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예상하지 못햇던 제안 >
이른 아침.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대표님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씀을 건네신다.
“민아. 너 됐데.”
“뭐가요?”
“어제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에게 본 이드라실 오디션. 합격이래.”
“.......?”
내가 영화 배역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심지어 내 인생 영화였던 ‘노아’ 시리즈의 오디션에?
당사자인 나나 연락을 받은 대표님이나 어이없기는 마찬가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분명 우리 둘 다 기대감은 눈곱만큼도 안 가지고, 그냥 추억, 혹은 방송 에피소드 소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됐다고?
그때 문이 열리며 이정연 팀장이 뛰어 들어온다.
“소식 들었어요? 민이 씨 이드라실 배역 오디션 합격했다고 연락 왔어요!”
“너한테도 연락 갔어?”
“네? 그, 그러면 대표님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방금 내가 합격 소식 통보했어.”
“아....”
“그건 그렇고 너... 머리라도 좀 말리고 오지 그러냐. 무슨 샤워 하다가 급히 뛰쳐나오기라도 했어?”
말 그대로, 얼굴과 머리카락이 촉촉한 수준이 아니라 축축 하다.
몸도 가운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 상황.
“아....”
얼굴이 빨개진 이정연 팀장님은 조용히 몸을 돌려 우리 숙소를 나간다.
대표님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쟨 가끔 가다가 저렇게 허당기질을 발휘하더라.”
“대표님도 좀 그랬으면 좋겠는데....”
“응?”
“허당 기질이요. 메일, 매 시간 발휘하지 좀 말고 저렇게 가끔씩만 발휘해주면 여러 사람들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
아침 식사를 하며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갔다.
“오전에 계약 진행하고 오후에 카메라 테스트 다시 한 번 하자고 하네요.”
“무슨 카메라 테스트를 또 해?”
“분장 제대로 하고 한 번 해보자고 하네요.”
“아하.”
이드라실.
훗날 중간계의 영웅이라 불리게 될 ‘노아’ 파티에서 마법을 담당하는 요정 족으로, 나이가 어리고 세상 경험이 부족한 탓에 굉장히 천진난만하고 사고도 많이 친다.
그런데 워낙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고, 요정답게 아름답고 신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진지한 노아 파티에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계약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이드라실 캐릭터를 떠올리고 있었다.
캐릭터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팬 입장에서야 원작 캐릭터 표현에 집중해주는 게 좋겠지만 그래서야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존재감이 사라져 버린다.
결정적으로,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이 만드는 영화 ‘노아’시리즈는 원작과 꽤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예정이다. 마법과 신비로운 세계관에 보다 깊숙이 몰입하고, 모든 것을 진지하게 해석하며 최대한 개연성을 맞춰간다.
분장에 무려 두 시간이 소요됐다.
‘잭슨 스튜디오’의 전문가들이 날 ‘이드라실’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며 묘한 기분이 사로잡혔다.
처음에는 솔직히 동양인 요정이라고?
그거 반발이 심할 텐데... 그리고 그게 그림이 맞나?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나 스스로도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분장을 시작하니 그 결과물이 놀라웠다.
동양인도, 그렇다고 서양인도 아닌... 순백의 순결한 요정!
내 피부 톤이 원래 희고 투명한 편이지만 최고 전문가들의 손길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우유보다 희게 변했다.
얼굴 생김새도.
이게 정말 내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답게 변했다.
나르시시즘같이 들리겠지만, 내 얼굴에 내 스스로가 반해 버릴 지경이다. 나도 그런데....
“........”
“........”
주변 사람들은 아예 넋을 잃었다.
대표님과 정연 팀장님은 물론이고 심지어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조차도.
검은빛이 도는 얇은 가죽 바지에 속이 살짝 비치는 하얀 블라우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황금빛 머리카락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린다.
특수한 컬러 서클 렌즈를 착용한 눈동자 역시 순금으로 세공을 한 것처럼 황금색이다.
