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심상치 않은 조짐 (2)
“이거 봤어?!”
“......?”
반지희가 보여준 것은 본인의 휴대폰 화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적인 SNS ‘블루버드’의 화면이었다.
“나 SNS 안 하는데?”
“뭐? 연예인 하겠다면서 아직도 이걸 안 한다고? 제 정신이야? 미쳤어?!”
“그게 그렇게까지 욕먹을 일이야?”
“당연하지! 심지어 미국 대통령과 유명한 기업인들도 하는 건데... 블루버드 계정은 자기 PR 시대의 필수품이란 말이야!”
나도 안다.
그럼에도 쳐다도 보지 않고 있던 것은 이전 삶의 영향이었다.
숨만 쉬어도 욕먹었던 상황에 SNS는 무슨....
“그래서 이게 어쨌다는 건데?”
“실시간 트렌드에 <시간 있어요?> 뮤직 비디오가 떴어!”
“흠.”
그럴 수 있지.
지금 차트를 장악하고 있는 히트곡이니까.
그러나 이어진 말에 더 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참고로 이거 미국 실시간 트렌드야.”
“... 뭐?”
@
JJ 엔터테인먼트에 비상이 걸렸다.
새벽 시간. 블루버드 미국 실시간 트렌드 순위에 느닷없이 <시간 있어요?>가 떴기 때문이었다.
오전 열 시 정각.
급히 회의실에 도착한 장진영 대표가 미리 모여 있던 팀장급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아이작 이스트라고 아십니까?”
신인 개발팀장 이정훈의 질문이었다.
“음... 아, 기억났다. 래퍼 아이작 이스트. 뉴욕 롱아일랜드 출신 힙합 뮤지션.”
“그리고 또 하나 있죠. 재작년 그레미 어워드 수상자.”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요?”
“본인 블루버드 계정에 <시간 있어요?>뮤직 비디오를 올리면서, 혹시 이 음악에 대한 정보 알고 있는 사람 있냐고 물어본 게 화제가 됐어요.”
“아...!”
장진영이 흥분했다.
미국 음악씬은 언제나 그의 목표였기에.
“그레미 어워드 수상자가 내 노래를 거론하다니...!”
그런데 어째 표정들이 영 이상했다.
“왜 그래요? 제가 모르는 일이 또 있어요?”
“사실 그 사람이 소속된 레이블에서 아침에 연락을 해왔어요.”
“어, 정말요? 뭐래요? 같이 공연하재요? 아니면 미팅 약속이라도...?”
“그게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이정훈 팀장은 에라 모르겠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 뮤직 비디오 처음에 나오는 재즈 피아노 연주 있잖아요.”
“네? 아, 그거 민이가 즉흥 연주했던 그 장면... 왜요?”
“그 파트를 따로 떼서 자기가 새로 리메이크해보고 싶다고....”
“.......”
그제야 장진영은 상황 파악을 끝낼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자신의 뮤직 비디오와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니라....
“민이가 만든 그 재즈 파트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예요?”
“네. 뭐... 요약하자면 그렇죠.”
“하....”
맥이 풀린 장진영이 힘없이 주저앉자 이정훈 팀장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뮤직 비디오에 대해서 신선하고 구성도 괜찮았다며 칭찬했습니다. 샘플링을 허락해준다면 공동 작곡으로 이름도 올려주고 자기가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에서도 곡을 다뤄주겠다고....”
“기승전 민이네요. 뭐....”
“그래도 좋은 일 아닙니까? 어쨌든 그레미 어워드 수상자. 지금 미국 재즈 힙합 씬에서 가장 주목 받는 거장의 컨택인데. 이것이 계기가 되면 어떤 인연으로 발전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러네요?”
“그리고 제가 알아보니 이 아이작 이스트가 소속된 매니지먼트가 ‘블랙 로즈’더군요.”
“아, 블랙 로즈. 거기 굉장히 유명한 곳이잖아요. 스타급 흑인 음악 뮤지션들 대거 소속되어 있기도 하고.”
