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얼굴 도장 찍기 (1) >
“나 곡 만드는 거 배울래. 가르쳐 ‘줘!’”
“나한테 맡겨놓기라도 했냐?”
“아아~! 장난치지 말고! 나 진지하단 말이야!”
“어디서 아양 질이야?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와서 뻘소리 하지 말고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해.”
내 엄격 진지, 근엄함 발언에 반지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잘 들어.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 띠리리링~ ]
때맞춰 울리는 수업종.
난 시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 쉬는 시간에 듣는 걸로 하자.”
“.......”
1교시가 끝나자마자 날 듯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는 반지희.
갑자기 밀려난 짝궁 녀석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투덜대며 자리를 떠난다.
“네가 분명 그랬지? 게임 아직 안 끝났다고. 기회가 올 거라고 했잖아. 맞지?”
“응. 그랬지.”
“고민했는데, 춤추고 노래 부르는 건 다 고만고만하단 말이야. 내 재능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다른 애들이 나 연습하는 동안 가만히 놀고 있는 것도 아니니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오, 그래서 곡 만드는 것을 비장의 무기로 삼겠다?”
“바로 그거지.”
난 어느 새 내 앞자리를 차지한 최명중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안 돼. 불가능한 일이야.”
냉정하지만 정확한 판단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달리 반지희가 버럭 화를 낸다.
“뭐야! 나도 마음먹으면 할 수 있거든?”
“넌 미디 작업 같은 어렵고 복잡한 거 못해. 결정적으로 컴맹이잖아.”
“웃기네. 나 컴맹 아니거든? 나 맥북 있는 여자야!”
“그거 사실상 액세서리 아닌가? 그거 가지고 하는 게 뭔데?”
“윽....”
“미디 작업은 너랑 안 맞아. 그건 포기해.”
“.......!”
충격 받은 반지희.
난 감탄하며 말했다.
“너 참 쓸데없을 정도로 냉정한 녀석이네.”
“친구로서 필요한 조언을 한 것뿐이야.”
그런데 반지희도 화는 나지만 그 말을 인정한 모양이다.
부들부들 대다가 축 쳐진 모습으로 중얼거린다.
“그건 그래. 너희들 미디 하는 거 보니 난 죽어도 못하겠다 싶더라고.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평생 곡 같은 거 못 쓰는 건가? 그냥 주는 대로 불러야 해?”
“그건 아니지. 일단 작사라는 것도 있고....”
“나 글 쓰는 재주 없는데....”
“.......”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난 진지하게 물었다.
“넌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니?”
“예쁘잖아.”
“그게 네 실력이냐? 부모님 작품이지.”
“몸매도 좋아!”
“그것도 사실 타고난 거지. 그리고 사실 연습생들 압살할 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잖아.”
“으...성격 활발하고 리더십도 있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
“그런 쓸데없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걸 말하라고.”
계속되는 팩트 폭격에 견디다 못한 반지희는.
“됐어! 너 진짜 싫어!”
울먹이며 뛰쳐나갔다.
후우, 아직 어리다니까.
그런데 날 향한 최명중의 시선이 어딘가 불손하다.
“너야 말로 과할 정도로 냉정하군.”
“......”
반지희의 심정은 이해한다.
비장의 무기를 갖추고 싶겠지.
자신만의 남다른 경쟁력!
2교시 수업 시간 동안 고민해본 뒤, 쉬는 시간 시작과 함께 녀석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봐.”
쿵쿵, 센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또 다시 짝꿍을 밀어내고 앉는 반지희.
“왜.”
굉장히 퉁명스럽다.
최명중도 자연히 내 앞자리에 앉더니 가만히 지켜본다.
“내가 생각해봤어. 너에게 장착해 줄 수 있는 무기에 대해서.”
“그래?”
한순간에 태도 돌변.
삽시간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 웃음만 나왔다.
귀여운 녀석.
“그거 알아? 나처럼 혼자 음악 작업을 다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업무를 분업해서 하는 팀 단위로 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
“그래?”
“멜로디 라인을 만드는 탑 라이너. 미디로 편곡을 하는 트랙 메이커. 혹은 비트 메이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명중이는 트랙 메이커와 사운드 메이킹에 자질이 있는 편이야. 하지만 탑 라인 작업은 또 다른 문제야. 이 쪽은 감성과 센스가 크게 차지하는 부분이거든.”
