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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9화 첫 걸음마 (100/101)


외전 9화 첫 걸음마
2023.06.15.



 


“아니.”

“근데 왜 내 눈 피해?”

“원래 내가 다른 사람 눈 잘 못 봐. 워낙 죄를 많이 짓고 살아서 그런가 봐.”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눈은 봐도 되잖아. 딸인데.”

“알았어.”

“엄마?”

“응?”

“나 엄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혜숙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라희를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살자.”

“뭐?”

“엄마도 지금 혼자고 나도 혼자고. 우리 모녀 사이인데 한 번도 같이 산 적 없잖아.”

“…….”

“안 돼?”

“아니, 그게.”

“나 엄마랑 살고 싶어.”

“어?”

“나 엄마랑 살아보고 싶다고. 남들처럼.”

“라희야?”

“나 취직도 했고 엄마 벌어 먹일 수 있어. 엄마도 지금 힘들잖아.”

“그래도 내가 무슨 염치로 네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살아.”

“엄마니까 난 상관없어.”

“라희야.”

“엄마, 부탁이야. 난 엄마가 필요해. 나 너무 외로웠어.”

혜숙은 라희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라희야, 미안하다. 그동안 아프게 해서.”

라희와 혜숙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엄마,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그래, 우리 그동안 같이 못 살았으니까 이제 내가 밥도 해주고 늦었지만, 엄마 노릇 할게. 엄마 미워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혜숙은 자신이 딸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라희는 어른스럽고 차분했다. 자신보다 더 어른스러운 딸을 보고 돌아가신 엄마께 감사했다.

이렇게 잘 자라게 키워주신 것을.

******

그 후 라희와 혜숙은 같이 살게 되었고 얼마 뒤면 같이 산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라희는 그래서 엄마와 해외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짰고 내일 떠나는 날이었다.

둘은 꽤 많이 친해졌고 이제는 여느 모녀 사이 못지않게 살가워졌다.

혜숙은 딸 라희를 통해 인생을 배운 것 같았다. 라희를 버려두고 자신의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 쳤지만 아무것도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나이 오십 줄을 넘기고서야 철이 드는지 라희가 자신의 곁에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희 역시 그동안의 자신의 모든 상처가 치유되진 않았지만, 엄마와의 화해 덕분에 이 시련을 극복할 자신감이 생겼다.

라희는 엄마와 함께 새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니 재윤은 지우를 바라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금만 있으면 이 여자는 나의 아내가 된다.

자신이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살았었다.

라희와 이별하고도 늘 그녀를 잊지 못해 괴로워했다.

그녀와 첫 번째 이별 후에는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폐인의 생활을 했다.

자신의 품에서 늘 다른 남자를 찾아 헤매는 그녀가 제발 자신을 바라봐 주기만을 바라는 한심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때는 그에게 그게 최선이었다.

결국 라희는 또 한 번의 상처를 그에게 남겼고 그는 이제 라희를 포기했다.

이제 다시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서 있는 이 아름다운 신부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한없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녀를 통해 사랑의 따뜻함을 알게 되었다.

라희가 자신의 여자가 되기를 갈망하던 사랑은 뜨거웠지만, 행복은 없었다.

하지만 지우는 달랐다. 매 순간 순간에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녀와 단둘이 하는 식사,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느꼈던 기쁨, 그녀가 자신을 위해 차려주었던 밥상, 그녀의 편지. 소중한 일상의 행복을 알게 되었다.

재윤이 이제 지우를 놓치기 싫었다. 평범하지만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이제 지우에게 자신의 모든 걸 바치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녀를 받아주지 않아 그녀의 애를 태운 만큼 그녀에게 더 잘하리라 다짐했다.

재윤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장점을 고스란히 살려주는 여자.

그를 자꾸만 미소 짓게 하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너무 예뻐.”

“오빠도 멋져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사회자가 신랑 신부 입장을 외치자 재윤이 지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갈까?”

지우는 재윤의 손을 잡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우의 눈가에 눈물이 일렁거렸다. 재윤은 놀라며 지우의 눈물을 살짝 닦아냈다.


“울지 마. 내가 진짜 잘할게.”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재윤은 지우의 귀에다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지우는 재윤을 바라보며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번졌다.

재윤과 지우는 손을 맞잡고 걸어갔다. 그와 그녀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결혼식장에 온 하객들은 지우와 재윤의 앞길에 행복을 빌며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때 한 여자가 멀리 떨어져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라희였다.

라희는 재윤의 행복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만나는 동안에 이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재윤의 표정은 늘 슬펐다. 자신을 향해 짓는 미소 뒤에 언제나 쓸쓸함이 맴돌았었는데.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라희는 재윤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사실 이곳에 오지 말아야 했다. 그를 위해서 자신은 아예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더 이상 재윤이 아프지 않도록.

하지만 재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딱 한 번만, 오늘만 그를 보자. 오늘 그를 마지막으로 보기로 자신과 약속을 하고 이곳에 오고 말았다.

사실 그녀가 그의 결혼식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상담 의사선생님께 해외여행 때 산 선물을 드리려고 병원을 방문했었다. 그녀가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재윤의 청첩장이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송됐다.

자신도 모르게 날짜와 시간을 보고 말았다.

