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원수의 의뢰 >
미국 입국이 결정됐다.
“뉴욕 맨해튼으로 먼저 가서 녹음부터하고 방송에 출연할 거예요. 굿모닝 아메리카. 토크쇼 몇 개. 그리고 그 토크쇼에서 아이작 이스트와 함께 공연도 하게 될 거고요.”
“한국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미국 진출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내 말에 최명규 매니저님이 씩 웃으신다.
“저도 어이없습니다. 분명 제가 담당하게 된 사람은 데뷔한지 1년도 안 된 신인 가수였는데... 무슨 중간 과정을 건너 뛴 느낌이에요. 바로 월드 스타 클레스라니....”
“그건 아니죠. 이번 방송 출연은 어디까지나 아이작 이스트의 화제성 덕분이니까요.”
“어쨌든 전 세계에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셈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룸 밀러를 보며 빙긋 웃으시는 최명규 매니저님.
한편, 난 아까부터 긴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광고 촬영이라니!
사실 데뷔 후 제안은 많이 왔지만 아무래도 첫 이미지가 중요하기에 선택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적잖은 시간을 신중히 고민한 끝에 선택한 촬영은 바로....
“김민 군 이번이 첫 광고 촬영이 맞죠?”
“네. 맞습니다.”
“저 소식 듣고 깜짝 놀랐잖아요. 다른 유명 기업에서 광고 제안 많이 보냈다고 들었는데...혹시 ‘미래 네이쳐 샴푸’ 광고를 첫 광고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오늘 촬영 작업을 이끌 여성 감독님의 질문이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미래 기업이 사회 공헌 활동으로 유명하잖아요. 특히 미래 네이쳐 샴푸를 구매하면 수익금 일부를 소외 계층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해 사용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저도 작게나마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결정했어요.”
바로 이 부분이 내가 첫 광고 촬영지로 결정한 이유였다.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가?
“아직 17세 밖에 안 됐다고 들었는데... 생각이 참 예쁘네요. 좋아요. 촬영 멋지게 한 번 해볼까요?”
미래 네이쳐 샴푸는 천연 추출물로만 만들어진 천연 샴푸였다. 회사에서 날 모델로 선택한 이유도 내가 데뷔곡에서 보여준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가 크게 반영됐단다.
그래서 촬영 역시 내가 뮤직 비디오에서 보여준 배경 장소와 이미지들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숲과 바다.
자연으로부터 온 샴푸라는 컨셉이니 최대한 맑고, 깨끗하고, 신선하고, 상큼한 모습을 최대한 보여주면 된단다.
그래서 강원도 원평해수욕장을 다시 찾아가 하루 종일 촬영을 진행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다음 날에는 스튜디오 촬영도 따로 진행했다,
그렇게 이틀간의 광고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더니 네이처 샴푸가 몇 박스가 쌓여 있더라.
미래 기업에서 보내준 선물이었다.
어쨌든 광고 모델이 됐으니, 당분간은 이 제품을 애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겠지?
그런 생각에 제품을 몇 개나 챙겨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우우웅!
전화가 걸려왔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이 양반은 또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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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규 매니저님과 함께 삼성동 초고층 빌딩에 위치한 고급 중식집을 방문했다.
그래. 일전에 한 번 찾은 적이 있던 곳이다.
다름 아닌....
“여기예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바로 저 사람.
KM 엔터테인먼트 김만수 회장과 함께.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아니,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아시아를 뒤흔들고 있는 슈퍼스타가 함께였다.
김만수 회장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동행인을 소개한다.
“여기 이 친구 누군지 알죠? 제이미예요.”
KM 엔터테인먼트가 배출한 대한민국 톱 티어 걸 그룹 <스위트 데이>의 리더이자 리드 보컬 제이미.
재미교포 출신인 그녀는 데뷔 이전부터 충격적일 정도로 화려한 비주얼로 주목을 받았다.
데뷔 직후에는 탈 아이돌 급의 춤과 노래 실력으로 팀 내에서는 물론, 개인 활동으로도 정점을 찍었다.
2013년 작년.
그녀는 솔로 가수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선배님, 정말 팬입니다.”
“저도 김민 군 팬이에요.”
미소 짓는 얼굴로 대답하는 그녀.
난 놀라서 반문했다.
“선배님이요?”
“네. 진짜예요. 제 플레이리스트에 김민 군 데뷔곡 저장해놨어요. 맨해튼 드리밍 포함해서요.”
“아....”
“특유의 감성이 제 마음에 굉장히 와 닿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회장님 덕분에 이렇게 기회를 얻게 되었네요.”
