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진정한 갱스터 >
맨해튼에 돌아왔다.
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해본 뒤 확신했다.
“저 이제야 알았어요.
“뭘 알아?”
“맨해튼이야 말로... 제 마음의 안식처!”
“.......”
“바로 영혼의 고향이라는 사실을요!”
대표님은 한숨을 쉬며 말씀하신다.
“창피하게 거리에서 이러지 좀 말고 빨리 와.”
“천천히 가죠. 오늘 급할 일도 없잖아요.”
“왜 할 일이 없어? 오후에 블랙 로즈 사옥 가서 킴벌리 존스 대표 만나기로 했잖아!”
“아.”
“그렇게 말했는데 또 잊었지? 아무튼 빨리 와. 오늘 바빠.”
정말 맨해튼 감성에 빠질 시간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호텔에 도착해 짐만 던져두고 바로 블랙 로즈 사옥으로 이동했다.
“어서 와요!”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의 CEO이자 아이작 이스트의 부인인 킴벌리 존스 대표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녀는 나를 향해 말했다.
“한국에서의 활동 굉장히 인상 깊게 지켜봤어요! 뮤직 비디오도 여러 차례 감상했고요!”
오... 조금이지만 말하는 게 들린다!
폭풍 영어 공부가 조금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함께 소파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통역 없이 대화를 경청했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내용이 들린다!
“엔 플라워 미국 진출 건에 대해서는....”
“상세한 프로모션에 대해서는 한국에서의 결과를 지켜봐야....”
엔 플라워 미국 진출 시도에 대한 건이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이번에 친분을 다지게 된 계기로 블랙 로즈와 진행하려는 모양이고.
‘그런데 전생에 엔 플라워가 미국 진출에 성공했던가?’
아시아에서는 이미 성공을 넘어 인기 그룹으로 자리 잡은 그룹이다.
하지만 미국 진출 시도 건은...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양반, 미국병 아직 완전히 치유된 게 아니었군.
“아, 추가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민.”
“......?”
뭐지?
나 부른 거 맞나?
눈치껏 대답해본다.
“네, 네?”
“사실 아이작 이스트의 음악을 우리 회사 소속 아티스트 몇 명이 이미 감상했는데...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어요.”
...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겠지?
“그, 그런가요? 그것 참 기분 좋은 일이네요. 하하하.”
“그래서 말인데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어진 제안은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곡 하나... 여력이 된다면 한 세 곡 정도, 힙합 알앤비 음악으로 만들어 줄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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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비는 미국 최고 작곡가 대우로 맞춰주겠다고 했다.
그 내용을 듣고 기겁을 했다.
한국 곡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에.
너무 과하다는 생각에 손을 내저었더니 킴벌리 존스 대표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우리 회사의 모토와 깊은 관계가 있어요. 항상 최고를 추구한다는 것.”
“아....”
“그런 의미에서 책정한 금액이에요. 우리는 최고의 음악을 구매했다.”
“오오...!”
난 감탄하며 슬그머니 대표님을 쳐다봤다.
“야! 나도 업계 최고 액수로 책정해줬잖아! 여기 단가가 너무 센 거야!”
“누가 뭐라고 했어요?”
“너 방금 곡비 비교하면서 날 힐난 하는 눈으로 쳐다봤잖아!”
함께 저녁 먹으면서 생각했다.
‘사실 쟁겨둔 곡이 없는 건 아니지만....’
킴벌리 존스 대표가 원하는 곡 스타일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아이작 이스트에게 줬던 것 같은 힙합 알앤비 음악이다.
본토 감성을 잘 담아낸....
기회가 왔으니 냅다 수락하긴 했지만 염려가 된다.
그때 그 곡은 온전한 내 능력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기에.
‘영감님!’
그 분이 오셔야만 한다.
파티 일정은 내일.
그러나 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밤늦도록 하는 파티라 난 참여하지 못한다.
그때처럼.
