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두 가지 대안 >
장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은 골라도 하필 이걸....”
딱히 달라진 것도 없었다.
자기 목소리로 가이드 보컬 집어넣고, 킥을 비롯한 악기 질감 조금 바꾼 게 전부였다.
후렴구 편곡 구성이 조금 바뀌고 중간에 댄스 브레이크가 추가되긴 했지만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얘는 열심히는 하는데 실력이 안 늘어.'
너무나도 어설프게 손을 댔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걸 나한테 들려주려고 한 거지?'
제 딴에는 끝내주는 곡아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게 이미 발매된 음악이고, 자기가 겨냥했던 김민이 원작자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심지어 이 곡은 자신이 당당하게 들려줬다가 알맹이가 빠졌다는 소리를 듣고 망신만 당한 전적이 있지 않나?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하고 싶은 말이 태산이고, 그 중 80%는 꾸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 되지. 최대한 좋게 말하자.'
장진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 전화를 들었다.
"......."
통화를 마친 찬민은 한 동안 멍한 기분이 휩싸였다.
'이게 그 놈이 만든 별빛의 숲이라고?'
솔직히 말하면 딱 한 번, 그것도 잠깐 들었을 뿐 깊게 감상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미운 놈 음악 들어서 뭐해?
남 잘 되는 거 봐서 뭐하려고?
이런 마음이 강했기에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계속 사방에서 칭찬이 쏟아지니 더더욱 듣기 싫어졌던 것도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이게 그 음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안 들어볼 수가 없었다.
음악을 재생해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려 세 번을 반복해서 감상해보고서야 깨달았다.
'맞네.'
허탈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대표님에게 전화해서 자신만만하게 떠들었던 소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홧김에 작업 파일을 모두 삭제해 버린다.
그리고 한참 동안 얼굴을 묻고 민망함과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내 생에 최고의 곡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 웅웅웅!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자가 하나 씩 날아온다.
흘끔 보니....
[ 오, 노래 좋은데? 뭐야. 이거 우리 곡이야? ]
[ 뭐야, 형 할 수 있잖아? 진작 이런 곡 좀 만들지...! ]
[ 오, 처음 듣자마자 느낌이 왔어. 이 곡으로 다음 싱글 가는 거야? 난 찬성! ]
매트로 보이즈 멤버들이었다.
들뜬 마음에 멤버에게도 모두 곡을 보냈는데, 이제야 답변이 날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곡 초이스 하면서 이렇게 의견이 일치됐던 적이 없었는데....'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성격만큼이나 추구하는 음악 성향이 모두 달라서 앨범 구성 할 때 항상 애를 먹었다.
나에게 좋았던 곡은 꼭 멤버 누군가가 결사반대를 해서 빠졌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 모처럼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곡이.....
'제길!'
순간 끊어 오르는 분노에 휴대폰을 집어 던져 버린다.
'어떻게 하지?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변명해야 망신당하지 않고 조용히 잘 넘어갈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던 찬민은 주섬주섬 휴대폰을 들어 다음과 같이 답변을 보냈다.
[ 아직 결정된 건 아니야. 다른 곡도 만들고 있으니 조금 더 두고 보자. ]
답변은 보지도 않고 심호흡을 한다.
'수월하게 가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어. 아예 처음부터 내 힘으로 쌓아올린다!'
이 바보 같은 상황을 만회해야한다!
그보다 더 좋은 곡으로!
찬민은 이를 악물며 다시 곡 작업을 진행했다.
@
점심시간, 대표님이 전화를 걸어오셨다.
[ 너 전에 내가 들려줬던 거 기억해? ]
"어떤 곡이요?"
[ 별빛의 숲 댄스 버전. ]
"아, 그거... 왜요? 쓰시려고요?"
내가 쓰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버리겠다고 했던 게 똑똑히 기억난다.
와, 역시 톱 프로듀서는 마인드부터가 다르구나! 내심 감탄했었는데 왜 이제 와서...?
잠깐 머뭇거리던 대표님은.
[ 어쩌다가 매트로 보이즈 애들에게 들려주게 됐는데 애들이 너무 좋아해서... 그냥 혹시 모르니까 미리 허락 맡아두려고 전화한 거야. ]
에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해 보고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별빛의 숲 이미 발매됐고 차트에도 남아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하시려고요?"