마지막 터치가 끝나자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전신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본다.
뭐냐.
나 왜 이렇게 예뻐?
걸그룹으로 데뷔해도 충분히...?
‘어어어! 정신 차려! 이러면 안 돼!’
몽롱하게 풀리려는 눈동자에 힘을 콱 주고, 괜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입술이 너무 미끈미끈하고 반짝거리는 것 같은데, 아무리 요정이라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을까요?”
“아냐. 적당해.”
“분칠 너무 많이 한 거 아니예요? 온 몸에 새하얀 페인트를 쏟아 부은 느낌인데....”
“딱 좋아.”
“.......”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
지금 눈에 완전히 콩깍지가 쓰여 있다.
그는 완전히 홀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노아 원작에 보면 이드라실에 대해 이런 묘사가 있지. 남녀노소. 모두를 빨아들일 미의 결정체.”
어, 나도 보긴 했는데... 그래서 그게 저라고요?
“사실 이 묘사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고 정말 생고생을 했었지. 그런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의문도 들었고 그런데....”
그는 씩 웃었다.
“바로 내 눈 앞에 있었군.”
크로마키 스튜디오로 이동해서 레이피어, 갑옷 등의 무구를 착용해가며 다양한 이미지 샷을 촬영했다.
내 나름 검술도 펼쳐보고 정령을 부르는 의식이랍시고 대충 우아한 현대 무용 스타일의 춤도 한 번 춰보고.
“좋아! 아주 좋아!”
“그렇지! 이번에는 다른 동작으로... 오, 그거 좋군!”
왜 갑자기 ‘잘한다 잘한다’ 짤이 떠오르는 건지...
아무튼 난 열심히 재롱을 부렸다.
가 편집본 결과물은....
“오오...!”
“우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다.
“정연아. 지금까지 우리가 민이 미모를 너무 활용을 못 했던 것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저도 하루 종일 반성했어요.”
정연 팀장님이 날 보며 말한다.
“다음부터는 이미지 컨셉부터 먼저 만든 뒤 곡 작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도 공감해.”
저기 내 의견은요?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았지만 몸이 피곤했기에 눈을 감았다.
정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뜬금없이 할리우드 진출이라니.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뜬금없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기쁘기보다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품에 안겨 있는 두툼한 봉투가, 지금 내가 겪은 일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슬며시 눈을 떠서 봉투 안을 확인해본다.
계약서와 노아 1편 대본집.
내가... 전생에 그렇게 열광했던 판타지 블록버스트 ‘노아’ 시리즈에 출연하게 되다니...자랑하고 싶은데 제작 발표회까지는 비밀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
가능하면 가족에게도 알리지 말란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토퍼 잭슨 작가와 파티장에서 촬영한 사진도 올리지 못하게 됐다. 만에 하나라도 그 사진을 보고 정황을 유추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좋냐?”
“.......”
고개를 드니 운전 중이던 대표님의 흐뭇한 표정이 보인다. 룸미러를 통해서.
“아직 실감이 안 나요.”
“그치? 솔직히 나도 그래. 야, 사실 내 꿈이 빌보드 핫 100에 내 곡 올리는 거였는데... 이게 따지고 보면 그 이상 가는 성과라고 볼 수 있는 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노아 시리즈의 중요 배역에 캐스팅된 건데....”
음악인으로서 대표님의 꿈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한때 나 역시 빌보드를 희망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성과는 그에 못지않다고 볼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에 책 판매 1억 부에 빛나는 노아 시리즈에....
“오늘 일은 당분간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오늘 일 공식 발표될 때까지 회사 사람들에게도 말 안 하려고.”
굳이 그렇게 까지...?
“여기 저기 말하고 다니면 복이 달아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왠지 이번 일은 굉장히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음, 그 말에는 저도 공감해요.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말 안 하려고요.”
내 동생이 노아 시리즈 열혈 팬인데.
집에 책 전집도 있다!
