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엄마의 부탁
“.......!”
목덜미에 느껴지는 소름끼칠 정도의 냉기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너 진짜 피곤했나보네. 아침 운동도 안 하고 줄곧 잠만 자는 거 보니까.”
“영상 만든다고 무리를 좀 했더니....”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이거 마셔.”
캔에 담긴 시원한 에너지 음료였다.
“.......”
“왜? 싫어해?”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마시면 내일 체력을 오늘로 대출한 기분이 조금 들어서....”
“하하하!”
몸을 뒤집어가며 깔깔 웃는 반지희.
그래, 지금은 이렇게라도 버텨 봐야지.
캔을 따서 꿀꺽 꿀꺽, 시원한 음료를 원샷으로 때려 붓는다.
“크으!”
이제 좀 살 것 같구먼.
즉각적인 효능에 감탄하는데 나를 향한 반지희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할 말 있어?”
“그게 아니라 네가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데?”
“영상 다 봤거든? 그거 보니까 이런 생각 들더라. 아이돌은 우리 같은 애들이 아니라 너 같은 애가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아아.”
피식 웃으며 묻는다.
“영상이 쓸 만해 보였나봐?”
“이거 쉬는 시간마다 강당 구석에 가서 연습하고 있거든? 곡도 그렇고 안무 진짜 잘 짰더라. 특히 각자에게 캐릭터를 부여해서 매력 어필에 중점을 둔 부분은 정말 충격적이었어.”
그러면서, 내가 했던 표정 연기와 제스처를 따라해 보인다.
“이거 거울 보면서 계속 연습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는 거 맞지?”
“거기서 조금 더 과장한다는 생각으로....”“아, 뭔가 어색해. 나 귀여운 척 잘 못하는데...."
웃기시네.
잘만 하더만.
난 애써 웃으며 다독였다.
자금은 괜히 투닥거리고 싶지 않았다.
“평소 얼굴 근육 쓸 일이 많이 없어서 그래. 표정 연습 많이 해둬. 정말 아이돌 하고 싶으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니까.”
예쁘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표정이 풍부하고 그것을 상황에 맞게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뻐도 표정이 한결 같은 사람은 금방 질려서 결국 쳐다보지 않게 된다.
“인기 멤버와 비인기 멤버. 대형 기획사와 중.소 기획사의 차이를 가르는 게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비롯되는 거야.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
“오호. 그렇구나. 그러면 이거 잘하면 우리도 대형 기획사의 인기 멤버가 될 수 있는 건가?”
“관리 잘하고 춤 노래도 빡시게 연습해야지.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밸런스.”
“그렇군.”
대화하는 동안 교무실에 다녀온 명중이가 교탁에 인쇄물을 쌓아 놓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블루 웨이브 로직에 카피 해보라는 숙제 줬었지? 그거 해봤는데, 들어볼 수 있어?”
“뭐? 벌써? 아니 숙제 내준지 얼마나 됐다고?”
“.......”
“너 설마 밤 샜어?”
“이거.”
내 질문은 무시하고 블루투스 이어폰 한 쪽을 내민다.
“mp3로 믹스다운 한 거야?”“응. 믹싱은 안 했지만....”
“그런 거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해 오면 이상한 거지. 아무튼, 들어보자.”
음악이 재생된다.
어제 학교 끝나고 교실에 남아 명중이에게 첫 미디 강의를 해줬다.
미디 기본 구성.
그리고 악기를 불러와 미디를 찍고 저장하는 등, 간단한 내용들을 알려주고 숙제를 내줬다.
바로 내가 만든 곡 블루 웨이브를 카피하는 것.
원래 미디 실력은 남이 만든 곡을 계속 들어보고, 나름대로 소스를 찾아 카피해보면서 늘리는 거다.
나 역시 이전 삶에서 그런 식으로 미디를 공부했다.
“음.”
드럼, 베이스, 퍼커션, 신스....
기본 구성은 모두 갖춰져 있다.
악기 소리도 최대한 비슷한 것을 선택해서 사용했고.
“초보 치고 이 정도는 진짜 잘 했네.”
이것이 내 평가.
녀석의 입 꼬리가 슥 올라갔다가 금방 원상 복귀한다.
나는 이어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해. 박자 저는 부분도 좀 있고....”
“으음...!”
“인트로, 전주, 벌스, 싸비, 브릿지, 하이라이트... 각 파트를 세밀하게 쪼개놓고 하나 씩 차근차근 분석하며 카피 해보는 거야. 네 나름의 방식으로.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확실히 한 번 해보고 나니 네가 왜 카피 숙제를 내줬는지 알겠더군.”
