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위로와 응원
“푸하....”
누군가 참았던 숨을 터트리는 순간.
“끝내주는데?”
“어우, 닭살 돋은 거 봐.”
“뭐야 이거... 너무 끝내주잖아?”
“세계적으로 히트 친 블록버스터 액션 무비를 감상한 기분이야. 롤러코스터 같은 구성도 그렇고 강약 조절도....”
비로소 감상이 터져 나온다.
장진영 대표는 상기된 얼굴로 의견을 구한다.
“나 이거 마음에 들어. 너희는 어때? 이거 후속곡으로 할래?”
“네! 이거 할래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뭐지? 힙합인 것 같은데 클럽 같기도 하고 살짝 트로트 같은 느낌도...!?”
엔 플라워의 반응도 뜨거웠다.
“민아. 이 곡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든 거야? 설명 좀 해봐.”
장진영 대표의 그 한 마디에 모든 시선이 김민에게 집중됐다.
김민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이 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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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긴장 되서 죽는 줄 알았다!
지금도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힙합에 엘레지 트로트적인 요소를 도입한다는 것.
내 입장에서는 굉장한 실험이었고 도전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게 먹힌 것이다.
물론 시장 반응은 또 다른 문제긴 하지만...일단 가수와 기획사 임원들은 만족한 것 같으니 뭐....
설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내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외국적인 힙합 사운드에 한국적인 트로트 감성을 입혀봤어요.”
이후 이야기는 뻔했다.
스칼렛 러브가 연인의 배신에 분노하는 노래였으니, 자연스레 그 이후 홀로 감내해야 할 이별의 상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거라는 내용.
“눈물을 쏟으면서 들을 수 있는 슬픈 힙합 댄스곡을 만들자. 그래서 제목도 비가, 엘레지(Elegy)로 정했어요.”
“엘레지 좋다! 어쩐지 전반적인 멜로디에서 엘레지 트로트 향기가 나더라고!”
그런데 흥분이 지나쳤던 탓인지, 장진영 대표가 즉석에서 폭탄 발언을 해버린다.
“야, 이렇게 된 거 네가 두 세곡 정도 더 써서 미니앨범 전체를 프로듀싱 해 봐.”
프로듀싱?
내가 인기 걸그룹 엔 플라워의 미니 앨범을 프로듀싱 한다고?
이게 말이 되나... 싶은데.
“오, 그거 좋다!”
“나 사실 방금 곡 듣고 그 말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된 거 앨범 흐름을 쭉 이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분노의 스칼렛 러브. 상처의 엘레지, 그 다음은 극복, 새로운 시작... 이런 식으로?”
“그거 좋네!”
다른 사람들은 말이 되는 모양이다.
엔 플라워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작된 회의는 내가 미니앨범 총괄 프로듀서가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 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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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교육 영상 자료를 만드는 것과 미니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하고 곡을 쓰는 건 차원이 다른 작업이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규모도 크고, 중요도도 굉장히 높다!
나는 적잖은 부담감을 가진 채 작업에 임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입방정 실컷 떨었는데 일이 잘못되기라도 해서 성적이 안 좋으면 어떻게 해?
그렇게 되면 망실살 제대로 뻗치는 거다.
아니, 사실 망신살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총괄 프로듀서라는 자리가 가지고 있는 막중한 책임감. 그 무게를 생각하면 절대 가볍게 행동할 수 없다.
대형 소속사 인기 아이돌의 제작비는 세부 내역을 살펴보면 억소리가 절로 난다.
기사를 찾아보니 엔 플라워 이전 타이트 싱글 뮤직 비디오 제작비에 무려 5억 원을 때려 넣었단다.
여기에 바이럴 마케팅, 의상, 헤어, 곡비, 녹음비, 세션비, 앨범 자켓, 패키지 구성비용을 포함하면 십억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여기서 끝이냐고?
무대 제작비용도 추가해야지!
참고로 엔 플라워는 이전 타이틀 곡 무대 제작비용으로만 1억 원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무를 만들어야지.
댄서, 스타일리스트, 매니저 등의 전담팀도 고용해야지.
그 사람들 밥 안 챙겨 줄 거야?
엔 플라워 멤버 수가 아홉 명인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
이동 비용도 당연히 따로 챙겨야 하는 항목이고.
다 따져보면 기획 시작부터 활동 끝까지 드는 비용은 십 수억 정도는 가볍게 찍는다.
엔 플라워는 인기 그룹이고 팬덤도 빵빵하니 걱정이 없지 않냐고?
천만에.
오히려 시장에서 가장 냉정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안티도 아니고 바로 그 팬덤이다.
정말 예상치 못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파고 들며 따지니까.
지금까지의 작품, 그 이상의 만족감을 줄 수 있어야 본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진영 대표와 팀장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예정이라는 것.
회사의 미래를 견인할 주요 인재 육성에 투자한다는 개념이라나?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게 부담, 책임감을 크게 줄여주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프로듀서, 작곡가로서 신고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제대로 해내야 시장에 내 이름 석 자 걸고 당당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소속사의 전폭적인 지원은 덤이고.
실패하면 난 그 정도는 못 되는 인간이라는 거겠지.
나에 대한 소속사의 지원, 애정 같은 것들도 크게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내가 그들의 신뢰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다시 비참한 과거가 되풀이 될 것만 같았다.
난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음악 작업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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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어요?> 정식 녹음 버전을 받았다.
“와....”
듣는 내내 감탄만 나왔다.
프로 세션의 연주 퀄리티는 미디 작업이 줄 수 없는 깊은 감동과 진한 맛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진영 대표의 보컬 디렉팅!