“중요한 건 이 블랙 로즈의 CEO가 아이작 이스트와 부부 관계라는 점입니다.”
“그래요?”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나가느냐에 따라, 좋은 기회로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무룩해져 있던 장진영의 얼굴이 무척 진지해졌다.
고민을 끝낸 장진영이 이정연 팀장을 보며 말했다.
“이번 일 정연 팀장에게 맡길게요.”
“네.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 가져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아이작 이스트. 재작년 그레미 어워드 수상자.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재즈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을 섭렵했었다고 하네. 수상곡은 like my father라는 재즈 힙합 음악이야.”
“직역하면...아버지처럼, 이런 뜻인가?”“일단 곡부터 들어보자고.”
그루브한 힙합 비트에 빈티지한 피아노 연주가 따뜻하게 고막을 감싸는 느낌이다.
이어진 랩은 아버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담고 있다.
무명이었지만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했던 재즈 뮤지션에 대한 찬가.
그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그처럼 가족을 사랑하며.
그처럼 사랑하는 음악을 평생 즐기고 싶다는 순박한 바람이 담겨 있다.
“굉장하네. 이건 재즈와 힙합. 두 음악을 정말 완벽히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어야 만들 수 있는 음악이야. 거장이네.”
“그래? 난 재미없는데....”
“......?”
반지희의 목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우리들의 머리 위. 반지희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명중은 혀를 차며 말했다.
“가수를 하겠다는 애가 이 엄청난 음악의 진가를 알아보지는 못할망정 재미없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니, 말세로군.”
“뭐?”
지희의 눈썹이 삐쭉 올라간다.
“이건 재즈와 힙합의 정수를 절묘하게 녹여낸 굉장한 예술작품이다. 평범한 대중이 두 장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려움, 거부감 같은 요소를 분석하고 이들을 제거하거나 최대한 순화시켜 부드럽게 버무렸지. 가수라면 이 정도 감상은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야. 너는 세상 모든 음악을 다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어? 음악은 취향대로 듣는 거야!”
“그건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 음악인으로 살 결심을 했다면 다양한 음악 장르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과 안목, 이해력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하는 거다. 민이처럼.”
어... 저기, 나도 너 정도 말할 자신은 없는데.
그런데 그 말이 지희에게는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 반박을 못하고 있으니.
최명중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TV 출연하는 요리사들만 봐도 그래. 전공이 아닌 요리라도, 지식만큼은 전문가 못지않지. 나는 그런 자세야 말로 성공의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
가끔 느끼지만.
이 녀석의 사고방식은 여러모로 남다른 면이 있다.
굉장히 크게 될 녀석이야. 이 녀석.
“너희들이랑 안 놀 거야!”
결국 삐질대로 삐진 반지희는 버럭 소리치고 어디론 가로 가버렸다.
“이 시간이면 다른 친구들과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을 시간이군. 이런 일로 토라질 녀석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자기도 아차 싶었던지, 최명중의 귓불이 빨개져 있었다.
이 녀석 혹시...?
@
[ 그레미 수상자 ‘아이작 이스트’ 장진영의 <시간 있어요?> 극찬! ]
[ 미국에도 통한 장진영 표 재즈 댄스 음악! ]
뉴스 기사가 난리였다.
모처럼 함께 회사로 향하는 길.
내 옆에 앉은 반지희가 내 휴대폰을 같이 바라보며 묻는다.
“이러다가 대표님 미국 진출하는 거 아니야?”
“음, 충분히 가능성 있지!”
성공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회사 정문에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은 주세아가 있었다.
난 두 소녀에게 제안했다.
“들어가기 전에 근처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할까?”
“좋지!”
“응!”
눈에 띄게 좋아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별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이 꽤나 보인다.
모두 연습생들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일어서서 큰 소리로 인사하는 연습생 친구들.
... 나한테 한 거야?
왜?
지희가 나름의 답을 알려준다.
“너 우리 프로듀서잖아. 심지어 지금 굉장한 핫한 음악의 작곡가이기도 하고. 상급자 비슷한 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주세아.
음, 그런가?
