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예능 출연 >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이돌 천국 촬영이 끝났다.
"정말 재미있는 촬영이었어요. 다음에 또 출연해주실거죠?"
"부르시면 얼마든지요."
헤어질 때, 전화번호 교환이라도 요청해볼까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각별히 몸조심을 해야 할 시기였다.
잘못하다가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소속사와의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일단 뒤에서 츄이의 매니저가 눈을 부릅뜬 채 감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현 소속사와 그룹을 먹여 살리는 소녀 가장이었다. 괜한 짓을 해서 오해를 살 일은 막아야 했다.
"우리 다음에 또 봐요."
의미심장한 인사.
그렇게 나와 츄이의 첫 만남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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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그날 방송이 2주 분으로 나뉘는 일은 없었다.
대신 화려하다 못해 정신이 산만해 질 것 같은 편집으로 내 예능감과 춤 실력에 특히 포인트를 줬더라.
[ 댄싱 머신 탄생! ]
"......."
저놈의 자막은 어떻게 좀 안 되나?
이 프로그램은 편성시간이 굉장히 애매하다.
수요일 오후 여섯시.
첫 예능 방송이니 만큼 가족, 그게 안 되면 친구들과 함께 모여 시청하고 싶었지만 일정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나는 차 안에서 휴대폰으로 아이돌 천국을 시청하며 또 다른 예능 촬영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고품격 음악 토크쇼 뮤직 가든!"
이름과 달리 음악과 크게 없는 예능 출신 호스트 네 명이 출연해 게스트들을 이슈거리로 두들겨 패는 프로그램이다.
미래에도 계속 인기를 끌고 갈 엄청난 장수 프로그램이지.
그나마 다행인 이게 바로 토크쇼라는 것.
한 마디로 아이돌 천국과 달리 입만 잘 나불거리면 된다!
"그런데 김민 군이 춤을 그렇게 잘 춘다고요?"
"얼마 전에 아이돌 천국 최 피디를 만났는데, 김민 저 친구 칭찬을 그렇게 많이 하더라고. 어떤 음악이든 틀어주면 바로 바로 춤이 나온데!"
"오, 그래? 그러면 봐야지!"
... 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아니, 그 피디는 그렇게 안 생겨서 왜 이렇게 입이 싼 거야?!
"자, 음악 아무거나 한 번 틀어줘보세요! 랜덤 플레이 댄스라고 하던가요? 그거 우리도 한 번 해봅시다!"
네 명의 호스트들이 등을 떠미니... 어쩌겠나?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
이후로는 거의 내 독무대였다.
사실 나 말고 함께 출연한 게스트가 두 팀이 더 있었는데, 입담이 좋아서 초반 분위기를 잘 리드했다. 덕분에 나는 위기감을 느꼈고.
그런데 이 랜덤 플레이 댄스를 보여준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나에게 넘어왔다.
그리고 호스트들이 온갖 것을 물어왔다.
"아니, 정말 시중에 발표된 댄스곡 안무를 다 외웠어요?"
"언제부터 춤에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춤으로 시작된 질문은 자연히 날 섭외한 근본적인 이유, 바로 작사, 작곡, 그리고 아이작 이스트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아이작 이스트 처음 만나게 된 상황이 궁금해요."
이 프로그램은 말이 토크쇼지, 출연한 게스트들 간의 분량 싸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뭔가를 많이 보여주거나, 정말 재미있는 썰을 공개해서 오랫동안 호스트와 촬영 팀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내가 놀랐던 이야기들을 위주로 썰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 그렇게 처음 블랙 로즈 본사에 도착했는데, 다들 아시죠? 뉴욕, 특히 맨해튼 부동산 정말 미친 듯이 비싼 거."
"어우, 잘 알죠!"
"거기 내 딸 친구가 유학중인데 단칸방 월세가 한 달에 300~400만원이 넘게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역시 잘 아시네요. 뉴욕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라 그런지 집값이 굉장히 비싸잖아요. 그런데 그 회사 본사 건물이 있는 곳이 무려 소호였어요. 우리로 따지면 가로수 길 같은 곳이요."
"와, 본사가 소호 한복판에 있다고?"
"블랙 로즈 거기 대체 얼마나 큰 곳이야?"
"아이작 이스트 포함해서 북미 지역에서 웬만큼 유명한 흑인 음악 뮤지션들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곳이래요. 아, 제가 거기 사진 찍어서 작가님에게 드렸는데...."
화면에 내가 겸사겸사 찍어둔 사진 자료들이 보여진다. 당연히 사전에 블랙 로즈 측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사항이었다.
"겉모습은 고풍스럽죠?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요. 저렇게요."
"우와...!"
"뉴욕 맨해튼, 그것도 소호에서 저렇게 크고 화려한 건물 갖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굉장하네!"
