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촬영장에서
뮤직 비디오 촬영 현장의 인내의 연속이다.
가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고,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조금 다른 장소에서, 의상을 쉴 세 없이 갈아입고 화장과 스타일링을 계속 수정하며 대기해야 한다.
그래도 이번 같은 경우는 조금 낫다. 주요 출연진들은 클래식 수트와 중절모를 착용할 거거든. 최소한 헤어만큼은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 아재 개그 미안하다.
다행이라면 내가 메인 출연자는 아니라는 것.
이번에 나는 댄서 중 한 명일뿐이다.
그래서 몇 가지 씬 촬영을 제외하면 특히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노트북을 챙겨왔다.
틈틈이 작업 좀 하려고.
“이분이 정상구 감독이셔. 우리나라 뮤직 비디오 가장 잘 만들고 히트작 많으신 분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
나중에 내가 데뷔한 KM 아이돌 그룹 뮤직 비디오도 만들어주신 월드 클래스 감독님이시니까!
“안녕하십니까! JJ 전속 프로듀서 김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려 보이는데... 정말 장진영 대표님 곡 만들었어요?”
“네. 제가 초창기 가이드 버전도 들려드렸었죠? 그 목소리 주인공이기도 해요.”
“오, 참 인상 깊게 들었는데....”
순간 나를 향한 감독님의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면 착각이었을까?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시던 감독님이 넌지시 묻는다.
“그러면 혹시 악기 연주도 잘해요? 피아노, 기타, 드럼, 이런 것들.”
“네. 프로 수준은 아니어도 반주 정도는....”
“아니에요! 진짜 잘해요! 특히 기타 연주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히다니까요?”
마치 아들 자랑 하듯 신나서 내 칭찬을 늘어놓는 우리 대표님. 고마운 마음과 별개로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게 현실로 이뤄졌다.
“잘 됐네. 그러면 비중을 조금 높여보죠. 무대에서 홀로 핀 조명 받으며 피아노 연주하는 장면 있죠? 그거 배우 말고 이 친구보고 직접 연주해보라고 하면 되겠네. 분위기에 맞는 재즈 연주로. 그것도 가능한가요?”
“그....”
“당연히 가능하죠! 할 수 있습니다! 믿고 맡겨주세요.”
“좋아요. 그러면 당장 한 번 확인해 봅시다!”
아주 신이 난 두 중년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거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대체 돈을 얼마나 때려 부은 건지, 정말 내가 생각하고 구상했던 것 이상의 재즈 클럽 세트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제작비만 5억 이상은 썼겠는데?
일단 감독님도 우리나라 뮤직 비디오 원톱 정상구 감독님이고....
감독님에게 내게 무대 중앙을 가리키며 주문하신다.
“저기 하얀색 빈티지 피아노 보이죠? 저거 가지고 한 번 연주해 봐요. 그림 좀 봅시다.”
“네.”
무대에 올라가 피아노 건반을 눌러본다.
“음, 조율이 안 되어 있네.”
마침 촬영 현장이었기에 간단한 조율용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마트 폰을 꺼내서 조율 어플을 다운, 이를 이용해 조율을 시도한다.
지켜보던 장진영 대표가 다가와 신기한 얼굴로 물었다.
“너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이전 삶에서 조율사 선생님께 전수 받았지.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간단히 말했다.
“그냥 집에서 못 쓰는 피아노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터득하게 된 거예요.”
“그래? 신기하네.”
조율을 마치고 다시 건반을 눌러본다.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볼까?
다시 옷을 갖춰 입고, 중절모를 착용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무대 촬영 현장에 수많은 스텝, 출연진이 몰려와 지켜보는 상황.
정상구 감독님을 확인하니 언제든 들어가도 좋다며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신다.
무엇을 연주할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
오늘 촬영 현장에서 질릴 정도로 듣게 될, <시간 있어요?>즉흥 재즈 편곡 버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유행했던 소울 재즈 풍으로.
흥겨운 피아노 리듬에 어깨가 절로 들썩거린다.
뭔가 아쉽다.
드럼과 브라스만 있으면 완벽한 뉴욕 재즈 클럽 느낌인데....
