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 혹시 천잰가?
스타병에 걸려 매니저를 무슨 하인 부리듯 하며 멸시하던 그 작자들.
상처를 받는 쪽이 아니라 주는 입장인 그들이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거절하고 싶지만 일단 이유라도 들어보기로 했다.
“이 곡의 어떤 부분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사실 전 매치가 잘 되지 않아요. 물론 실력이 있으니 기본 이상은 하겠지만....”
“매트로 보이즈에게 준다면 그 곡 그대로 쓰지는 않겠지.”
“네?”
“사실 내가 네 곡을 듣고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어서 내 방식대로 편곡을 해봤거든. 한 번 들어볼래?”
어, 그러니까....
“별빛의 숲을 대표님이 직접 재편곡하셨다고요?”
“응. 설득할 시간을 달라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나도 널 설득하려면 그만한 성의는 보여줘야하니까.”
“.......”
“말도 없이 곡에 손을 댄 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아니, 그게 아니라 신기해서... 네. 한 번 들어보고 싶네요.”
내가 만든 곡을 장진영 대표가 다시 재편곡했다?
잘 억눌러지지 않던 감정이 빠르게 진정된다.
장진영 대표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말했다.
“한 번 들어 봐.”
별빛의 숲 댄스 버전.
예쁘고 몽환적인 느낌의 일렉트로닉 신스 악기를 리드로, 배경에 화려한 스트링 사운드를 감성적으로 연주하고 808 킥 드럼은 정박으로, 그 위에 묵직한 베이스 사운드로 펀치 감을 극대화했다.
‘이건 이 시기에 장진영 대표가 자주 사용하던 댄스 편곡이야.’
우선.
리드 악기로 사용한 일렉트로닉 신스 사운드의 튜닝이 굉장히 절묘하다.
‘하늘에서 작은 별이 떨어질 때의 모습을 소리로 표현한 것 같은데....’
이 사운드 소스에 부여된 딜레이와 에코가 미니멀한 편곡 구성을 풍성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이 소리로 연주되는 메인 테마의 임팩트가 굉장히 강렬했다.
‘솔직히 별빛의 숲이 클래시컬한 발라드를 표방하긴 하지만, 알맹이만 높고 보면 인기 밴드 감성이 가득했지.’
그런데 그것을 트렌드하고 메이저한 댄스 음악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동화 속.
별이 가득한 신비한 숲에서, 역동적이며 한편으로는 우아한 느낌의 군무를 선보이는 요정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느낌을 뮤직 비디오, 무대, 엘범 커버 등에 적용하면 꽤나 볼만한 아트 컨셉으로 완성될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톱 프로듀서의 클래스!
곡 하나로 모든 과정을 일축시켜 버리는 역량에 전율이 일어날 지경이다.
‘하지만....’
조금 아쉽다.
몽환적이고 신비한 감성을 ‘나’를 위로해주기 위한 용도가 아닌, 매트로 보이즈를 멋있게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으로 만들어 버린 점이.
이 곡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위로였는데.
‘분명 흥행 면에서는 이쪽이 훨씬 나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참 아쉽네.
곡이 끝났다.
“어때?”
기대감을 담은 눈빛.
난 내 느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했다며 싱글벙글 웃던 장진영 대표였지만, 점점 표정이 진지해진다.
그리고 내 말이 모두 끝났을 때.
“한 마디로, 겉만 번지르르하고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없다. 이런 거지?”
“그냥 제 개인적으로 아쉽다는 거예요. 솔직히 퍼포먼스만 잘 짜면 확실히 떡상할 수 있는 히트송이라고 생각해요.”
“.......”
내 말에도 장진영 대표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결국.
“아니야. 내가 실수했어.”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생각해 보니 별빛의 숲은 상처와 치유를 동화적이고 순수한 감정으로 풀어낸 음악이잖아. 내가 너무 한순간의 아이디어에 집착해서 본질을 망각해 버린 것 같아.”
그 말에 솔직히 놀랐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장진영 대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장진영 대표는 꽤나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곡은 버려야겠다. 너도 못들은 걸로 해.”
“아깝지 않으세요? 차라리 조금 수정해서 다른 곡으로 바꿔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야. 코드 진행부터 구성까지, 모든 것을 이 곡에 맞춰 쓴 곡이라 그러기도 힘들어. 차라리 버리고 새로 쓰는 게 나아.”