[ 기본 코드 진행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싹 바꿔야지 뭐. ]
"그런 거라면 굳이 저한테 허락 맡을 필요도 없잖아요. 코드 진행이 같은 음악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는데."
[ 그것과 이건 상황이 조금 다르지. 별빛의 숲을 재편곡한 음악을 뜯어서 재조립하겠다는 거잖아. ]
"아...."
[ 그리고 너한테 아무 말도 없이 그런 일 벌였다고 치자. 나중에 곡이 나왔는데 네가 들었어. 너라면 바로 알아차리겠지? 이게 어디서 나온 곡인지. ]
"그렇겠죠?"
[ 그러면 배신감이 크겠지? ]
"어마어마하겠죠?"
[ 그래. 그러니까 미리 말해두는 거야. ]
"그렇군요."
[ 아직 결정된 건 아니야.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결국 그쪽으로 결론이 날 것 같아서.... ]
말을 들으면서 뭔가 또 다른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슬며시 찔렀다.
"저한테 숨기고 있는 거 있죠?"
[ ....... ]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전화를 끊고 난 한참을 웃었다.
"왜?"
"무슨 일이야?"
반지희와 최명중이 기다렸다는 듯 물어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차마 말 못해주겠다.
대표님이 비밀을 지켜달라며 신신 당부했기 때문이다.
최명중은 몰라도, 반지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오늘 한 시간 만에 전교생이 알게 되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별 거 아니야."
실망하는 반응을 외면하고 현재 상황을 되짚어본다.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데이터베이스 폴더 접속 권한까지 얻은 찬민.
쓸 만한 비트를 물색하다가 사용 금지 폴더를 발견, 거기서 별빛의 숲 댄스곡 버전을 듣게 된다.
Starlight Forest?
제목이 너무 유치하잖아!
그런데 찬민은 이 제목에 완전히 꽂힌 모양이다.
음악도 마음에 들어서 본인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 띠링! ]
알림 메시지가 울렸다.
[ 비밀 꼭 지켜라. ]
당부 메시지.
그렇다.
지금 받은 곡은 찬민이 만들었다는 가이드 버전이다.
애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용한 곳으로 이동.
이어폰을 연결해 음악을 들어본다.
"푸핫!"
웃음만 나왔다.
대표님이 나름 잘 편곡했던 음악을 오히려 이상하게 바꿔 버렸다.
중간에 삽입된 댄스 브레이크는 곡 분위기와 어울리지도 않고 질감도 무슨 노래방 음원 수준이다.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겠네.'
아이돌 치고 이 정도라면 쓸만하지만, 프로 관점에서 보면 딱 아마추어 수준이다. 아마 이전 곡들은 이런 식으로 스케치만 하고, 디테일은 전문 프로듀서에게 맡기는 식으로 작업을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 곡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 곡을 쓰지는 않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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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찬민은 작업실을 떠나지 않고 곡 작업에만 몰입했다.
그 동안 날아온 연락들은 정말 급한 게 아니라면 모두 무시했다.
'더 좋은 곡을 만들어야 해!'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Starlight Forest를 넘을 곡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멤버들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곡 작업을 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
그 이유를 찬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 곡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인상 깊게 들은 곡이 무의식을 맴돌며 창작에 계속 영향을 주는 경우.
지금이 그랬다.
Starlight Forest,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별빛의 숲이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존재감이 강해진다.
'미치겠네, 정말....'
어떻게 하지?
그때 연락이 왔다.
'대표님?'
무슨 일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 작업 잘 하고 있냐? ]
"네? 아, 뭐...."
[ 잘 안 되고 있나보네. 맞지? ]
"......."
[ Starlight Forest 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지? ]
"어... 어떻게 아셨어요?"
[ 나도 그런 경우 종종 겪으니까. ]
"대표님도요?"
[ 창작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겪어. 야, 사람 다 똑같아. ]
장진영 대표의 따스한 음성에 울컥한 찬민은 저도 물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 일단 푹 자. ]
"... 네?"
[ 너 지금 며칠 째 잠도 제대로 못 잤지? 매니저가 걱정 많이 하더라. 불러도 대답도 없다는데.... ]
"........"