어느 새 주변이 조용해졌지만 난 이조차 인식 못하고 있었다. 왜냐면 지금 내 세계에는 소울 재즈만이 가득했으니.
그것을 인지한 것은 연주가 끝났을 때.
“오오오!”
“멋지다!”
“와, 잠깐이지만 뉴욕 재즈 클럽에 온 느낌이었어.”
박수와 환호성에 정신줄을 다잡은 난 멋쩍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대표님은 말할 것도 없고.
“와, 그림이 굉장히 멋진데? 이거 제대로 한 번 뽑아 봅시다. 다양한 버전으로.”
정상구 감독님 역시 물개 박수까지 치며 기뻐하고 있었다.
뭔가 큰 영감을 받기라도 한 듯한 얼굴.
이후 나는 급류에 휩쓸리듯, 무대로 떠밀려진 채 다양한 옷차림으로 피아노 연주 장면을 촬영했다.
중절모를 썼다가, 벗었다가, 머리를 이리 볶고 저리 볶기도 하고.
입고 있던 클래식 수트를 일부러 흐트러뜨려서 자유로운 풍으로 연주를 해보기도 하고, 와이셔츠만 입고 윗단추 두 개를 풀고 연주를 하기도 하고.
... 이게 내 촬영장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오케이. 좋았어!”
정신없이 지시를 따르다 보니 연주 씬 촬영 종료!
배고프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두 시라고?!’
미쳤다.
나 분명 오후 열 시 조금 넘어서 촬영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정상구 감독님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분은 저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그대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주변 사람들 힘들게 만드는 거.
대신 결과물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아내니 업계에서는 저 분에게 의뢰하지 못해 안달이다.
장진영 대표가 미안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배고프지? 빨리 밥부터 먹자. 같이 먹으려고 나도 쫄쫄 굶으면서 기다렸어.”
감독님께도 권유했더니 자기는 괜찮다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먹으라고 하더라.
식사를 마친 후 긴급회의를 진행했다.
정상구 감독님 한 가지 큰 제안을 한다.
“뮤직 비디오 구성을 조금 바꿔 봅시다.”
워싱턴 스퀘어 블루노트재즈 클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밤거리.
클래식 수트를 차려 입은 장진영이 등장해 유명 재즈 클럽의 간판을 바라본다. 그 앞에 많은 손님들이 줄지어 서 있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을 한다.
좁은 출입구를 지나니 1960년대, 뉴욕 재즈바 감성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듯한 클럽 공연장이 드러난다.
그는 바에 앉아 칵테일을 한 잔 주문하고, 무대 위 공연을 감상한다. 금방 공연이 끝나고 박수가 울려 퍼진다.
이어 누군가가 무대로 오르는데 놀랍게도 동양인 소년이다. 웅성이는 청중들. 장진영 또한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피아노 앞에 앉은 동양인 소년이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웅성임이 잦아든다.
청중들의 표정에 의문이 사라지고, 흥미와 놀라움이 서서히 떠오른다.
장진영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멋진 연주를 선보인 소년이 갑자기 고개를 젓더니 연주를 멈춰 버린다.
깔끔하게 차려 입은 수트 상의와 넥타이까지 벗어던지고, 와이셔츠 윗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은 뒤 일어서서 연주 자세를 취한다.
그러는 동안 한 무리의 밴드가 올라와 각자 자리를 잡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렇게 시작되는 경쾌하고 웅장한 빅밴드 사운드.
자유로운 모습으로, 하얀 와이셔츠 자락을 흩날리며 춤을 추듯 피아노를 치던 소년의 모습이 멍하니 있던 장진영의 눈동자에 비춘다.
갑자기 무대로 뛰쳐 올라가는 장진영.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중절모를 고쳐 쓰며 심상치 않게 온 몸으로 리듬을 타는 모습에 환호와 흥미를 보일 뿐.
“이렇게 노래가 시작되는 거죠! 어때요?”
나와 장진영 대표의 시선이 마주친다.
“이렇게 되면 제 비중이 너무 늘어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 난 괜찮은 제안 같아. 이 곡을 만든 사람이 너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구성도 훨씬 드라마틱하면서 역동적인 느낌도 사는 것 같아.”