오늘 사실을 알려주면 처음에는 불신하다가, 나중에는 좋아 죽으려고 하겠지? 그리고 입이 근질근질해서 친구들에게 열심히 자랑하고 다닐 테고.
아빠도 엄마도 안 그런 듯 보이지만 자랑하는 거 참 좋아하시는 분들이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기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나 오늘 정말 너무 행복하다. 내 제자가... 우리 아티스트가 미국의 거장들에게 크게 인정받는 날이 오다니....”
결국 울먹이는 우리 대표님.
정연 팀장님은 진작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계셨다.
나 역시 괜히 창밖을 바라본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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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이스트의 새 싱글이 발매됐다.
1. let me dance
2. Manhattan Dreaming
3. locomotion
첫 번째 트랙은 <시간 있어요?>의 리메이크.
두 번째는 내가 맨해튼의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얻어 만들었던 힙합 알앤비 음악.
세 번째는 아이작 이스트의 오리지널 음악이다.
재즈 힙합의 거장답게, 모든 음악에 그 특유의 고급스러운 재즈 장르가 섞여 있었는데, 지금까지 발매한 음악과 달리 신나고 흥겹게 편곡됐다.
타이틀은 두 번째 트랙 Manhattan Dreaming.
곡을 주고 내가 어디서 영감을 얻었는지 상세하게 말해줬는데, 바로 그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뮤직 비디오를 촬영했다.
센트럴 파크라든지, 브로드웨이라든지....
맨해튼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과 거리의 풍경을 정말 멋있게 담아냈다.
첫 무대는 그 유명한 세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라는 프로그램에서 공개할 예정이란다.
그는 우리에게 방청을 권했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미국에 머무를 수도 없고,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됐거든.
떠나는 날 아침.
놀랍게도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이 마중을 나왔다.
그가 대표님께 권했다.
“이 친구 재능이 너무 아까워. 앞으로 미국에서 해야 할 일도 많을 텐데... 그냥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하는 게 어때? 맨해튼에 좋은 하이스쿨이 많아.”
순간 대표님과 정연 팀장님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이 열정적인 설득을 시작했다.
“사실 내 옆에 두면서 가르치고 싶은 것이 많아. 크게 될 수 있는 친구야. 노아 시리즈 외에도 활약할 수 있는 곳이 많고. 어때?”
“........”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대표님.
날 흘끔 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락 줄게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줘.”
비행기 안에서.
한참 동안 고민하던 대표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작 이스트와 킴벌리 존스 대표가 같은 말을 했었어.”
“네?”
“옆에 두고 가르치고 싶다고. 학교나 집 같은 건 자기가 도와줄 수 있으니 널 미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건 몰랐다.
그런데 왠지 그 말이 쉽게 납득이 된다.
파티 때 나를 정말 자기들 아들처럼 옆에 끼고 다녔으니까.
“나도 너한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많은데... 솔직히 말하면 나보다는 아이작 이스트 부부와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 곁에 있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 난 솔직히 널 미국에 유학 보내고 싶어. 넌 어떻게 생각해?”
“저는....”
사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적응하려면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가는 게 좋잖아요?”
“가고 싶다는 거지?”
“네. 하이스쿨부터 시작하면 미국 생활에 훨씬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학교 졸업하면 바로 맨해튼 음대나 줄리어드 스쿨 같은 곳 지원해서 학교 계속 다녀도 되고....”
“그런데 너 혼자 정말 괜찮겠어? 독립도 그렇고, 타지 생활은 특히 더 만만하지 않거든.”
내가 나이가 몇 갠데...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난 당당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미국에서 정착하고, 더 많이 배워서 우리 회사 미국 진출에 도움 될 수 있도록 할게요.”
“성장하는 건 좋은데 회사 문제까지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건 나나 정연이 같은 사람들이 감당할 몫이지. 아무튼 알았어.”
대표님도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미국에 유학가자. 필요한 일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