“으음.”
단호함에 놀랐다.
나 같으면 저렇게 잘 나온 편곡. 절대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별빛의 숲 주인은 너야. 네가 부르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다. 그냥 포기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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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대화가 일찍 끝났기에 청담동 연습실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고민했다.
“메트로 보이즈 주려고 만들었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작업 방향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겠다.”
그때.
어머니로 인해 몰입이 깨져서 작업이 중단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곡을 넘긴 뒤에야 매트로 보이즈의 그런 모습들을 목격했다면 정말 크게 후회할 뻔 했다.
‘아무리 잘 나가도 인성이 썩어빠진 그런 놈들에게 곡을 주고 싶지는 않아.
연습실 문을 여는 순간 열기가 온 몸을 덮쳐왔다.
[ 쿵! 쿵! 쿵!! ]
블루 웨이브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소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명중이는... 없군.
내가 말한 대로 오늘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한 모양이다.
조용히 들어가 구석 한편에 앉아 연습 광경을 지켜보기로 했다.
“각도 틀어진다!”
원래 무리의 리더 격인 인물은 물주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반지희였다.
그런데 나에게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하면서 주세아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연스레 리더 자리를 차지했다.
누구도 그 사실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평상시 성격은 조용하고 수줍음도 많은 편이지만... 스위치가 올라가면 캐릭터 성향 자체가 바뀐단 말이지.’
다들 참... 그렇게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꾸역꾸역 내 지시를 따라오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예전에는 주어진 방송 안무 따라 하기에 급급한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박자를 밀고 당기며 춤을 어느 정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만큼 꿈에 진심이라는 거지.’
안무가 끝났다.
“어? 민이다!”
“김민 프로듀서님!”
아이들이 그제야 내 존재를 확인하고 우르르 몰려온다.
땀 냄새가 확 풍겨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잘하던데?”
“오늘 안 올 줄 알았는데. 일이 금방 끝났나봐?”
“응. 춤추는 거 봤는데 이제 잘하더라.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어.”
“......!”
내 칭찬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춤은 디테일만 조금 더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연습하면 될 것 같고... 노래 실력 한 번 볼까?”
“노래도 자신 있어!”
“연습 진짜 열심히 했어!”
“나 너 성대모사 똑같이 할 수 있다?”
마치 그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
이것도 꽤나 자신 있는 모양이다.
“그래? 그러면 말 나온 김에 바로 노래 한 번 점검해 보자. MR 볼륨 낮춰서 틀고 다 같이 라이브 한 번 보여줘봐.”
자신감을 보인 이유가 있었다.
완벽한 수준은 아니지만, 내 가이드 보컬에서 제시한 기준을 꽤나 잘 맞춰놓은 것이다.
라이브가 끝나고 평가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진짜 많이 깔끔해졌네. 정말 많이 좋아졌다는 거 인정!”
“.......!”
“그런데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어. 일단 너희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안인데, 끝음 처리가 확실하지 못해.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는지, 곡을 세밀하게 들으면서 연습 좀 해야겠어.”
KPOP 스타일 댄스 음악에서 바이브레이션이니 음 꺾기니 하는 고급 보컬 스킬들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컬 트레이닝에서 강조하는 기본기.
이것만 잘 해도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갈 수 있다.
“얼핏 듣기에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너무 무난하게 들릴 수도 있을 거야. 노래 부르는데 딱히 재미나 흥 같은 게 느껴지지 않고 건조하기만 하고.”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들.
“그런데 그게 맞는 거야. 지금 너희들은 그 동안 쌓인 나쁜 버릇들을 하나하나, 확실하게 제거하고 있는 중이야.”
비유하자면 이런 거다.
깔끔한 흰색 무지 티셔츠에 디자인이랍시고 어설프게 그림도 막 그리고, 레이스나 장식도 막 이것저것 달아놓은 결과 상당히 괴상망측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초심자를 위한 보컬 트레이닝은 이런 괴상망측한 작품을 다시 원래 상태의 무지 티셔츠로 되돌려 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야 전문 디자이너가 너희들의 특성에 걸맞게 제대로 디자인을 해줄 수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
“응!”