거리에서 뉴욕 갬성을 만끽하며 영감님이 오시기만을 간절히 기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발... 제발 영감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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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센트럴 파크를 산책했다.
이 모든 것이 몸과 마음을 차분히 하여 언제 방문할지 모를 영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나저나 센트럴 파크는 역시 멋진 곳이네.’
조깅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괜한 의욕이 꿈틀거리지만 오늘은 산책 후 가볍게 스트레칭 하는 수준으로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끝까지 산책 코스를 돌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좀 늦게 오시려나?’
크랩 샌드위치와 멕시코 콜라로 아침 식사를 때웠다. 그리고 타임스 스퀘어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가면서 록펠러 센터도 먼 발치에서나마 잠깐 구경도 해보고. 출근길로 바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맨해튼 아침 감성을 느껴본다.
그리고 마침내 타임스 스퀘어에 도착했다.
커피를 한잔 주문해서 비어 있는 의자에 착석한 뒤 넓은 빌딩 숲과 광장을 둘러본다.
아직까지는 아침이라 꽤나 한적한 편이다.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인 뉴욕.
그 중에서도 바로 맨해튼.
수많은 샐럽들이 거주하며 화려하게 사는 곳이기도 하고, 유학생과 직장인들이 무거운 월세에 허덕이며 힘들게 살아가기도 한다.
잘 사는 곳은 굉장히 화려한데 할렘처럼 무법지대로 알려진 지역은 무척 험악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내가 보고 싶은 곳은 바로 그런 지역이지만... 위험하니 자제해야겠지?
다만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봤던 광경들로, 이미지를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는 있다.
상상할 수...는 있지.
그런데 그걸로 충분할까?
“말콤 X 대로도 가보고 싶고 할렘 메인이라는 125번가도 가보고 싶은데....”
뭔가가 꿈틀거린다.
이상한 기분.
가봐야 할 것 같은...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에라. 가자!”
지하철을 통해 그 유명한 할렘에 입성했다!
그런데....
“그냥 흔한 맨해튼 거리인데?”
내가 상상했던 무법 지역 이미지가 아니야!
물론 몇 가지 남다르게 보이는 부분들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인구 90% 이상이 흑인들이고, 거리 곳곳에 그들만의 특징적인 부분들이 녹아 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상가 외벽 유리 전체가 방탄유리로 되어 있다.
운동하거나 이어폰 착용한 채 덩실 덩실 춤추는 모습도 보이고.
하지만 위협적인 느낌은 전무하다.
그냥 맨해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느낌과 비슷하다.
내심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뭔가 색다른 점이 있어야 영감이 떠오를 텐데....
‘모처럼 왔으니, 사진과 영상이라도 최대한 건져가자.
난 마지막까지 얼굴을 감추고 여행 채널을 운영했던 전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사람들과 내 창작물로 소통을 주고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여행 영상도 참 많이 찍어 올렸는데...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니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내친 김에 여행 채널이나 만들어서 운영해봐야겠다.
오늘부터 나도 뮤튜버~!
그런데 아시아 꼬마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녀서 그런걸까?
“안녕. 이곳에 무슨 일이야?”
“오, 패션 좋은데? 특히 신발이 멋있어!”
“뭐야. 뮤튜브 촬영 하는 거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인사를 건네거나 말을 걸어온다.
이런 건 한국에서는 경험해 보기 어려운 일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영어 쓰는 사람과 마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두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고 대화에 응해본다.
그래야 빨리 영어 실력도 늘고 현지 문화에도 익숙해 질 수 있을 테니.
빨빨 싸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져서 현지 음식점에 들어갔다. 외관은 허름했지만 현지인들이 무척 많은 곳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금방 요리가 나왔다. 촬영부터 하고, 느긋하게 즐기려는데 옆 테이블의 흑인 무리가 말을 건넨다.
“이봐. 너 뮤튜버야?”
“그건 이제 시작해 볼 참이고.”
