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Elegy
무려 내 노하우를 풀어 영상 자료로 남기는 일이다.
아무리 전속 프로듀서고, 회사 월급을 받는 처지라고는 하지만 절대 무료 나눔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그런데 어째 표정들이 썩...?
“저기, 강남 일타 강사한테 가셔서 교육 영상 공짜로 받아오실 수 있다면 저도 공짜로 해드릴게요.”
“.......”
“아니면 세계적인 보컬 트레이너 세스릭스에게 가서 무료 레슨 영상 부탁을...?”
“알았으니까 그만해. 인마. 공짜로 안 부려 먹어!”
“그렇죠? 대표님 그런 뻔뻔한 분 아니죠?”
“돈 줄게 인마! 얼마면 돼?!”
“어? 지금 발끈하신 거 같은데...?”
“아니라고 인마!”
@
예상치 못한 수익에 기분이 좋아졌다.
뭐, 기초 교육 영상?
까짓 거.
얼마든지 찍어줄 수 있지!
그 날 바로 집으로 돌아와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춤과 노래는 장르가 워낙 다양해서, 세세하게 짚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초 교육’을 위한 자료.
단계별로, 이론과 실전을 적절하게 엮어 기초 연습 과정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라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추가할 게 많아진다.
아무래도 이건 내 성격 탓이다.
어쨌든 회사로부터 공식으로 의뢰 받은 업무 아닌가?
설렁 설렁, 대충 대충이라는 건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론 강의까지 섞어가며 열심히 영상을 만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영상은 10분 길이의 총 열 두 편!
보컬 여섯 편. 춤 여섯 편으로 이루어져있다.
사실 원본 분량은 훨씬 많지만, 기초 중에서도 정말 중요하다 싶은 것들만 편집한 게 이 정도였다.
뭐, 돈 값은 충분히 한 거겠지?
영상 자료를 넘긴 것은 의뢰 받은 지 정확히 일주일 만이었다.
[ 오늘 오후에 회사에 올 수 있겠냐? ]
“오후 몇 시요?”
[ 한 시. ]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갈게요.”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서둘렀다.
회사 사옥, 회의실에 도착했더니.
“어?”
팀장급 인원들과 매니저들, 그리고 엔 플라워 아홉 멤버가 모두 앉아 있었다.
아, 이거 설마....
장진영 대표가 내게 말했다.
“너도 꼭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스칼렛 러브 수정 네가 했다며?”
“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건 나중에. 프레젠테이션부터 같이 들어보자. 앉아.”
이거 같이 하자고 부른 거였나?
그런데 내가 굳이 참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수수하게 차려 입은 엔 플라워 주아가 롤 스크린 앞에 섰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엔 플라워 리더 주아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멤버들이 힘을 합해 완성한 차기 타이틀, 스칼렛 러브에 대한 추가 제안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서툴지만 열심히 꾸민 PPT 문서로 열심히 발표를 이어갔다.
스타일링에서는 문서뿐만 아니라 멤버들을 통해 실제 적용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얀색 꽃이 그려진 검은색 실크 미니 드레스라든지,
검은색, 우아한 레이스와 허리띠 장식의 오프 숄더 러플 드레스라든지.
중요한 건 저 모든 것이 구찌 생로랑 등, 이미 널리 알려진 브랜드의 의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명품 브랜드가 가진 고급스럽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일부 빌려올 수 있고, 일단 옷 자체가 굉장히 예쁘고 잘 만들어졌으니까.
명품이 괜히 명품이 아니더라 뭐 이런 거지.
스타일링뿐만 아니라 뮤직 비디오와 무대에서 쓰일 아트 컨셉도 나름 열심히 잡아왔다.
“이게 참 재미있네.”
“오호.”
“꽃말을 저런 식으로 녹여낸다고?”
일단 베이스는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의 판타지 속 신전과 비슷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신전을 두르고 있는 가시 넝쿨과 여러 종류의 꽃들이다.시체꽃, 유령화로도 불린다는 피안화를 비롯해,
비극적인 사랑을 뜻한다는 흑장미.