“강약 조절. 깔끔한 시작과 완벽한 끝맺음. 기본 발성. 이 정도에만 신경 쓰면 잘 될 것 같아.”
난 웃으며 아이들을 격려했다.
“지금 굉장히 잘하고 있어. 이렇게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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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참 빠르다.
그 동안 참 많은 것을 했다.
애들 데리고 렌탈 스튜디오를 찾아가 보컬 녹음도 했고, 기념으로 음반 시디 한 장씩을 만들어 나눠주기로 했고.
역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연습이었다.
디테일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한 주가 지나가고 오디션이 시작되는 주가 찾아왔다.
아이들이 연습에 매진하는 동안 나 역시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에 몰입 중이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내 솔로 곡으로 바꾸자.’
그렇다면 매트로 보이즈 팬 송으로 만들었던 이 곡의 주제를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가사를 바꾸자.’
주제가 여행이었으니 이 키워드만 똑 떼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떤 느낌으로...?’
어두운 감정 부분은 짧게 축약.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 정도로 정리하고 나머지를 밝고 분위기로 채워보자.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즐거움, 설렘, 그리고 해방감에 초점을 맞추는 거지.’
가사를 바꿨다.
이제 여기에 걸맞은 멜로디와 편곡을 적용시킬 차례였다.
‘원래 장르는 묵직한 느낌의 정통 알앤비 발라드였지?’
이것도 좋다만....
‘지금 내가 부르기에는 쓸데없이 진지하고 무거워.’
이런 건 나이 먹고 해도 될 것 같다.
부담 없이, 정말 여행을 생각하며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였으면 좋겠어.
이러면 원곡 색채가 거의 대부분 지워지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장진영 대표님도 그렇게 잘 만든 편곡을 가차 없이 버렸잖아. 나도 그래야지.’
원곡 구성 자체가 내가 아닌 매트로 보이즈와 팬들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곡이었다. 어떻게 바꿔도 나에게 어울리는 곡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주요 키워드인 ‘여행’만 똑 떼서 아예 새로운 곡을 만드는 것이다.
‘즐겁고 흥겨우며 부담 없는 느낌으로....’
사운드 세팅을 피아노로 변경, 고음역대 건반을 반복적으로 눌러보며 예쁜 패턴을 찾아본다.
“오, 이거 좋다.”
그렇게 완성한 네 마디 패턴을 반복!
‘전반부는 시원한 트로피컬 하우스 느낌을 입혀볼까?’
여행이 주는 대표적인 느낌이라면, 아무래도 청량함 아니겠나?
무겁지 않게 통통 튀는 킥 드럼을 정박으로 입력한다.
[ 쿵! 쿵! 쿵! 쿵! ]
“좋아. 여기에 스냅.”
[ 딱! 딱! 딱! 딱! ]
“그리고 가벼운 크랩을 섞으면...?”
[ 짝! 짝! 짝! 짝! ]
피아노, 킥, 스냅, 크랩.
네 가지 악기를 무한 루프 시켜놓은 뒤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전반 구성은 이렇게 하는 게 좋겠군.”
인트로는 예쁘고 말랑말랑한 메이저 스케일 피아노 루프부터 노출.
네 마디가 지나가면 킥이 흥겹게 정박으로 울려주고, 또 네 마디가 지나면 스냅과 클랩이 킥 드럼 두 번째 박자에 들어온다.
이 구성대로 처음부터 다시 들어보니.
“오, 좋다. 이거 좋은데?”
전반은 이렇게 잔잔하게 쳐주다가, 후반에 록 사운드를 입혀 흥겨운 감정을 끌어올리면 분위기가 살아날 것 같다.
마침내 도착한 여행지에서 마구 마구 즐기며 행복해하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거 재미있네.’
아주 즐거워!
온 몸을 들썩거리며 만들다 보니 곡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스피커 볼륨을 키워 놓고 혼자 듣고 있는 게 굉장히 즐겁고 행복하다.
아! 진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다.
가슴이 미친 듯 설렌다!
‘설사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것 같아. 잘 만들었어.’
그렇게 혼자 신이 나서 한창 듣고 있는데....
‘어? 잠깐만.’
무언가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아니, 관통해 버렸다!
“나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별빛의 숲을 만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 혹시 천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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