얼마 뒤 들어온 의사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라희는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희도 애써 모른 척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라희에게 재윤은 은인 같은 존재였다. 그 덕분에 치료를 받고 다시 엄마와 화해도 하고 직장도 잘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운 사람.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그의 옆에 있는 신부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에게는 밝은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재윤 옆에 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다시는 아프지 않고 항상 행복하길 바랐다. 뒤돌아서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라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윤의 결혼식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딸, 나 처음으로 청국장 끓였어. 근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네. 얼른 와. 나 배고파.]

“알았어. 금방 갈게.”

[응.]

라희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엄마, 고마워.”

[뭘. 당연히 엄마가 해주는 건데.]

“엄마 빨리 갈게.”

라희는 걸음에 힘을 싣고 속도를 붙였다.


‘엄마, 우리 행복하자.’

 

******

오늘은 사랑하는 서우의 첫 돌 잔치가 있는 날이다. 소명과 도하는 서우의 돌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갓난아기였는데 어느새 첫 번째 생일을 맞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서우만 봐도 뭉클거렸다.

서우는 순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엄마와 아빠를 보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내는 아이. 서우의 미소에 사람들은 다 녹아내렸다.

소명은 서우에게 예쁜 한복을 입히고 져고리 색과 같은 조바위도 씌었다. 서우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조바위를 손으로 잡고 벗어버렸다.

소명은 그런 서우의 행동이 귀여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차 서우, 좀 이따가는 쓰는 거야.”

서우는 소명의 말을 듣고 활짝 웃어 보였다. 서우의 미소를 보면 저절로 행복해졌다.

그때 도하가 와 서우를 들어 올려 자신의 품에 쏙 안은 다음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와, 우리 공주님. 너무 예쁘다.”

서우를 바라보는 도하의 눈에 꿀이 뚝뚝 떨어졌다.


“자 갈까요.”

“네.”

도하와 소명은 서우를 안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 돌잔치가 열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늦지 않게 도착했는데도 이미 차 회장과 은영이 와 있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우리 서우 보고 싶어서 못 참겠더라고.”

차 회장은 서우를 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차 서우. 이리 와요.”

차 회장을 서우를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예쁜 한복을 입고 왔어. 아이고, 예쁘다. 우리 서우.”

그 옆에 있던 은영은 차 회장에게 말했다.


“여보, 나도 서우 좀.”

“조금만 기다려요. 나 안은 지 1분도 안 됐어.”

“아이고, 당신도. 참. 오늘도 또 서우 독차지하게 생겼네요.”

은영은 말은 그렇게 해도 차 회장이 서우를 예뻐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차 회장은 계속 서우를 안고 있었다.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소명은 차 회장이 힘들까 염려되어 차 회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버님, 힘드세요. 서우 저 주세요.”

“아니다. 이게 내 낙인데. 서우 안고 있는 게.”

소명은 서우를 사랑해주는 시부모님께 감사했다.

이윽고 도하와 소명도 한복으로 갈아입고 돌잔치를 준비했다.

소명은 아이를 낳았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도하는 소명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준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오늘 그와 그녀의 아이, 서우의 돌잔치라니 감회가 남달랐다.

도하는 소명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소명도 도하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녀를 아껴주었다.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그녀를 생각하고 배려했다.

그녀는 늘 도하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때 연회장으로 정희가 들어왔다.


“소명아.”

“엄마.”

정희도 오자마자 주변을 살피며 서우를 찾기 시작했다.


“서우는?”

“저기 아버님이 종일 안고 계셔.”

“나도 서우 봐야겠다.”

정희는 차 회장과 은영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잘 지내셨어요?”

“아, 사부인. 네. 너무 오랜만에 뵙네요.”

차 회장은 서우를 바라보는 정희를 보며 서우를 정희에게 양보했다.

그제야 서우는 정희의 품에 안겼다.


“아이고, 서우야.”

정희는 서우를 꼭 안았다. 자신의 딸이 낳은 손녀 서우가 너무도 귀하게 생각되었다. 서우는 보면 볼수록 소명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게 했다.

정희가 서우를 안고 소명에게로 다가왔다.


“서우, 아직 못 걸어?”

“조금씩 발 떼려고는 하는데 자꾸 넘어져.”

“여기 살짝 내려놔 볼까? 너도 돌잔치 지나고 바로 걸었어. 서우도 너 닮았음 곧 걸을 것 같은데.”

“그래 볼까?”

정희는 조심스레 서우를 바닥에 내려놓고 서우의 손을 잡았다. 서우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 발 한 발 걸었다.

정희는 살짝 서우의 손을 놓았고 소명은 서우가 걸어올 수 있는 길목에 서서 서우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우, 차서우.”

어느새 도하와 차 회장과 은영도 소명의 뒤에 서 있었다. 서우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한 발 한 발 발을 떼기 시작했다.


“악, 서우 걷는다.”

제일 먼저 은영이 환호성을 지었다.


“걷는다. 걷는다.”

차 회장도 신이 나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서우야.”

도하는 서우가 걷자 감동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우는 한 발 한 발 발을 떼서 소명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아, 우리 서우. 너무 잘했어요.”

서우가 걷자 모두 행복해했다.

곧이어 돌잔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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