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돌아왔다-55화 (55/205)

< 55화. 촬영장에서 >

뮤직 비디오는 많은 비용과 인력, 시간이 투자되는 대규모 작업이다.

쉽게 쉽게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늦은 오후, 내 작업실에 방문한 대표님이 여러 가지 결정 사항을 알려주신다.

“촬영은 일주일 동안 진행될 거고, 네가 아는 것처럼 원평 해수욕장과 소나무 숲. 제주도 여러 장소에서 진행할 거야. 화보 촬영도 같이 진행할 거고.”

“촬영 기간이 일주일이라고요?”

“두 편을 동시에 촬영해야 하니까.”

“아....”

“너 데뷔는 안 했어도 잘 알고는 있을 거야. 신인에게 이 정도로 지원해주는 경우가 없다는 거.”

“잘 알죠. 데뷔 싱글 두 트랙을 모두 뮤직 비디오를 붙여준다니....”

“그만큼 네가 힘들어지겠지만, 너 이상으로 감독님과 많은 회사 관계자들, 네 매니저까지 일이 굉장히 많아진다는 거 명심해.”

대표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단단히 각오하고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 알았어?”

다음 날에는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갔다.

공황장애 때문이었다.

전생의 이야기를 그대로 했다가는 그대로 미친놈이 되어버리니, 상담 내용을 적절히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폭력을 당한 경험 때문인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두려워졌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굉장히 흔하다고 한나.

내 이야기를 들은 의사 선생님은 몇 가지 처방을 내려주셨다.

“공황 발작이 오면 우선 눈앞에 보이는 세 가지에 집중을 하세요. 이를 테면, 지금 눈앞에 뭐가 보이죠?”

“선생님. 조명. 책상이요.”

“그리고 뭐가 들리죠? 마찬가지로 세 가지를 말해보세요.”

“선생님 말소리. 바깥에 차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복도의 걸음걸이 소리요.”

“좋아요. 마지막으로 내가 느껴지는 세 가지. 촉감을 말해볼까요?”

“음, 앉아 있는 의자. 손으로 만져지는 바지의 질감. 그리고 맞잡고 있는 손, 피부의 질감이요.”

“공황발작이 올 때, 그 자체에 집중하면 신경이 더 예민해져서 상황이 악화될 우려가 있어요. 그럴 때는 계속 다른 것에 집중을 해보세요. 가수 데뷔 예정이라고 했죠?”

“네.”

“광장 공포증 처방도 비슷해요. 나로 하여금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관중이 아니라 다른 요소에 몰입해 보도록 하세요. 가수니 음악 그 자체가 될 수 있겠네요. 자기 목소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정신과 진료와 처방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백종훈 단장님의 조언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신기해서 문자를 보냈더니.

[ 당연하지. 내 치료 경험을 전수해준건데. ]

“아, 치료를 받았구나.”

역시, 아프거나 증상이 안 좋으면 괜히 혼자 버티는 게 아니라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해야 한다.

요는 그거다.

수시로 집중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라는 것.

‘앞으로 무조건 노트북과 이어폰, 헤드폰 같은 것들을 들고 다녀야겠군.’

나는 음악을 듣고, 분석하거나 만들 때 가장 집중력이 높아진다.

공황발작 치료를 위해서라도, 이런 집중할 수 있는 거리를 계속 만들어 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분명 나아지겠지?

공황 발작은 불치병도, 죽을병도 아니니까.

@

내 경험에 의하면, 뮤직 비디오는 기다림과의 싸움이다.

물론 이것은 가수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고, 이 촬영을 준비하는 수많은 스텝들은 어떻게든 예정된 일정에 끝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도록 뛰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몸과 마음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가다듬은 뒤, 촬영 당일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 좋은 결과물을 내는 것이다.

이른 아침.

최명규 매니저님과 원평 해수욕장에 도착한 나는 먼저 도착해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들로부터 점검을 받았다.

이후부터는 촬영 시작 사인이 나올 때까지 대기.

그 동안 미리 챙겨 온 액션 캠을 한쪽에 고정시켜두고, 기타를 끌어안은 뒤 바다를 보고 연주를 시작했다.

액션 캠을 촬영하는 건 나중에 개인 콘텐츠로 써먹기 위함도 있지만, 이제부터 시작할 곡 작업을 위한 것이 더 크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한량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이게 도와주는 거다. 괜히 붙어서 거들어주겠다고 해봐야 그러라고 허락할 사람도 없고, 괜히 세팅만 무너지니 감독님이 이놈~ 하실 뿐이다.

오전 열 시.

포토 촬영을 담당해 줄 작가님과 스텝 분들이 도착했다. 즉시 화보 촬영에 돌입했다.

“일단 커버 촬영부터 들어갈게요!”

그때부터는 정말 미친 듯이 온갖 포토 스팟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워낙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작업이니, 날 향해 쏟아지는 많은 시선에 공황 발작이 올라오려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카메라, 옷은 바다나 나무, 하늘 등의 특정 대상에 집중하는 것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음, 이게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정말 괜찮아 지겠는데?

“민이 씨 신인 맞아요? 표정이나 분위기가 굉장히 좋은데요?”

그런데 이게 예상치 못했던 효과를 불러온 모양이다. 몰입력이 굉장히 좋다고 칭찬 받았다!

감정 연기를 요구하면 감정 그 자체에 몰입하려고 굉장히 신경을 썼고, 어떤 상황을 요구하면 상황 자체에 몰입했다.

어떻게든 공황발작을 방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작가님과 촬영 팀에게는 심상치 않은 자질로 비춰진 듯하다.

“커버는 이 정도면 됐고, 바로 이어서 포토카드 촬영 진행할게요.”

무언가에 강하게 몰입한다.

