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조율 (2)
아마 대부분 창작 경험이 있는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아예 새로 창작하는 것보다, 전체를 세부적으로 뜯어 고치는 작업이 몇 배는 어렵고 까다롭다는 것을.
휴대폰 메모 앱에 정리 해놓은 요구 사항을 계속 확인하며 그에 맞는 구성의 음악을 뇌리에 그려본다.
‘아니, 이것보다 더 심플하게 가야지.’
요는 이거다.
풍성하고 꽉 찬 사운드에 대한 개념을 조금 바꿔야 하는 것.
지금까지는 압도적인 스펙의 브라스 부대를 앞세우고, 나머지를 공백에 채워넣는 형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체급은 비슷한, 그러나 숫자는 그보다 더 적은 형태로 베이스, 미들, 하이를 각각 꽉 채워야 한다.
‘이런 작업을 예전에 몇 번 해본 적이 있긴 했지?’
미니멀하게 만든다고 정말 악기 몇 개만 사용하면 그대로 노래방 사운드가 되는 거다.
‘일단 드럼부터 생각하자.’
발라드 음악이든 댄스 음악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드럼.
드럼 사운드가 음악의 질감 자체를 결정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드럼의 댐핌강을 전반적으로 높여주는 게 좋겠어.’
지금까지는 브라스를 비롯한 그 자체만으로 강하고, 규모감 있는 사운드가 많았기에 드럼의 존재감을 많이 억눌러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구성이 반대로 되어야 할 것 같다.
원래 드럼 사운드를 강조하려면 나머지 공간은 최대한 비워줘야 하는 법이니까.
쉬는 시간 마다 노트북에 헤드폰을 연결해서 소스 선택을 위한 테스트를 진행했다.
[ 쿵! 쿵! 쿵! ]
이 킥드럼은 소리가 알맹이는 작은데 잔향만 너무 세.
[ 쿵! 쿵! 쿵! ]
이건 다듬기가 조금 어렵겠어. 소스 자체에 이미 이큐가 세게 걸려서 있어서....
난 그냥 쉬는 시간을 활용해 작업하는 것뿐이지만, 다른 아이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춰진 모양이다.
“뭐해?”
“음, 잠깐 일 좀 하고 있어.”
“무슨 일?”
“어떤 악기를 써야 할까. 뭐 이런 고민? 드럼만 해도 수천 개가 넘는 소스가 있으니까.”
“아하.”
유명 기획사의 댄스 음악을 만든다는 말에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온 애들은 화면에 가득한 영어로 작명의 악기 소스 이름들을 보고 질겁해서 물러난다.
일반인들은 유명 가수의 곡을 쓰는 작곡 업무에 대해 환상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알고 보면 징글징글한 노가다 업무가 따로 없다.
이런 가운데 최명중과 반지희는 오히려 더 깊은 관심을 보인다.
“우리도 좀 알려주면 안 돼?”
“대충 왜, 어떤 작업을 하는 건지 알려 줘.”
음, 두 사람은 내가 하는 작업의 개념 정도라고 짚고 넘어가면 큰 도움이 될 테니.
“잘 들어 봐. 원래는 이런 드럼이었어.”
스칼렛 러브의 원곡 드럼 소스만을 들려준 뒤.
“이걸 조금 더 알맹이 꽉 차고 단단한 사운드로 만들려고 하는 거야.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존재감이 돋보이도록.”
“아하.”
“그렇군.”
내친 김에, 두 명을 소스 선택에 활용하기로 했다.
사실 아무리 귀가 좋고 감각이 발달해도.
나 혼자 킥 드럼만 백여 개 이상을 연속해서 듣다 보면 그게 그거 같고, 큰 혼란이 느껴져 업무가 어려워진다.
계속 머리를 쉬어주며 작업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중에 팀 작업이 대세가 되는 것은 이런 부분도 반영됐다.
미래 대중은 음악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운드 아이디어가 중요시 되는데, 혼자만의 역량으로 한계가 있으니.
“음, 그것보다는 세 번째 들었던 킥 드럼이 훨씬 단단하고 좋은 것 같군. 그것과 다섯 번째 킥 드럼을 합쳐보면 소리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응? 세 번째, 다섯 번째 킥 드럼을 합쳐서 들어보자고? 어디... 오!”