난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지희에게 말했다.
“너 탑 라이닝 한 번 배워볼래?”
모든 창작이 그렇겠지만, 작곡 역시 기술과 감성의 조화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굳이 따지면.
보컬 멜로디에 해당하는 작곡, 탑 라인은 감성의 영역이다.
편곡에 해당하는 트랙 메이커는 철저하게 기술과 분석의 영역이다.
‘명중이는 트랙 메이커로서의 자질이 있지.’
나는 쉬는 시간을 투자해서 반지희에게 탑 라이닝에 대한 기초적인 강의를 해줬다. 사실 이 분야도 파고 들기로 마음먹으면 끝도 없지만... 내 생각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타고난 감성, 센스가 받쳐주지 않으면 이건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
과연 지희에게 이 분야에 대한 재능이 있을까?
‘재능도 재능이지만 탑 라이닝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지. 그 혹독함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각오와 근성이 필요한데 과연....’
이건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그만큼 절실하다면, 뭔가 보여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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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반지희는 연습실에서 한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쟤 언제 나갈 것 같아?”
“글쎄 내가 보기에 당장은 어려울 것 같고... 내년까지는 버티지 않을까 싶은데.”
“네년까지? 그렇게 오래?”
“재 연습 하는 거 보면 각 나오지 않아? 친구가 잘 나가는 프로듀서에 초단기 데뷔 조에... 백이 든든하니 나라도 버틸 것 같은데.”
“하긴... 그 김민이라는 애. 엄청 잘나간다며? 거의 대표님 양아들 수준이라던데....”
“좋겠다. 나도 그런 백이 있었다면....”
정말 한심한 일이다.
주세아를 질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니까,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어떻게든 위안을 삼으려는 것이다.
곧 죽어도 본인 탓은 하지 않는다.
든든한 배경이 없어서.
누가 치사한 방법을 썼기 때문에.
‘그저 남탓. 남탓....’
속으로 분을 삭이는데 친하게 지내는 몇몇 연습생이 다가와 위로해준다.
“언니 무시해요. 자기들은 뽑히지 못해서 열등감 폭발해서 저러는 거예요.”
“웃기는 애들이야. 그냥 본인들이 부족해서 그런 걸 왜 자꾸 남 탓을 하는지 모르겠어.”
연습생이 된 이후 알게 된 사이지만, 저렇게 남탓 하고 사람 험담만하는 못난이들에 비하면 백만 배는 나았다.
‘이런 애들이 성공해야 하는데.’
곧 트레이너가 들어오고, 본격적인 레슨이 시작됐다.
험담하던 아이들,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아이들. 주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무관심하던 아이들.
모두가 이 순간만큼은 전력을 다해 춤을 추고 있었다.
수준 차이를 판가름하기 어려울만큼 모두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내가 죽어라 열심히 하면 이 애들을 앞지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역시 이대로는 안 돼, 나만의 확실한 경쟁력이 필요해.’
그녀의 머릿속에 탑 라이너라는 단어가 확실히 각인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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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하자. 응?”
“왜 자꾸 지옥 길로 절 끌고 가려고 하세요? 제자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야! 그게 왜 지옥길이야? 이거 제작사, 방송사에서도 분명 잘 될 것 같다고, 좋은 기획이라고 칭찬했단 말이야.”
“아이고, 그러셨어요?”
“너 나 안 믿어?”
“원래 백퍼센트 믿었는데 이번 일로 많이 깎여나갔어요.”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나 진짜 섭섭하다!”
스승이기는 제자 없다고.
나잇값 못하고 징징대는 대표님의 모습에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같이 가게 된 첫 기획 회의.
제작사와 방송사 관계자들이 모두 참여할 예정인 이번 회의는 DMC 뮤직 넷 사옥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내가 네 자랑 엄청나게 해놨단 말이야. 자식이, 이렇게 결국 따라올 거면서 그렇게 빼고 말이야.”
차를 운전하며 대표님은 싱글벙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난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텐 믹스 (TEN MIX)
걸 그룹 ‘에버 가든’ 멤버를 뽑기 위한 JJ 엔터테인먼트와 음악전문 채널, ‘뮤직 넷’의 합작 프로그램.