이슈를 좋아하는 호스트들답게 내가 사진 자료까지 첨부해서 보여주는 뉴욕 작업기에 굉장히 흥미를 보인다. 함께 출연한 두 명의 게스트들은 아예 말하는 것조차 잊은 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나는 마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기분으로 사진 자료를 그때그때 바꿔가며 썰을 풀어간다.
그리고 대망의 아이작 이스트의 맨해튼 저택!
"우와아아!"
"이야아...!"
안 그래도 비싼 맨해튼에 저렇게 큰 규모의 대저택이라니... 놀라는 게 당연하겠지?
상업지구 빌딩과는 또 다른 개념이니.
이제는 호스트들도 넋을 잃은 채 한 마디씩 한다.
"그래미 수상자 정도 되면 저런 일도 가능하구나."
"돈을 대체 얼마나 벌어야 저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요? 그것도 맨해튼...."
"아시겠지만, 뉴욕은 집을 매매하는 것도 어렵지만 사서 유지 관리하는 것도 보통이 아니에요. 일단 다달이 내야 하는 세금만 해도 뭐...."
"아, 그렇지. 그것도 그런데... 김민 군은 뉴욕 출신도 아니고, 이제 겨우 고 1이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잘 알아요?"
"아, 제가 부동산, 주식, 투자 이런 것에 진짜 관심이 많아요."
"오, 그래요? 실제 투자 좀 하고 있는 게 있어요?"
"물론이죠. 저 지금까지 프로듀서 월급과 곡 팔아서 번 돈 모두 모아서 투자하고 있어요."
"오, 정말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재테크에 대한 이야기로 점프!
돈 이야기라면 환장을 하는 아재들답게 이번에도 역시 분량 조절이고 나발이고, 나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버린다.
"주로 어떤 종목에 관심이 많아요?"
"어, 그런데 공중파에서 이런 이야기해도 되나요?"
"아니, 어떤 종목에 얼마 투자했는지 밝혀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식 시장에서 본인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종목에 대해 견해를 말해달라는 것뿐인데 그게 뭐 이상해요?"
"그리고 아무리 똑똑하다고, 고1이 하는 이야기에 막 엄청 관심을 보이고 그러지는 않아요. 그냥 흥밋거리로 넘어가겠지."
호스트들이 적극 대화 참전을 유도한다.
"아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냥 속 시원하게 좀 말해 봅시다. 예능에서 이런 이야기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특히 미성년자 출연자하고. 재미있잖아요? 해보자고요!"
촬영 팀도 고개를 끄덕 끄덕.
역시 굉장히 흥미를 보이는 눈치였다.
이쯤에서 내가 아는 미래 지식을 슬쩍 하나 꺼내본다.
"저는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환경 보호에 대한 이슈가 전 세계적으로, 정말 강하게 몰아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기업들도 이익과 효율 중심의 논리를 무작정 펼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호오, 환경 보호라...."
"친환경 농산물, 다양한 대체 에너지 개발 소식... 전 이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 어린 친구가 나하고 생각하는 게 똑같네! 사실 나도 올해 초부터 그렇게 생각해서 그쪽 관련 이슈와 종목 정보에 관심이 많았거든!"
"어, 저도...!"
춤 이야기 했다가 미국 이야기 했다가 갑자기 주식, 그 중에서도 환경 문제 이슈로....
정말 주제 따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진행되는 토크쇼였다.
다른 게스트들은 이런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해 입을 떼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런 식의 막가는 대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의 오랜 애청자였다.
이 호스트들이 평상시에는 실없는 아저씨들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상파 메인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십 년 넘게 끌고 갈 정도의 능력자들이다. 나이에 걸맞게 경제, 그 중에서 특히 돈과 관련된 이슈를 좋아하는 편이고.
아이돌 그만두고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특히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나하고는 관심사가 잘 맞을 수밖에 없다.
촬영 막바지.
호스트들이 즐거운 얼굴로 날 칭찬한다.
"아, 이 친구 뭘 좀 아는 친구야. 대화도 잘 통해서 좋아!"
"하, 살다 살다 이제 갓 데뷔한 17세 청소년이랑 국제 사회, 주식 이슈 같은 것으로 이렇게 신나서 떠들어 보기는 처음이네."
"아 매력 있어 저 친구."
나에게 큰 호감을 가진 호스트들은 급기야 이런 요청을 하기 이른다.
"김피디. 우리 민이 고생 많이 했잖아. 마지막은 신곡 한 번 보여줄 기회 정도는 주는 거 어때?"
"맞아. 우리 그래도 음악 토크쇼잖아요!"
"노래 한 번 들어봅시다!"
오오, 이게 웬 떡?
지상파 인기 예능에서 신곡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청률과 영향력을 생각하면 단 몇 초에 불과할 지라도, 그 파급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다.
"감사합니다!"
난 즉각 기타 한대를 들고 간이 무대로 올라가 연주와 노래를 시작했다.