최명중 이 녀석.
소리에 대한 감이 좋다.
내가 원하는 드럼 사운드가 어떤 형태인지 금방 파악하더니, 그 최상의 조합을 빠르게 짚어내는 것이다.
비트메이커로서 재능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더 테스트를 해볼까?
“스네어는 좀 찰지게 때리는 소리가 났으면 좋겠어. 그것도 한 번 찾아볼까?”
“한 번 해보자.”놀랍게도.
하교할 때쯤에는 킥, 스네어 사운드 조합을 대략 세 패턴 정도로 완성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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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작업실에 가서 명중이와 함께 찾아낸 드럼 소스들을 확인해 본다.
[ 쿵! 쿵! 쿵! ]
“오오....”
[ 탓! 탓! 탓! ]
“오오오!”
세 패턴 모두 마음에 든다!
“명중이 녀석이 사운드 초이스 정말 잘하네. 감이 좋아.”
내가 감이 떨어져서 해매고 있던 게 아니다.
이미 완성된 곡을 가수나 소속사의 요구로 수정을 하게 되었을 때 누구나 겪게 되는 문제점이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그림이 내 최초 구상에서 많이 벗어난 형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
지표가 없는 상황에서 요구 사항에 최대한 근접한 결과물을 찾기 위해 저 방대한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럴 때는 천재고 나발이고 해매고 좌절하고 스트레스 받는 건 모두 똑같다.
‘사운드 초이스에 대해 감이 좋은 동료가 있으면 굉장히 편해지지.’
아무래도 이쪽으로 명중이의 재능을 키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음 날에는 리드 악기인 브라스를 다듬었다.
‘전반적인 볼륨을 줄이자.’
규모 감을 어필하기 위해 브라스 악기도 굉장히 다양하게 사용하고 모든 음역 대를 꽉꽉 채워놓은 상태. 덕분에 의도한 대로 규모감과 임펙트는 살아났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운드의 할당 공간이 크게 줄어 들었다.
우선 악기 가짓수부터 줄여 놓고 최대한 타이트한 사운드가 될 수 있도록 조절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정말 하루 종일 브라스 하나만 만졌다.
이것 때문에 수업 시간에 조차 머릿속에 브라스가 울려 퍼질 정도로 괴롭다.
브라스 볼륨을 줄여놓고 이것을 최대한 부드럽게 다듬기 위해 이큐 질을 진행했다.
역시나 최명중이 큰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뭐야?”
“EQ, 이퀄라이저. 간단하게 사운드의 음질, 음색을 조정하는 건데... 여기서부터는 정말 전문적으로 파고 들어야 하는 분야라 꽤 머리가 아파.”
간단한 개요 정도만 설명해주고, 소스에 따라 적용했을 때 벌어지는 결과를 들려줬다.
“음, 이런 세계가 있었군.”
“이거 정말 중요한 거야. 오늘은 가볍게 개념 정도만 알려줄게. 이건 진짜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서 배워나가야 하는 거라서.”
그리고 다시 작업하려는데.
“너 이것도 혼자 독학한 거야?”
“응? 뭐, 그렇지.”
이전 삶에서도 딱히 누구에게 배우지 않고 혼자 공부했었다.
“그러면 뭐부터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걸 참고해야 하는지 정도만 가르쳐 줘. 기초는 내가 알아서 뗄 테니까.”
“... 가능하겠어?”
명중이가 씩 웃는다.
“난 공부가 특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걸 혼자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물론 알아서 기초를 떼고 오면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편하다.
“좋아. 그러면 내가 참고한 서적, 공부 방식 같은 거 간략하게 적어줄게.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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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을 다시 정립했다.
새롭게 다듬은 리드 브라스를 인트로에서 단독으로 연주.
두 번째 반복 때 킥과 스네어로 힙합 비트의 느낌을 심플하게 강조한 뒤 짧고 굵게 끝!
“그리고 이어서 드럼 셋과 퍼커션으로만 벌스1이 진행되는 거지.”
특정 파트에서 잠깐 잠깐 뮤트를 줘서 여백을 주는 편이 깔끔하게 임팩트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구성이라면 랩도 훨씬 강조되는 효과도 있지."
미니멀한 편곡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노래 부르는 가수를 굉장히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
벌스2 에서는 킥과 퍼커션을 제외.
