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변화
날 한참 노려보던 민석이 아버지가 입을 뗐다.
“사과하겠다.”
“.......?”
지금 뭐라고 씨부린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바라보니....
“내가 사과할 테니 여기서 서로 좋게 끝내자.”
진짜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문제는 표정이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다는 거다.
옆에서 최민석은 우리 아버지가 사과를...? 이런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최민석 어머니는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원독에 가득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웃기고들 있네.
미친 건가?
“아까 뭐라고 하셨더라? 교도소에 보내서 콩밥 좀 먹여봐야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민석이 어머니가 움찔한다.
“학교에서 퇴학시키고 법적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고 하셨죠?”
“큭.”
민석이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번에는 교장을 향해 물었다.
“아까 분명 학교에서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커흠!”
“교칙이 퇴학이라면서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네?”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회피하는 교장.
“다들 대답을 안 하시네. 선생님도 같이 있었으니 분명 들으셨을 거 아니예요.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아니, 그....”
뭔가 말을 하려다가 교장의 눈치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어른들이 참 비겁하다.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좋게 끝내자고요? 누구 좋으라고? 사과 한 마디면 그 동안 내가 받은 피해가 없어져요? 그러면 제가 입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해요? 톡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제가 그 동안 빼앗긴 것도 결코 적지 않아요. 그것들은 어떻게 해요? 그냥 사과 받았으니 없었던 것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뭐? 사과할 테니 여기서 끝내자고?
“좋아요. 어디 끝까지 가봅시다.”
난 민석이를 향해 말했다.
“넌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한 번 해봐. 난 계속 참고 기다릴 거야. 참고 또 참다가 네가 가장 빛날 그 순간에 나서서 나락까지 떨어뜨릴 테니 두고 봐. 내가 못할 것 같지?”
“......!”
민석이 녀석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 한참 노려보던 민석이 아버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됐다. 그만 하자.”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 데요?”
“원하는 걸 말해 봐라. 해달라는 대로 해 줄 테니.”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이다.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건을 종결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마침내 인정한 것이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
“그런데 궁금하기는 하네요. 소중한 아들의 미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될지.”
난 진지하게 물었다.
“한 번 직접 말해보세요. 얼마나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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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된다.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입술을 뗐다.
“민석아.”
“으, 으응?”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알았지?”
“으응. 그, 그래.”
합의를 하긴 했지만 칼자루는 여전히 내가 쥐고 있다.
원하는 대로 축구 선수로서 삶을 살고 싶으면 무조건 나한테 잘 보여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물론 나는 치사하고 야비한 사람이 아니니 이걸 꼬투리 잡아 집요하게 괴롭히거나 할 생각은 없다.
내 눈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내 학교생활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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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지나는데 옆 교실에서 누군가가 두들겨 맞고 있는 게 보였다. 맞는 애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때리는 애들은 최민석 꼬붕 노릇 하던 애들이다.
난 앞으로 가서 외쳤다.
“학교폭력 멈춰!”
효과가 없었다.
“이상하다. 왜 효과가 없지?”
마침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지나는 최민석이 눈에 띈다.
“야! 최민석! 이리 와 봐! 네가 가르쳐 준 거 효과 없어!”
녀석이 얼굴을 찡그린 채 묻는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학교폭력 멈춰! 이러면 멈춰야 하는데 안 멈추잖아!”
녀석들이 최민석을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다.
“쟤 뭐야?”
“미친놈인가?”
최민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지 마.”
“응?”
“걔 이제 건들지 말라고.”
“으, 으응.”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자리로 돌아가는 양아치들.
그렇게 난 엄청난 보상금에 더해, 마법의 주문까지 손에 넣었다.
... 이거 재미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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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며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정리됐다.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일단, 나를 향한 또래 학생들의 시선과 분위기가 바뀌었다.
“민아. 숙제 했어?”
“너 축구 잘해? 같이 할래?”
이번 사건에 대한 내 대처 방식에 호감을 느낀 모양이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며 친근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반장이 적극적으로 챙겨줬다.
“오늘 5교시 한문 숙제 있는데, 안 했으면 내 거 보여 줄 테니까 빨리 해.”
반장 최명중.이전 삶에서는 깊은 인연은 없었다.
접점이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석 사건 이후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변한 녀석 중 하나다.
못 챙겨줘서 안달인 듯 보이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어려울 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또 하나.
통장에 엄청난 여유가 생겼다.최민석의 부모님이 자녀의 미래 가치를 굉장히 높게 책정해 준 덕분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몇 가지 장비를 구입했다.
최신형 맥북. 모니터링 헤드폰, 마스터 키보드.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마이크.
기본적인 홈 레코딩 세트였고 내게 가장 절실하던 물건들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음악으로 크게 성공해야지.’
같은 팀이었던 녀석들이 빌보드 차트에 올라 미국 진출에 성공했었다.
녀석들이 해냈다면 나도 해낼 수 있다.
나 때문에 고생 많았던 가족 호강시켜주고, 누구 눈치 보는 일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게 이번 삶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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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음악 시간 풍경이 꽤나 이상했다.
모두가 리코더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책상을 피아노 치듯 두드리는 이들도 있었다.
'뭐지?'
오늘 무슨 일인데 다들 그러는 거지?
그때 보면대 몇 개를 들고 입실한 반장이 보이기에 다가가서 물었다.
“오늘 음악 시간에 무슨 일 있어?”
반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 마디 한다.
“오늘 음악 실기 수행평가 보잖아.”