이렇게 지상파 인기 예능, 뮤직 가든도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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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의 팬 카페는 빠른 속도로 급성장 중이었다.
데뷔 음원이 꾸준히 순항 중이었고, 음악 방송에서도 훌륭한 수준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 민이는 요즘 가요계에서 보기 힘든 타입 같아요~ 작사 작곡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
┗ 저는 사실 다른 것 보다 노래 그 자체로 팬이 됐어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첫 소절을 딱 듣는 순간 여행에 대한 갈망이 막 피어오르더라고요.
┗ 전 아직 학생이라 여행은 그냥 꿈만 꾸고 있었는데... 뮤직 비디오 보고 친구들이랑 방학 때 같이 가보기로 했어요.ㅋㅋ
한편으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 왜 예능 출연을 안 하는 걸까요? ]
┗ 신비주의로 가려는 건가? 그런 거 싫은데.... ]
┗ 에이, 설마요.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다행스럽게도 불만이 커지기 직전 예능 출연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예능돌 츄이가 진행하는 뮤직 넷의 아이돌 천국에 출연한다는 것이다.
[ 오, 아이돌 천국! 이거 진짜 좋아하는 방송인데...! ]
┗ 다행히 신비주의 전략은 아니었네요. 안심....
┗ 그런데 혼자 출연해서 괜찮으려나요. 예전 유정연 슈퍼스타 출연분 보니 예능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 저도 그게 조금 걱정됨. 저 방송에 게스트가 그룹이 아니라 솔로로 혼자 출연하는 것도 굉장히 드문 일이라 어떤 식으로 재미를 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마치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심정!
아이돌 천국은 극단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제목 그대로 아이돌을 위해 존재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출연자 대부분이 아이돌이었고 심지어 진행자도 아이돌이다.
게스트로 출연하는 아이돌의 팬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팬이 아닌 다른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매력적인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츄이의 예능감, 진행 실력이 남다른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문 진행자의 수준까지는 아니다.
[ 왜 첫 예능을 하필 아이돌 천국으로 잡은 건지 모르겠네요. 지상파 유명 프로그램 좀 돌아다니면서 얼굴 알린 다음에 투입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
┗ 그러게요....
아직 어른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팬들은 김민에 대한 걱정과 소속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방송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김민이 출연한 아이돌 천국이 방영됐다.
'제발 평타만 치자!'
'재미있으려고 보는 방송을 걱정하며 보게 될 줄이야!'
팬들 중 덕질이 처음인 이들은 유난히도 긴장하며 방송을 시청한다.
[ 오늘의 아이돌! 김민 씨 나와 주세요! ]
츄이의 소개 멘트와 함께 댄스 신고식의 시작!
'여기서 꿀잼과 노잼이 가려진다던데....'
'춤은 잘 추니 최소한 아쉬운 소리는 안 듣겠지?'
그런데 걱정이 무색해졌다.
올드 록의 리듬에 맞춰 덩실 덩실 춤을 추며 등장하는 김민!
그때 갑자기 카메라가 확대되며 세상 진지한 얼굴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스스로에 취한 김민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 모습에 일차적으로 웃음이 한 번 터지고.
'어어?'
'뭐, 뭐야?'
요상한 춤과 야릇한 눈빛으로 전환하더니, 촬영 팀에게 다가가 한복판에서 섹시 댄스를 추며 헤집어 놓는 모습에 또 한 번 터진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츄이를 타깃으로 잡고 가까이 다가가 커플 댄스를 시도한다.
츄이가 이것을 받아줬다.
'뭐야, 왜 호흡이 잘 맞아?!'
'잘하는데? 뭐지?'
그렇게 댄스 신고식은 성공!
이후 진행 과정은 더욱 볼만했다.
[ 문 라이트라는 친구들과 함께.... ]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독특한 오디션 도전기.
[ 우리 회사하고 뮤직 넷하고 진행 중인 초특급 거대 프로젝트가 있는데.... ]
난데없는 초대형 스포일러 시도로 촬영 팀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츄이가 미인계를 썼기 때문이라며 뻔뻔하게 잘못을 떠넘기기도 했다.
지루할 틈이 없는 시간들의 연속!
백미는 바로 랜덤 플레이 댄스!
아이돌 천국의 히트 코너였는데 그 방식이 굉장히 남다르다.
[ 참고로 말씀드리면, 웬만큼 알려진 그룹의 노래는 자제해주세요. ]
[ 제가 웬만큼 댄스곡 안무는 다 알고 있거든요. 라일라 히트곡 후속곡까지 포함해서요. ]
이 자신만만한 멘트에서 비롯된 기상천외한 도전.
한 마디로 어떤 댄스곡이라도 일단 공식 발표가 되었고 자료가 남아 있다면 무조건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심한데...?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어떤 노래를 틀어도 즉각적으로 안무를 펼쳐 보이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광경에 방송을 시청하던 팬들은 넋이 나가 버렸다.
'아니, 저게 대체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