“뭐?”
“사실 난 한국에서 온 프로듀서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데 블랙 뮤직에 대한 영감 좀 얻으려고 이곳에 방문한 거야. 할렘이 워낙 유명하잖아.”
... 라고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래도 짜증내지 않고 끝까지 경청해주더라.
“오, 코리아 프로듀서? 이봐. 이 친구도 뮤지션이야. 클럽에서 DJ를 하고 있어.”
커다란 덩치에 붉은 스냅 백을 눌러 쓴... 얼핏 노토리어스 B. I. G를 닮은 사내가 씩 웃는다. 커다란 주먹을 내밀기에 나도 가볍게 부딪쳐줬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출연한 음악 방송 영상을 보여줬더니....
“뭐야, 가수였어?”
“프로듀싱도 하고 가수도 하고....”
“오오!”
말이 많지만 긍정적이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난 옆으로 다가가 제안했다.
“이봐. 식사 값 내가 낼 테니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블러핑이라는 이름의 갱단이라고 했다.
“갱이었어?”
내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니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오해하지마. 우리는 건실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를 들어 보니 현지인들이 말하는 갱에 대한 개념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그러면 네가 생각하는 갱스터란 뭐야?”
나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드레드 머리의 흑인 미남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책임감 있게 일을 하며 내 가족을 부양하고 지키려는 사람들.”
일행은 그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 영상을 촬영 중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휴대폰 카메라에도 상세히 담긴다.
“마약 빨고, 총 들이밀며 강도짓이나 하며 인생 허비하는 녀석들은 그냥 바보 같은 놈들이야. 그런 건 갱스터가 아니야. 진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 목숨을 걸고, 건실하게 합법적인 일을 하며 가족과 친구들을 부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오... 멋지다.”
“그것을 위해 뭉친 것뿐이야. 우리를 가만히 놔두라고, 건드리면 너희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엄포 같은 거지. 이런 게 갱스터야. 외부에 알려진 건 빌어먹을 영화나 만화 같은 매체 때문에 변질된 거라고.”
그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한심한 놈들도 어느 정도 한몫 하긴 했지만.”
갱스터. 갱스터라...
그 분이 온다!
“잠깐만 기다려 봐. 방금 기가 막힌 악상이 떠올랐거든.”
자리에 주저앉아 백팩에서 노트북 하나를 꺼내 펼쳐든다.
[ 똑똑. ]
[ 나 또 왔어! 잘 있었지? ]
그 분이 오셨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영감님!
애타게 기다렸는데...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셨어요!
우리 변덕스러운 영감님은 내가 작업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법이 없다. 난 그것을 굉장히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 위험을 감수하고 그 자리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오호.”
“이거 봐라?”
식사 값을 대가로 할렘 가이드 투어를 해주기로 했던 블러핑 갱단이 관심을 갖는다.
그러건 말건, 난 순식간에 비트를 찍고 멈블랩으로 1차 가이드 녹음까지 완료한다.
제목은 갱스터!
아니, 이건 어감이 좀 약하지?
음... 그래.
“Don’t Touch Me가 좋겠군.”
나 건드리지 마! 뭐 이런 의미다.
집에 가서 이들이 말한 진정한 의미의 갱스터에 대해 심도 깊게 다뤄볼 생각이다.
여기 방식대로 거칠지만 낭만 있게.
[ 끝났으면 나가도 되지? ]
[ 나 간다? ]
그리고 타이밍 좋게 영감님이 떠나가셨다.
잘 가세요! 고마웠어요! 언제든 또 와주세요!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우와... 너 진짜 대단한 뮤지션이었구나!”
“끝내주는데? 그런 곡을 단번에 완성해 버리다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친절한 갱단이 큰 눈을 끔뻑이며 놀랍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난 노트북을 챙겨 가방에 넣고 말했다.
“가이드 계속 해야지? 다른 장소도 좀 안내해줘! 저녁 식사도 내가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