괴로움을 뜻하는 시네라리아 등.
예쁘지만 섬뜩한 뜻을 담고 있는 꽃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루아가 장미를 품은 안개꽃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는 죽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 있단다.
그런데 해맑고 사랑스러웠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표정에 분노가 감돌더니 화면을 향해 세차게 집어 던져 버린다.
안개꽃과 장미꽃이 흩어져 바닥에 떨어지고, 루아는 몸을 돌려 어느 새 어둠 속을 향해 뛰어간다.
이어 멤버들이 한 명씩 등장한 채 자기의 파트를 부르는데, 노래 가사에 맞는 비극적이고 슬픈 꽃들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마침에 후렴구가 진행되면 온갖 꽃과 가시 농쿨이 둘러쳐져 있는, 아름다우면서 뭔가 묘한 분위기의 신전 속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하이라이트에서는 빵빵 터지는 반주와 함께 사방에 꽃 폭죽이 터진다.
신전이 부셔진다.
그 안에서 백댄서들과 함께 열정적인 군무를 추다가 종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껏 손뼉을 쳤다.
우선 비주얼 적으로 훌륭했다.
사진을 이용해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흐름을 보여주는 성의도 좋았다.
이것은 나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괜찮은데?”
“꽃이라... 예쁘면서도 섬뜩하게 표현 잘 했네.”
“이거 잘만 꾸미면 진짜 멋진 아트웍이 나오겠어.”
열광적인 반응!
그 중에서 특히 장진영 대표는 감동을 참지 못해 눈시울까지 붉히며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노래도 좋고 컨셉도 좋고... 특히 꽃말을 다양하게 활용한다는 것도 좋았어. 의상도 그걸 고려해서 선택한 거지?”
“네. 맞아요!”
“굉장히 새롭고 감각적이야. 나는 이걸 조금 더 보완해서 바로 작업에 들어가면 멋진 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다들 어때?”
장진영 대표의 물음에 팀장들도 적극 찬성한다.
“꽃의 신전이라....”
“뮤비와 무대 아트, 커버 등등.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겠어요.”
“이거 잘만하면 명품 회사에서 우리 애들에게 막 이런 저런 제안 해오는 거 아닌지 몰라.”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
엔 플라워 멤버들도 이를 보며 무척 기뻐하는 모습이다.
그때 장진영 대표가 슥,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냐?”
“네?”
“이 음악 편곡한 거. 아무리 그래도 언질 정도는 해줬어야지. 이런 것도 모르고 바로 작업 들어갔었다면 어쩔 뻔 했어?”
내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우리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그리고 곡 관련해서 프레젠테이션 하고 싶은 게 있으니 일정 딜레이 해달라고 사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사실 다 눈치 채고 있었으면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우리 작곡가님 갈 궈요? 갈구긴.”
“으, 으응? 아니 그게 아니라...!”
“가만히 보면 사람이 진짜 못 됐다니까. 본인은 장난이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해질 때가 많은데 그걸 몰라.”
“맞아. 피디님은 그런 것 좀 고쳐야 해.”
“혼자만 장난이고 혼자만 재미있을 때가 많아.”
날 변호하며 맹폭격을 쏟아내는 엔 플라워.
쩔쩔 매던 장진영 대표는.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죽일 놈이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러면 너희들 말대로 장난은 그만두고... 조금 진지한 이야기 좀 해보자. 스칼렛 러브 바뀐 버전. 너희들은 마음에 들어?”
“네!”
“엄청 마음에 들어요!”
“굉장히 힙하고 미래 지향적인 느낌도 있고 감각적이고... 아무튼 다 좋아요!”
“우리 무조건 이 곡으로 활동할 거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눈을 부릅뜨며 결사 항쟁을 예고하는 모습에 장진영 대표는 어이없어 했다.
“그냥 물어본 거잖아. 마음에 드냐고. 나도 이곡 마음에 들어! 나 그렇게 까칠한 사람 아니야. 너희들 오늘 정말 나한테 왜 그러냐?”