“잘 하고 있어. 이렇게만 해.”
“알겠어.”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지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교실에도 없는 것을 보니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춤 연습을 하러 나간 모양이다.
그 후로도 우리는 수업종이 울릴 때까지 미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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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끝나고 명중이를 상대로 미디 과외를 진행했다.
전생에 돈 벌 겠다고 많이 해본 거라 어색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현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드럼이야. 드럼 사운드 제대로 못 만들면 노래방 음악 되는 거야. 알겠어?"
명중이는 내 교육을 굉장히 잘 따라왔다.
가르치는 맛이 나서 몰입하다 보니 과외 시간을 10분이나 오버해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
"숙제 내 준 거 열심히 하고.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 바로 물어 봐."
"고맙다. 내 공부 과외는 내일 이 시간에 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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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청담동 연습실로 향했다.
“바로 한 번 맞춰보자.”
주어진 시간은 짧은데 해야 할 것은 굉장히 많다.
명중이는 구석에서 새 맥북을 열고 미디 카피를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의 안무를 주시했다.
‘음, 배우는 게 빠르네.’
분명히 안무 풀 영상을 오늘 새벽에 준 것 같은데, 애들이 벌써 다 외웠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이돌에 진심이었다.
심지어 춤 동작 뿐만 아니라 자기 파트의 표정 연기와 제스처도 모두 숙지했다.
숙련도는 제쳐두고라도... 하루 만에 이걸 다 외웠다는 건 정말 놀랄만한 일이다.
“음, 너희들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이것만 연습했구나. 칭찬해야 할지 혼내야 할지....”
“헤헤헤.”
“잘 했다는 거지?”
“공부는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린 알아서 잘 하거든!”
“우리들이 메일 춤만 추고 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공부는 전교 최상위 권에서 놀 정도로 잘하거든!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건 몰랐는데....
예쁜 애들이 공부도 잘한다니.
뭔가 대단하면서도 인생 참 불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이번에는 포메이션 체인지를 위주로 연습해보자. 이건 몇 시간 만에 외우기는 조금 힘들 거야. 꽤 난이도가 높거든.”
...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이거 뭐,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네.”
“재미있고 신기해. 정말 정교하게 잘 짜여졌어.”
“이걸 만들다니... 우리 프로듀서가 될 자격이 있는데?”
아니, 잠깐만.
쟤들 왜 이렇게 빨리 외워?
포메이션 체인지 이거 꽤 어려운 건데....
“이제 뭐하면 돼?”주세아의 질문에 정신 줄을 다잡은 나는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포메이션 체인지, 제스처, 표정 연기. 이거 모두 동원해서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 연습!”
저녁 여덟 시.
평상시보다 조금 늦게 연습이 끝났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게 아니라 쟤들이 자처한 거다.
난 모아놓고 몇 가지를 공지했다.
“스타일링 컨셉을 잡아야 하는데, 지희야. 블루 카펫 미용실 원장님이 이모님이라고 그랬지?”
“응?”
“나중에 도움 한 번 받을 수 있을까?”
“아, 그거야 언제든 오케이지!”
“좋아. 패션 쪽은 내가 자료를 만들어서 단채 채팅방에 올려줄 테니까 그거 보고 각자 알아서 구입하도록 하고, 보컬 연습 열심히 해. 나중에 직접 녹음도 해야 하니까."
“노, 녹음?!”
“응. 내 가이드를 너희들 목소리로 바꿔야지."
최명중이 특히 관심을 보인다.
“내가 보컬 녹음하고 보정하는 법도 가르쳐 줄 테니 걱정 하지마.”
“으음.”
자기 빼고 진행할까봐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반지희가 환한 얼굴로 묻는다.
“저기, 보컬 녹음한다고 했잖아. 그러면 우리 TV 속에서 보던 그런 녹음실에서 작업하는 거야?”
“그래야지. 홈 레코딩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니....”
“우와아!”
흥분해서 소리 지르고 난리 났다.
가수들만 한다는 스튜디오 녹음을 자신들이, 그것도 심지어 본인들을 위한 곡으로 하게 되었으니....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난 정색하고 말했다.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야.”
“.......?”
집중되는 이목.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둘게. 이번 녹음에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대형 기획사 아이돌 수준의 퀄리티를 기대 하지 마. 이유는 굳이 거론할 필요 없지?”
“아....”
녹음, 보정 기술은 한계가 있고 저 아이들은 보컬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아리들이다.
“녹음 끝나고 결과물 들어 보면 민망한 나머지 온몸이 오그라드는 저세상 경험을 하게 될 거다. 어쩌면 평생 흑역사로 남게 될 수도 있어.”