이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를 급격히 높이는 일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공황 발작을 겪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리고 촬영 팀이 만족할 결과물을 빨리 뽑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일이다.나만 익숙해지면 될 일이다.

오후 두 시.

“자, 뮤직 비디오 촬영 시작합니다!”

마침내 본 촬영을 시작했다.

날씨가 굉장히 화창하고 좋은 편이었는데도 감독님을 비롯한 스텝들이 땀을 비 오듯 쏟고 있는 게 보인다.

촬영 시간을 맞추기 위한 분투의 흔적이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야 했다.

“마침내 바다에 도착해서 굉장히 설레어하고, 즐거워하는 거야. 무슨 느낌인지는 네가 더 잘 알거야. 네가 쓴 이야기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콘티 내용을 재구성해본다.

내가 어떤 모습을 연기해야 할지, 벌써부터 몰입에 들어가는 것이다.

위로가 필요해서 무작정 여행을 떠났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동해 바다. 바로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그 감정을 떠올려본다.

그때 나는 모든 것에 힘들어 하던 시기였다.

심지어 날 둘러 싼 빌딩 숲조차도 버거워 했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었기에, 바다가 주는 무한한 개방감이 내 숨통을 트여줬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힘들어하던 시기에 몰입하니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공황 발작이 서서히 올라오려는 것이다.

난 다급함을 느끼고, 걸음걸이를 빨리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미친 듯 바다로 질주했다.

그러다 푸른 동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 순간.

“.......!”

모든 것이 뻥뚫린 듯한.

엄청난 개방감을 느낀다.

날 압박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백사장의 감촉을 느낀다.

그렇게 천천히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바다는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요구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날 맞아주는 건 바람이었다.

바다 바람이 어서 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두 발을 바다에 담그고, 무의식중에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컷! 좋아!”

감독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

그 순간 내 정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점점 조급해지다가 바다를 마주한 순간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기까지. 연기가 굉장히 좋았어. 바로 이거야!”

감독님과 스텝들은 박수까지 치며 원 테이크로 촬영 포문을 연 날 칭찬해준다.

기쁘다기 보다는 얼떨떨했다.

지금 어떤 기분이냐면, 과거에서 갑자기 현실 세계로 돌아온 느낌이다.

마치 회귀한 것처럼.

‘단순히 몰입한 수준이 아니야. 몸과 마음이 잠시 동안 그 시절로 돌아갔었어.’

그 감정의 여운이 굉장히 진하게 남아 있다.

이것 참 묘한 경험이다.

“민아! 지금처럼만 하면 촬영 일정 크게 앞당길 수도 있겠다. 가능하겠냐?”

들뜬 얼굴들.

어쩌면 퇴근을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다들 설래여하는 게 눈에 보인다. 감독님도 마찬가지.

아아! 직장인의 숙명이란....

“해보죠 뭐.”

속으로는 단단히 각오를 굳인 채,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과거의 경험을 감정까지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

정말 고도의 집중력과 극심한 심신의 소모를 요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조건이 충족되면 난 과거 그 시절의 생생한 경험을 다시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연기자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는 컨셉이다.

바다에 위로 받고, 기뻐하는 동시에 아직 모든 것을 떨쳐내지 못해 힘든 모습도 보여야 하니까.

정상구 감독님의 뮤직 비디오 굉장히 섬세한 감정선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별 거 아냐. 저 바다에 힘든 감정들을 하나 둘씩 던지며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제목 그대로잖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걸 한 번에 찾으면 오히려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지만... 나 같은 초짜에게 들이댈 컨셉은 아니지.

하지만 우는 소리를 할 수는 없다.

오늘 촬영을 위해 투입된 자금, 인력, 시간 등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특히나 정상구 감독님은 돈 많이 준다고 움직이는 분이 아니다.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어서, 나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촬영을 준비한 분이니 악을 써서라도 기대에 부응해야 할 판이다.

“너 솔직히 말해.”

“......?”

“뮤직 비디오 촬영 이번이 처음 아니지?”

“당연하죠. 저번에 <시간 있어요?> 같이 작업했잖아요.”

“그거 말고, 네가 주인공인 뮤직 비디오 말이야.”

“아....”

“너 왜 이렇게 잘 하냐? 너 하는 거 보고 있으면 아무리 봐도 신인 같지가 않아.”

그야 첫 촬영도 아니고 신인도 아니니....

“에이, 감독님께서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그리고 다 차려진 밥상이잖아요. 떠먹는 것도 제대로 못하면 가수 때려 쳐야죠.”

“.......”

날 빤히 바라보던 감독님이 툭, 예상치 못한 말을 던지신다.

“너 혹시 연기 배운 적 있어?”

“그럴 리가요.”

사실 배운 적 있다.

KM 엔터테인먼트 시절 트레이닝 일환으로.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배운 적 없으니 뭐....

“아닌데, 분명 어디서 트레이닝 받은 흔적이 보이는데, 시선 처리하는 거 제스처, 감정 표출... 다 훈련 받은 티가 나는데....”

날카로우시네.

그래도 난 잡아뗐다.

“의심스러우면 대표님께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음.”

“저 보컬 트레이닝도 받은 적 없어요. 연습생이 아니라 프로듀서로서 입사한 거여서.”

“그건 나도 알지. 너 하는 게 도저히 초보 같아 보이지 않으니 해본 말이야.”

그러더니 혼잣말을 하신다.

“그러면 순수한 재능인가? 하, 신기하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시던 감독님은.

“내가 근래에 영화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게 하나 있거든?”

예상치 못한 제안을 건네신다.

“생각 있으면 이번 작업 끝나고 나 한 번 찾아와 봐. 오디션 한 번 보자.”

이번만큼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연기자 가능성이 있다니, 내가?

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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