억울해하는 모습에 와 웃음이 터져 나온다.
... 이 사람 진짜 엔 플라워 앞에서는 순한 양이구나.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곡 바뀐 거 마음에 들어요?”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빵빵 터지는 이전버전도 좋았지만, 솔직히 지금 곡이 훨씬 미래지향적이고 트렌디하며 감성적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멤버들의 개성을 잘 드러내주는 구성이라는 점이 마음에 드네요. 그리고 이런 편곡이니 방금 본 꽃의 신전 같은 아트웍 컨셉도 나올 수 있었다고 보고요.”
아무래도 이번 엔 플라워가 준비한 이번 프레젠테이션은 대 성공인 듯하다.
그런데 엔 플라워와 장진영 대표는 그 공을 나에게 돌린다.
“우리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번에는 편곡이 다 했어요. 우리가 이런 저런 요구를 막 쏟아냈는데, 그걸 깔끔하게 정리해서 완벽하게 반영해주셨거든요.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프로 아이돌 때려 치워야죠.”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너희도 열심히 준비했지만 솔직히 이번에는 곡이 정말 다 해준거야. 대단하다. 김민. 뒤에서 이런 걸 하고 있었다니....”
“........”
어, 솔직히 지금 굉장히 당황스럽다.
지금까지 살면서 특히 소속사 사람들과 아티스들로부터 이런 따스한 시선을 받은 경험이 없었으니.
다들 나를 헐뜯고, 경계할 뿐이지 않았나?
회사는 시종일관 강압적이며 또 권위적이었고.
아무래도 이번 삶에서는 좋은 회사와 동료들을 만난 것 같다.
그때 이정연 팀장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엔 플라워 발표 다 끝났으면, 저도 한 가지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구나!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이정연 팀장을 바라본다.
엔 플라워조차도.
“사실 제가 엔 플라워 수록곡과 관련해서 민이 씨에게 부탁한 게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발언권을 넘기는 이정연 팀장님.
자연히 모든 이목이 나에게 쏠린다.
나는 애써 담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스칼렛 러브에서 이어지는 곡을 하나 써봤어요. 조금 독특할 거예요.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잠시 후,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내가 만든 엔 플라워의 두 번째 곡.
스칼렛 러브 후속곡, 엘레지(elegy)가 울려 퍼진다.
@
시작은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웅장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몰입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어 불완전한 떨림을 담은 일렉트릭 피아노 사운드가 홀로 연주되며 구슬픈 진행으로 끌고 간다.
사라질 줄 알았어.
좋아질 줄 알았어.
네가 떠난 그 자리가 깨끗이 지워지길 바랐어.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로지 아픈 상처 뿐.
강렬했던 분노만큼이나, 그 상처와 후유증은 굉장히 크고 깊다.
감성적인 멜로디는 외국적인 힙합 사운드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감당하지 못하겠어.
사라져 줘.
내 인생에서 떠나가 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담담한 듯 보이던 독백은 점점 애원으로 변한다.
더 이상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모습이 안타깝게 그려진다.
최대한 간결하게 시작하던 구성이, 마침내 후렴에 이르러 강렬한 폭풍처럼 펼쳐진다.
인트로에서 짧고 굵게 존재감을 비추고 사라졌던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다시 등장하고, 808 킥, 베이스와 EDM에서 흔히 쓰이는 전자 퍼커션이 리듬을 가득 채운다.
세 번째 후렴.
비트가 급변한다.
808 힙합 리듬에서 하우스 리듬으로.
쿵! 쿵! 쿵! 쿵!
정박으로 때려주며 공간 전체를 강하게 울리는 킥 드럼이 템포를 몇 배로 끌어 올린다.
하이라이트 퍼포먼스 파티가 시작되는 것이다.
신스 베이스 리듬 역시 역동적으로 춤을 추고, EDM 음악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온갖 특수한 사운드가 어지럽게 쏟아진다.
막판에 모든 화력을 쏟아 붓는다.
그렇게 곡이 끝나고.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