이후 원래 연출이었던.
올드 재즈바 인테리어가 사이버 펑크 감각이 입혀진 최신 클럽바 느낌으로 바뀐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연이 펼쳐진다.
“끝나면 무대가 다시 원래의 올드 재즈 바로 돌아오고, 같이 춤추며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은 어? 방금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꿈을 꾼 건가? 이런 표정을 짓다가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장진영은 소년을 자신의 소속사로 캐스팅하기 위해 피아노를 바라보지만, 소년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후의 이야기는 뉴욕 어딘가에 있는 소년을 찾는 대 모험 극을... 아니지. 아무튼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아요?”
“네. 좋네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렇게 하시죠!”
“역시 장 대표님은 뭔가 좀 아시네요. 그러면 그렇게 해봅시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모습에 난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길이 펼쳐지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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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중에는 외국인들이 많았지만, 미국 유학파 출신인 장진영 대표와 정상구 감독 모두 영어가 능통했기에 현장은 무척 밝았다.
반면 나는 영어 회화가 굉장히 약해서... 말을 걸어올 때마다 쩔쩔매야 했다.
장진영 대표가 혀를 차며 놀렸다.
“너도 못하는 게 있구나.”
“저도 사람인대요.”
“너 오늘부터 영어 공부 집중적으로 좀 해라. 나중에 해외 진출하게 되면 꼭 필요해.”
“네? 해외 진출이요?”
“그것도 그렇고 나 해외 일정 많은 거 알잖아. 너도 같이 가야되는데 그때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네? 일정에 같이 간다고요?”“내가 너 데리고 다니면서 프로듀싱이랑 이것저것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 왜 모르는 척 하고 그래?”
“아....”
“안 되겠다. 너 회사 오면 나한테 한 시간씩 영어 레슨 받아라. 어차피 우리는 대화도 많이 하는데 그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게 좋겠다.”
난 그냥 뮤직 비디오 촬영 도우러 온 것뿐인데.
왜 점점 일이 많아지는 것 같지?
본 촬영이 모두 끝났을 때에는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주인공인 장진영 대표님 이상으로 나와 댄서들이 고생 진짜 많이 했다.
특히 나를 비롯한 메인 댄서들을 아주 죽어나야 했다.
쉴 세 없이 격렬한 댄서를 반복해야 했으니까.
조금이라도 요령을 부리려고 하면 정상구 감독님, 혹은 안무 단장님이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지적을 하시더라.
“민아! 벌써 지쳤어?!”
“야! 내가 너 나이 때는 하루 종일 춤만 춰도 체력이 남아 돌았어!”
조금 친해졌더니 아주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들들 볶더라.
그래서 이를 악물고 춤을 출 수밖에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메인 댄서 포지션 중에서도, 장진영 대표님 바로 옆에서 춤을 추게 되었으니 더 동작이 살아나야 했다.난 열 몇 시간 넘게 춤을 췄지만, 방금 춤을 추기 시작한 것처럼 쌩쌩하고, 즐겁고 신나 보여야 하니 정말 미치겠더라.
... 이렇게 부려먹고 아무것도 안 주기만 해봐라.
“고기 먹으러 가자. 내가 소고기 살게! 댄서들 고생 많았어요!”
“와아!”
다행히 보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장진영 대표가 특히 고생한 안무 팀을 모두 데리고 최고급 한우 집으로 데려간 것이다.
정말 원 없이 먹었고, 개인적으로 출연료 역시 섭섭하지 않게 약속 받았다.
워낙 시간이 늦었기에 대표님이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뮤직 비디오 편집본 나오려면 한 달 정도 걸릴 거야. 아무래도 세트장 규모도 크고 디테일도 많다 보니....”
체력저하로 비몽사몽 중인 나를 향해, 장진영 대표는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보자.”
그 날은 들어가서 어떻게 씻고 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에서 깼을 때 몸은 굉장히 아팠지만, 입금 완료 메시지를 보니 그래도 기분은 굉장히 좋더라!
자, 돈이 생겼으니 바로 비트 코인부터 사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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