청국장을 떠서 입으로 후후 분 뒤 입안에 넣었다.


“와, 너무 맛있다.”

밥을 맛있게 먹는 혜숙을 보며 라희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많이 먹어.”

“너도 어서 먹어.”

“응.”

식사를 맛있게 마치고 차를 마시러 갔다. 라희와 혜숙은 찻잔을 앞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라희는 혜숙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혜숙은 눈길을 돌렸다.


“엄마, 나 어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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