마이크는 대체 무엇을 사용했는지, 이팩트는 무엇을 어떻게 걸었는지... 학업, 개인 작업 문제로 상세 작업 과정을 보지 못한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아, 역시 난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배워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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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감이 쌓여가는 와중,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일정이 잡혔다.
“안녕!”
“와, 보고 싶었어!”
“잘 지내지?”
문 라이트 멤버들과의 만남
항상 뭉쳐 다니다가 반지희, 주세아, 그리고 내가 JJ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이후부터는 메신저 상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정말 모처럼 만에 식사 약속이 잡힌 것이다.
단골 떡볶이 집에서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나 LK 오디션 봤는데 합격했어!”
“나도!”
“난 다른 곳. 알아봤는데 소문도 좋고 연습생, 아티스트 대우도 괜찮다고 해서 그냥 계약해 버렸어!”
문 라이트 출신 중 세 명이 타 소속사와 연습생 계약에 성공한 것!
심지어 그 중 두 명은 KM, JJ와 함께 또 다른 대형 3사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LK.
힙합 크루 이미지로 운영하는 독보적인 개성의 회사.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꽤 이름 있는 중견 회사, 네오크루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에 연습생으로 입사했다고 한다.
“원래 LK에 같이 시험 봤는데 나만 떨어졌어.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어서 도전한 게 어떻게든 잘 된 것 ㄱ같아.”
하지만 모두가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난 연습생 포기했어.”
가장 숫기가 없었던 한 명은 고민 끝에 가수의 꿈을 포기했다.
백미진.
작은 체구에 새하얀 얼굴.
굉장히 귀여운 매력의 소녀였다.
꿈을 포기하는 게 의아하고, 아쉽게 느껴질 만큼.
그런 그녀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놀라운 사실을 고백했다.
“난 사실 너희들과 어울리며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좋았던 거야. 다들 본격적으로 꿈을 찾아 나섰으니, 이제 내 길을 걸어갈까 해.”
그 수줍고 귀여운 미소에 가슴이 찡해졌다.
그런데 이게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자애들은 다들 울컥한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바다가 될까 무서워 황급히 물었다.
“그게 어떤 길이야?”
“나 사실 어려서부터 프로그램 배우고 있었어. 아버지가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자시거든.”
“아, 그러면 네 꿈이 프로그래머야?”
“응. 언젠가 나만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성공시켜서 아버지 회사에 보탬이 되는 게 내 꿈이야.”
“아버지가 IT 회사 운영하고 계시는구나?”
“응. 크게는 아니고 소소하게....”
그 마음이 굉장하지 기특하다.
손을 뻗어 귀여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줬다.
“정말 장하네. 효녀다 효녀. 다른 애들이 미진이 널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저게 뜬금없이 우릴 디스하네?”
“야! 우리가 뭐 어쨌는데?!”
“나도 집에서 효녀 소리 들어!”
반발하는 애들을 외면하고 말을 이었다.
“가는 길은 달라도 우리는 계속 친구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어. 난 지금까지 그랬듯이 널 계속 돕고 응원할 거야. 알겠지?”
“응! 정말 고마워. 나 감동 받았어.”
“그래.”
실제로 눈물을 글썽이기에 다가가 폭 안아주고, 토닥여줬다.
정말 작아서 폼에 쏙 들어온다.
성격도 착하고 소심하니, 친구보다는 동생처럼 여겼던 아이였다.
그래서 이 순간 진심으로 기원했다.
소망하는 것을 모두 이루고 행복하기를.
그러다 주위가 이상하게 조용해서 돌아봤더니.
“.......”
다들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야, 나도 응원해줘.”
“왜 미진이만 예뻐해? 지금 사람 차별 대우하는 거야?”
“나도 인기 가수가 되고 싶으니 빨리 응원해줘.”
“......”
무슨 애들도 아니고.
그런데 표정이 굉장히 진지하다.
어쩔 수 없이 한 번씩 포옹하고 등을 토닥거려줬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꿈에 대해 간절한 것 이상으로 큰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를 간파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 아이들에게는 확신과 응원이 필요하다.
그 순간 나는 진심을 담아 모두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의 프로듀서라는 사실을 잊지 마.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그리고 모두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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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면서 깨달았다.
친구들을 통해 응원과 위로를 받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내면에서부터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때 호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 폰이 울렸다.
단체 채팅방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 우리 문 라이트 해체 하지 말고, 종종 모여 연습도 하고 그러자. 시간 내서 공연 같은 것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
반지희의 제안이었다.
다들 좋다고 난리였다.
팀 여론이 그렇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 그러면 다음 주 금요일까지 엔 플라워 <레몬빛 사랑> 안무 외워와. 앞으로 한 주에 하나씩 숙제 검사한다. ]
팀 결속이 유지되려면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챙기는 것은 프로듀서인 내 역할이었다.
[ 행사 일정은 내가 확인해보고 공지할게.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하자. 아, 그리고.... ]
한 마디 더.
[ 이제부터는 나하고 명중이도 멤버로 참여할 테니 그리 알아. 반박은 받지 않는다. 이상 공지 끝! ]
채팅창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동 모드로 설정해 놓은 휴대폰이 몸살이 날 정도로 웅웅 울려댄다.특히 명중이는 내가 메신저 응답을 안 하니 전화까지 걸고 난리도 아니었다.
녀석의 당황한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더불어 앞으로 문 라이트의 활동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친구들끼리 모여 부담 없이 춤과 노래, 공연을 즐기는 모임.
가끔은 함께 어디론가 놀러 가거나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고.
여유가 되고 내키면 개인 앨범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추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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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주가 지났다.
그 날은 이른 아침부터 학교를 빠지고 회사로 향했다.
연습실.
“준비 됐지?”
“네.”
“그러면 가자.”
나와 장진영 대표는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오늘은 바로 <시간 있어요?> 뮤직 비디오 촬영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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