원래는 ‘나인 믹스’라는 이름이었고, 말 그대로 아홉 명이 출연해 경쟁했다.
‘주세아가 추가된 것 때문에 텐 믹스로 이름이 변경 된 거겠지?’
사기 캐릭터가 등장한 이상 1위는 정해진 거나 다름 없다.
실력이고 나발이고, 비주얼이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멤버들은 잘 보이지도 않게 될 테니.
‘그것보다는....’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이런 것들이 아니다.
어쨌든 발을 들이게 된 이상,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이 프로그램은 무조건 대박 나야 한다.
‘일단 더러운 경쟁 시스템부터 손 좀 봐야겠지.’
대표적으로 메이저 팀 마이너 팀의 차별 요소.
이런 식의 자극적인 요소는 마이너스일 뿐이다.
실제로 이런 부분이 도가 지나쳐서 나중에 에버 가든 멤버들은 이 프로그램을 언급하는 것조차 질색했다. 장진영 대표가 오랜 시간 욕먹었던 이유였기도 하고.
‘그리고 썩은 사과를 제때 골라내야지.’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지금 열 명의 데뷔조 속에는 썩은 사과가 하나 있다.
심지어 그 썩은 사과는 최종 멤버로 발탁되어 에버 가든으로 데뷔까지 하게 된다.
직후 팀에 어마어마한 핵폭발을 일으킨다.
‘터트리는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한데....’
고민하는 사이 뮤직 넷 사옥에 도착했다.
회의실에 제작사와 방송사 측 인원이 이미 착석해 있었다.
“장 대표님에게 제 2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천재 소년인가요? 화면보다 훨씬 잘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춤도 잘 추고 음악도 잘 만들 수가 있는 건지... 노래 잘 듣고 있어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보는데 이상하게 내 젊은 시절이 계속 떠오르더라고!”
“감사...네?”
양심 어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회의가 시작됐다.
전생에서 TV로 다 본 덕에 알고 있는 내용들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이미 구성이 어느 정도 다 정해진 상태에서, 그것을 확정짓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도 굉장히 화기애애하다.
“자, 순서 하나하나 확인해볼게요. 우선....”
어디, 내가 나서서 분위기 좀 깨볼까?
“의견 있습니다.”
집중되는 시선.
“제가 내용을 듣고 계속 생각했던 게 있는데, 우리 대표님의 방식과 너무 맞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눈에 띄네요.”
“그런가요? 예를 들면 어떤 부분이죠?”
방송국 CP님이 관심을 드러낸다.
“이를 테면 탈락자를 멤버들보고 직접 호명하게 하는 방식이라든지, 메이저 팀, 마이너 팀에 차별대우 요소를 지나치게 투입한 부분이라든지.”
난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평소 인성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요하면서, 우리 소속사는 외모나 실력보다는 인성을 더 중요하게 본다고 말했던 대표님이 정작 방송에서는 이렇게 잔인하고 비교육적인 일을 주도한다니, 이거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요? 제 생각에는 엄청 항의하며 해명을 요구할 것 같은데요.”
“........!”
거침없는 발언에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이 승강제 방식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무슨 메이저 팀에 마이너 팀에....”
“.......”
“특히 멤버보고 직접 호명해서 반지를 빼앗게 만든 뒤 올라가고 내려가게 하는 방식은 보자마자 한숨부터 나왔어요.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PTSD 엄청 세게 올 겁니다.”
난 굉장히 진지하게 일침을 가했다.
“설마 애들이 이거 하면서 웃고 떠드는 예능 분위기 연출해 주기를 기대한 건 아니죠? 그러면 착각인 거고 눈물을 뽑아낼 작정을 하고 이런 방식을 도입한 거라면 크게 실수한 거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아니, 애들을 왜 이런 식으로 울려요? 드라마를 연출해서 감동으로 울게 만들어야지... 이건 아니죠.”
대표님은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제작사, 방송사 측은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난 그런 이들은 모두 외면했다.
어차피 저들에게는 큰 결정 권한이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뮤직 넷 CP님.
저 분이 결국 모든 결정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한참 고민하던 CP님이 천천히 입을 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