저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네. 안녕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적당히 인사를 받아주고 음료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는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반지희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회사에 있을 때만이라도 같이 다니거나 아는 척 하는 거 자제하는 게 좋겠다.”
“왜?”
“말했듯이, 넌 나이는 어리지만 우리 회사에 꽤 영향력 생긴 프로듀서잖아. 우리 입장에서야 친구니까 친한 척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쟤들은 조금 불합리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지희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만약 우리가 데뷔 조에 들게 되면 그게 다 네가 뒤에서 밀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 소문이 데뷔 이후에도 따라다닐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겠네.”
“우리에게 그런 소문 따위를 잠재워버릴 정도의 역량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처신 잘해야지. 내 생각에는 분명 이 문제로 위에서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주세아까지 저럴 정도면... 확실히 생각해 볼 법한 문제라는 거다.
그나저나 애들이 참 기특하다.
이런 생각도 할 줄 알고.
음료가 나온 즉시 우리는 함께 매장을 떠났다.
문을 나설 때까지 시선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지희의 추측은 현실이 됐다.
장진영 대표. 이정연 팀장님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
“야. 너 친구들 있지? 반지희. 주세아 두 연습생.”
“네. 왜요?”
“뒤에서 말 많이 나오더라. 그 두 사람 사실상 데뷔조 정해진 상태에서 연습생 시작하는 거 아니냐. 불공평하다. 뭐....”
“누가 그래요?”
“신인 개발팀에서 모니터링하지. 연습생은 그 쪽 관리잖아.”
“아하.”
“우린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게 연습생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데뷔라는 게 인생과 직결된 문제라 외면할 수도 없어.”
“음.”
“사실 저번 평가 때 두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내린 것도 네 생각해서 좋게 말해준 거 아니냐. 뭐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나봐.”
내뱉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애써 참아야 했다.
두 사람이 사전에 내게 한 말이 있으니,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성격을 억눌러야 했다.
“안 그래도 아까 카페에서 그 애들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 뭐라고 했는데?”
“데뷔가 확정될 때까지는 회사에서 당분간 아는 척도 하지 말자고. 애들이 경쟁에 대해 불합리하게 여길 수 있다나?”
“오, 그런 말을 했어? 장하네.”
“기특하죠. 그래서 지금 막 부글부글 끊고 있는데 꾹 참고 있는 거예요.”
“그래. 너도 장하다. 고기나 더 먹어.”
“그나저나 여기 진짜 맛집이네요.”
“그치? 여기 내가 얼마 전에 뚫은 집이야.”
식사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우리 뮤직 비디오가 블루버드 미국 실시간 트렌드에 오른 거 알고 있지?”
“네. 학교에서 애들이 말해주더라고요. 아이작 이스트라는 재즈 힙합계의 거장이라면서요? 미국 진출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조금 상황이 웃기게 됐어.”
그가 뮤직 비디오에 흥미를 보인 건 맞지만 원인은 곡의 테마.
그 중에서도 내가 인트로 부분에서 연주한 재즈 피아노에 꽂혔다는 것.
“실제로 문의가 왔거든. 그 파트 자기가 가져다가 써도 되겠냐고. 허락해주면 자기 라디오에 홍보도 해주고 뭣도 해주고....”
“좋은 기회 아닌가요? 하기에 따라 무려 그레미 어워드 수상자와 친분을 맺을 수도 있는 일인데.”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정연이에게 이번 일 맡겼어.”
“탁월한 선택이네요. 정연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죠. 우리 에이스잖아요!”
“그렇지! 네가 이제 좀 뭔가 아는 구나?”
“정연 팀장님 능력이라면 이 기회에 미국 진출로 개척도 해내실 지 몰라요!”
상추쌈을 예쁘게 만들어 입에 넣으려던 팀장님은 조용히 두 손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그래? 먹어!”
“드세요. 우리 신경 쓰지 마시고.”
이정연 팀장님은 처음으로 내게 인상을 쓰며 한 마디 하셨다.
“정말 못됐어.”
그런데 얼마 후.
우리 이정연 팀장 님이 엄청난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