“.......”
“그러기 싫으면 각자 파트, 미친 듯이 연습해. 최소한 내 가이드 수준은 뛰어넘으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응!”
대답 하나는 씩씩하다.
“좋아 오늘 연습 끝... 내기 전에 딱 한 마디 더.”
이제부터는 개인 용건.
사실 오늘 아침에 학교 가는 날 붙잡고 엄마가 한 가지를 강요하셨다.
[ 너 같이 음악 하는 친구들 있다고 했지? ]
[ 응. 왜? ]
[ 모두 몇 명이야? ]
[ 일곱 명. 그런데 대체 왜? ]
[ 이번 주말 쯤에 우리 가게로 모두 데려 와. 엄마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 테니까. ]
음, 엄마 마음은 알겠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 엄마 소원이야. ]
이건 반칙이지.
"저기...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애써 태연하게 용건을 털어놨다.
“너희 혹시 이번 주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전 중으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우리 엄마가 음식점 하시는데 너희들에게 맛있는 거 만들어주고 싶다고 하셔서....”
난 항상 혼자였다.
양궁 유망주에 친구가 많았던 서연이와 달리 나에게는 친구라 부를 존재가 전무했다.
엄마는 그 점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놈이, 친구는커녕 바로 얼마 전까지 괴롭힘을 당해왔는데 어찌 마음이 편할까?
그런데 근래에 내가 미디 과외, 댄스 교습을 핑계로 집에 늦게 들어오니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진짜라면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음식도 차려주고 싶고.
“어때?”
떨리는 심정을 애써 내색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린다.
명중이와 여섯 소녀들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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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이른 아침.
“오늘 오전에 정확히 몇 시에 올 거야?”
“10시에 맞춰서 갈게.”
“그래. 시간 딱 좋네. 먼저 가서 가계 열고 기다릴 테니 친구들하고 같이 와. 알았지?”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들떠 있었다.
오늘이 바로 내가 친구들을 가게로 데려오기로 한 날이었다.
늦게까지 대리 운전을 하고 아침에 돌아온 진작 주무시고 계셨고, 동생 서연이는 한창 잠자고 있다.
“엄마 다녀올게! 잠시 후에 가계 보자!”
그렇게 엄마가 떠나자 집안이 조용해졌다.
흠, 시간이 될 때까지 곡이나 좀 만져볼까?
아홉시 삼십분이 되어서야 노트북을 가방에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먼저 이동한 곳은 가까운 지하철 역.
약속 장소인 개찰구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민아!”
굉장히 눈에 띄는 무리가 꽤나 요란스럽게 등장한다.
“우와, 기대된다. 민이 어머니네 가게라니.”
“친구 집에 초대 받은 게 얼마만이더라?”
“그런데 우리 인원이 너무 많은데, 양심상 빈손으로 가기는 좀 그렇다. 하다못해 음료수라도 좀 사가자!”
참 고맙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모두 시간을 할애해 준 것도 그렇고, 내 체면 세워준다고 복장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나와준 것도 그렇고.
명중이가 자연스레 내 옆에 따라붙으며 속삭인다.
“어머니 괜찮으실까? 너도 알겠지만... 재들 먹성이 어마어마하잖아.”
“사실 나도 그게 걱정이긴 해.”
엄마가 운영하는 음식점은 전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 괜히 긴장된다!”
“무슨 미슐랭 쓰리 스타 레스토랑 들어갈 때보다 더 떨려!”
“난 저번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초청으로 궁전 방문했던 적 있었는데 그때보다 더 떨려!”
“......?”
응? 잠깐만.마지막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초청 누구야?!
오전 열 시 정각.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엄마 친구들 데려왔어.”
아직 손님을 받지 않은 탓에 텅 비어 있는 음식 점 안.“아이고, 왔어?!
주방에서 한창 요리 중이던 어머니가 급히 걸어 나오더니 친구들을 보고 얼굴이 환해지신다.
친구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다 같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빈손으로 오기 민망해서 마실 것 좀 사왔어요!”
“와, 가게 너무 좋아요!”
시끌벅적 활기가 돋는 가게.
“다들 천사가 따로 없네. 어쩜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까? 응? 아이고....”
저러다 우리 엄마 울겠다.
내가 친구들 많이 데려온 게 그렇게 감동적인 일이었을까?
오죽하면 아이들이 몸 둘 바를 몰라 할 정도였다.
이 순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활기찬 목소리로 외치신다.
“우리 아들 친구들. 다들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렴. 아줌마가 맛있는 음식 맛보여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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