클랩(박수소리)과 예쁜 일렉트릭 피아노 사운드로 코드를 짚어가며 후렴구 감성 폭발을 위한 빌드업을 진행한다.
보컬을 메인으로 내밀고, 랩을 코러스로 빼고.
브릿지.
가창력을 필요로 하는 격정적인 보컬이 화음으로 들어가며 다시 킥 드럼이 투입.
팡팡 터지는 스네어가 긴장감을 조성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자, 곧 터진다?
잠시 후에 팡팡 터지니까 긴장해?!
이런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후렴.
[ 빰! ]
[ 퉁- 투둥! 퉁- 투둥! ]
인트로에 들어갔던 브라스 사운드와 드럼, 퍼커션, 일렉트로닉 피아노까지.
분리해서 따로 따로 써먹었던 모든 사운드가 총 출동한다.
이것이 첫 번째 임팩트 포인트.
꽤나 규모감 있고 웅장하지만... 오리지널 버전에 비하면 여러모로 아쉬움이 느껴지는 구성이다.
사용된 소스 가짓수 자체가 워낙 적으니....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다.
우선 여기까지.
첫 번째 후렴까지 모두 끝낸 뒤 처음부터 이어서 트랙을 재생해본다.
‘음.’
절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오리지널 버전과 비교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구성이 간략해졌기 때문.
브라스의 규모감이 크게 줄었고, 그 여백을 드럼 셋이 매우고 있다. 투입된 화음 악기는 기껏해야 일렉트릭 피아노 한 대 정도.
계속 고민이 된다.
정말 이래도 되나?
오리지널 버전에 비해 너무 맥아리가 없는데... 정말 이렇게 나와도 되나?
“모르겠다. 일단 벌스, 브릿지, 사비 작업은 이렇게 마무리 짓고 하이라이트 파트를 연구해보자.”
엔 플라워는 임팩트를 곡 끝나기 전, 하이라이트 파트에서만 터트려주기를 원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사비의 규모감도 꽉꽉 채워넣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진행한 것이다.
그래서 계속 내게는 부족하고 아쉽게만 느껴졌던 것이고.
“잡생각 집어치우고, 일단 메인 테마부터 생각해보자. 리드 악기는 당연히 브라스가 되어야겠지?”
이건 따로 작업할 필요도 없다.
오리지널 버전의 브라스 트랙을 꺼내면 되니까.
[ 빰빠밤 --! ]
“오, 그래. 바로 이거야.”
스피커를 터트릴 정도로 강렬한 파워!
이제 조금 만족감이 채워진다.
여기에 맞는 마칭 밴드 사운드 샘플 한 번 입혀보고.... 오오오!
좋다. 좋아! 이제 좀 빵빵 터지는 맛이 생기....
“.......”
... 생기긴 했는데 균형이 안 맞는다.
메인 음악에 비해 하이라이트 파트 존재감이 지나칠 정도로 강해진 것이다.
안 돼!
저 마칭 밴드 사운드 샘플이 얼마짜린데!
“이렇게 되면 하이라이트 파트도 원래 구상에서 볼륨을 최대한 줄여놔야겠구나.”
리드 브라스 연주 패턴 정도만 살짝 바꾸고, 마칭 밴드 사운드 소스 중 스네어 샘플만 빼서 입히고.
그렇게 다시 재생해보면...?
“그래. 이제 밸런스가 좀 맞네.”
아쉽다.
너무나도 아쉽다!
결국 끝까지 임팩트 있는 사운드 구성은 단 한 번도 써먹어보지를 못했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해보자.
말랑 말랑한 로맨스 영화 후반.
갑자기 닌자가 나타더니 남자 주연을 암살하고, 여자 주인공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도주한다.
이렇게 되면 영화가 어떻게 되겠나?
"......."
어라?
이거 왠지 재미는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편곡은 여기서 끝! 미련을 버리자.”
가이드 보컬 까지 재녹음한 뒤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해보며 생각했다.
“이게 과연 먹힐지 안 먹힐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네.
모름지기 댄스 음악이란 말이지.
빠빵한 사운드!
뽕끼 가득한 멜로디!
미친 속사포 랩!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진정한 K 땐쓰 음악 아니겠냐고!?
난 불만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난 이 곡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내 스타일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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