“... 뭐?”
"리코더, 가창, 피아노, 세 개 중 자신 있는 거 하나 선택해서 하면 되는데... 몰랐어?"
"응. 전혀!"
"......."
반장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실기 범위와 주제 등을 알려준다.
"자유곡이야. 가요든 팝이든, 클래식이든 상관없어."
"오호. 넌 무엇으로 응시할거야?”
“가창. 음악 교과서에서 있는 산타루치아로 시험 볼 거야.”
“노래에 자신 있나 보지?”
“그게 아니라 교과서 지정곡 가장 난이도가 무난해서 선택한 것뿐이야. 기본만 해도 점수 잘 받을 수 있으니까. 넌 무엇으로 응시할 거야?"
"나? 나는...."
뭐할까?
주위를 살피던 내 시선은 정면의 피아노에 멈췄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피아노가 좋겠네."
네가?
표정에 담긴 의도는 명백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말없이 자리로 돌아간 녀석을 보고, 난 다시 피아노를 쳐다봤다.
대부분 악기를 잘 다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고, 많이 취급했던 악기가 바로 피아노였다.
기타와 함께 내 외로움과 아픔을 달래준 친구 같은 존재였다.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
"시끄럽다. 조용히 해!"
수업 시작종과 함께 음악 선생님이 등장한다.
뚱뚱한 아줌마... 같은 분이지만 그래도 전직 피아니스트시고, 성악 실력도 출중하신 분이다.
괄괄한 성격은 맞는데, 그 내면에 따스함이 숨겨진 분이시다.
'정경미 선생님. 이렇게 또 뵙게 되는구나.'
노래에 대한 내 재능을 깨우쳐 주시고 가수의 길을 처음 권유해주셨던 분이었다.
[ 너 정말 노래 잘 하는 구나! 얼굴도 잘 생겼는데 목소리도 미성이고... 재능이 보이는데 가수 오디션 같은 거 한 번 보는 게 어때? ]
만감이 교차한다.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선생님은 호탕하게 외쳤다.
"시간 없으니까 인사 생략. 바로 실기 시작하자. 1번 나와!"
실력은 다들 고만고만하다.
많은 학생들이 리코더를, 그 다음으로 가창을 선택했는데, 아직까지 피아노 연주를 선택한 용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6번 나와!"
마침내 내 차례!
"맨 손이네? 노래 부를 거야?"
대답 대신 피아노 앞에 앉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원래는 손 풀기용으로 즐겨 연주하던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연주할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몸으로는 망신만 당할 뿐이지.'
그런 점에서 잔잔하지만, 깊고 그윽하며 섬세한 감성적 터치를 필요로 하는 월광 소나타도 제외.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는 어울리는 선곡이 아니야.'
아무리 실기 시험이라지만, 명색이 뮤지션이다.
대중음악 전문가라는 말이지.
선곡은 상황과 대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모두가 즐길 수 있고, 이 나이 또래 애들이 좋아할 그런 음악.
조심스럽게 건반을 연주한다.
"와...!"
"어? 나 이 노래 알아!"
"이거, 이거 알고 있었는데...!"
나름 긴장감 있던 시험장이, 순식간에 길거리 연주회 분위기로 바뀐다.
곡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저 바다 깊은 곳.
바깥세상을 동경하는 한 소녀의 가슴 벅찬 꿈을 담은 음악.
전주가 끝나고 노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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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f Your World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가로, 1989년에 발표된 이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인간 세상을 동경하는 인어 공주 에리얼의 모습을 굉장히 감성적으로 표현한 음악으로, 세대를 막론하고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곡이다.
Look at this stuff
Isn't it neat?
이것 좀 봐.
신기하지 않아?
뮤지컬 스타일의 곡으로,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보컬을 이어나가는 것이 포인트다.
남자가 부르기에 부담스러운 하이 톤이지만.
"뭐야, 쟤 목소리가 여자애 같아."
"원래 저렇게 하이 톤이었나?"
이 같은 반응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난 원래 여자 못지않은 하이 톤이다. 사실 아이돌 시절 극찬과 함께, 동료들로부터 외면당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목소리가 유난히도 튀어서 잘 엮이지 않았거든.
못 불렀다면 회사 차원에서 날 서브 보컬 명목으로 존재감을 눌러두던가, 아니면 데뷔 조에서 뺐겠지만....
Look at this trove
Treasures untold
내가 발견한 이 물건들 좀 봐.
남들은 잘 모르는 보물들이야
남자이면서 굉장한 하이 톤의 미성을, 회사가 가만 놔둘 리 없었다.
Sure, she's got everything
맞아, 쟨 다 가졌어
이것이 바로 내가 압도적인 분량을 챙기며 메인 보컬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But who cares?
No big deal,
I want more
근데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별 거 아니지.
난 더 많은 걸 원해
그래.
난 타고난 보컬리스트였다.
남들과 다른.
압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럼에도 실패한 이유?
간단하다.
난 내게 주어진 보물을 제대로 활용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것을 더 개발하여 나만의 강력한 무기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나가 보여줄 것이다.
나야말로 최고의 뮤지션이 될 자격이 있음을.
part of that world
연주와 노래가 끝나고, 한숨으로 감정을 가볍게 털어낸 뒤 선생님을 바라본다.
"끝났습...."
말이 끝내기도 채 전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와아아아! ]
다들 감동이 역력한 얼굴로 힘껏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중얼거렸다.
깜짝 놀랐네 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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