[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개운 하게 샤워 한 번 한 뒤 회사로 나와. 나하고 밥 먹자. 내가 맛있는 순대국밥 사줄게. 알았지? ]
"......."
[ 나머지 이야기 이어서 듣고 싶으면 꼭 내 말대로 해. 내가 해답을 알려줄 테니까. ]
다음 날.
푹 자고 샤워까지 끝마친 찬민은 멋진 옷을 입고 회사로 출근했다.
마침 날씨도 좋아서 기분이 꽤나 상쾌했다.
"어, 왔어?"
반갑게 맞아주는 대표님.
"잠깐 기다려. 이것만 끝내고."
잠시 집무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해답을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런 게 있긴 한 걸까?'
잠시 후.
"됐다. 가자."도착한 곳은 순대국밥 집.
'또 여기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작업에만 매달렸기에 배가 고프기도 했다.
"맛있겠다. 먹자!"
"잘 먹겠습니다."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그렇게 지겹던 국밥이 왠지 입에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식사를 모두 마친 뒤에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너에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할게."
두 가지씩이나?
정신이 바짝 들었다.
찬민은 의자를 당겨 앉은 채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하나는 Starlight Forest를 제목, 가사, 구성... 싹 뜯어 고치는 거야."
"... 리메이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걸 레퍼런스로 삼아서 너만의 창작곡을 만들라는 거지."
"아...."
"두 번째는 샘플링을 하는 거야."
"샘플링이요?"
"기타, 신스, 오케스트레이션, 피아노 연주... 어떤 파트든 네가 꽂힌 부분이 있을 거 아냐? 그 중 하나를 따서 아예 새로운 곡으로 만드는 거지."
생각에 잠긴 찬민에게 장진영을 설명을 이어갔다.
"두 가지 방법이 다 싫으면 그냥 아예 새로운 곡을 만들면 돼. 하지만 지금 네 상황 보니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왜냐면 넌 지금 Starlight Forest에 제대로 꽂힌 상황이니까. 맞지?"
찬민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스승에게는 차마 거짓말을 못하겠고.
인정 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원작자 찾아가서 허락을 맡아두는 게 좋을 거야."
"...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원작의 감성을 빌리고 싶은 거잖아. 샘플링은 말할 것도 없고, 레퍼런스로 삼겠다고 해도 Starlight Forest 느낌을 따라가고 싶다면 말은 해둬야지. 내가 재편곡하긴 했지만 원작자가 엄연히 따로 있는데. 그게 매너지."
"........"
"난 대안 제시했어. 생각해보고 결정해. 이도저도 아니라면 굳이 지금 새 싱글 넣지 말든가. 이번에는 그냥 준비된 싱글만 발매해. 군 전역 후에 하겠다고 해도 전폭 지원 약속은 지킬 테니까."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찬민은 망설임을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식에게 굽히는 건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다. 차라리 내가 어떻게든 하고 말지.'
미친 듯이 레퍼런스를 찾고, 회사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며 마음에 드는 비트를 물색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Starlight Forest의 존재감이 점점 커졌다.
문제도 하나 있었다.
[ 우리 언제 녹음해? 그냥 Starlight Forest로 하자. 다들 이거 좋다는데 망설이는 이유가 뭐야? ]
[ 야, 곡 빨리 픽스 해야 다른 작업도 이어서 할 거 아냐. 녹음은 언제하고 안무는 언제 짤 거야? 뮤직 비디오도 만들어야지. 할 게 태산이다. ]
멤버들이 재촉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빨리 곡을 정해야 컨셉, 안무, 아트 디렉팅 등등. 다른 많은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군 입대 시기를 고려하면 사실상 여유 기간이 그리 많았다. 이 정도에서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것이 마음을 급하게 만드니 더더욱 창작이 될 리가 없다.
결국....
'안 되겠다.'
찬민의 의지가 꺾였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찬민은 장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김민하고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
"네?"
대표님이 전해 온 말에 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찬민이가 너 만나고 싶다고. 나보고 자리 좀 마련해 달랜다. ]
"왜요?"
[ 말했잖아. Starlight Forest 사용 관련 허락 맡고 싶다고. 내 말 제대로 안 듣지? ]
"........"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예상이 깨진 것이다.
와....
이 새끼는 자존심도 없나?
그걸 기어이 쓰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