진심이 가득 담긴 말에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제길, 옆에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저 늙은 마귀 영감탱이가 처음으로 예뻐 보일 정도였다.
식사를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김만수 회장은 내 미국 활동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혹시 본격적으로 미국에 진출할 계획이 있나요? 지금 김민 군이 만든 음악이 이렇게 화제가 되고 있잖아요. 분명 뭔가 제안이 있었을 것 같은데...?”
확신이 담긴 눈빛.
옆에서 제이미가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으니 굳이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일주일 후 뉴욕 출국 일정이 잡혀 있어요.”
“오오!”
터져 나오는 탄성.
“녹음 하고, 방송 출연 몇 개 하고....”
“방송이라면 어디에 출연하는 거죠?”
“굿모닝 아메리카요.”
“ABC 간판 아침 프로그램이군요! 또 다른 곳은요?”
“토크 쇼 몇 개... 그런데 제 단독 출연은 아니고 아이작 이스트하고 같이 출연하는 거예요. 그쪽이 주고, 저는 그냥 살짝 얹혀가는 느낌으로.”
“그래도 그게 어딘가요? 무려 미국 지상파 인기 프로그램 출연 기회를 얻은 건데... 그거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그런가요? 저는 잘 감이 안 와서....”
“지상파 인기 프로그램은 벽이 굉장히 높기로 유명하죠. 정말 큰 이슈가 있거나, 어지간히 인기 있는 샐럽이 아닌 이상 출연 제안조차 하지 않으니까요. 어설픈 로비 질로 어떻게 해볼 수 있을만한 곳도 아니고요.”
저 양반, 자기 일도 아닌데 굉장히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의 평생의 염원이었다.
우리 대표님 이상으로 엄청난 공을 들여 미국 진출을 시도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 제이미까지 데려온 이유는 아마도....’
“제가 너무 흥분했죠? 잠시 만요. 물 좀 마시고....”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제가 일전에, 바로 이 자리에서 김민 군에게 말했었죠? 저 역시 미국 진출을 꿈꾸고 있다고.”
“네.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꾹 참았어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 판단이 잘못되었던 거죠. 진정한 천재에게는 완숙을 위한 시간 같은 건 의미가 없었던 거예요.”
표정과 음성에 진심이 가득하다.
이 양반. 정말 나를 엄청난 천재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살다 보니 참... 이런 날이 오네.
그는 제이미를 한 번 바라본다.
그 시선에 정감이 가득하다.
“전 제이미를 미국 시장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인재라고 생각해왔어요. 가치는 충분히 입증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진지하게 요청한다.
“저는 김민 군이 제이미의 미국 진출을 위한 싱글을 프로듀싱 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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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집무실에 도착하자 대표님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
“비밀인데요.”
“뭐?”
“어지간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번 건은 너무 커서 저도 신중히 고민을 좀 해보려고요. 그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
당황한 나머지 입만 뻥긋거리는 대표님.
이 양반은 장난치는 재미가 있다니까.
“농담이에요. 별 거 없었어요. 그냥 가수 한 명 프로듀싱 해달라는 이야기였어요.”
“야이...!”
욕을 내뱉으려다가 애써 화를 억누른 대표님.
“흐흐. 솔직히 많이 놀라셨죠?”
“야! 그러면 안 놀라겠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만수 회장 만나고 왔다며? 그 인간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 같은 인간인 거 몰라.”
“에이, 아무리 그래도 경쟁사 대표라고 그렇게 깎아내리는 건 좀 심했다.”
“야. 내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니까?!”
“됐어요. 실망이에요.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아 답답해!”
리액션이 좋아서 놀리는 맛이 있다.
뭐, 장난은 이쯤해두고.
“제이미하고 함께 나왔더라고요.”
“스위트 데이의 그 제이미 말하는 거 맞아?”
“네. 미국 진출 시키고 싶다고, 싱글 프로듀싱 해달래요.”
“음, 확실히 대단한 가수긴 한데 미국은 좀....”
“김만수 회장님은 프로듀서만 잘 만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고 있던데, 대표님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제이미는 그냥 국내용이야. 아시아까지가 한계야. 미국 시장 하고는 안 맞아.”
대표님이 정확하게 봤다.
전생에 제이미는 아시아 시장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미국 시장까지 진출했다.
섹시한 힙합 여전사 컨셉으로.
결과적으로 시원하게 망했고, 돈과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됐다.
미국 진출 실패에 대한 리스크도 굉장히 컸다.
밀리언셀러 가수였던 그녀는 하락세를 거듭하더니 2020년. KPOP의 전성시대가 시작될 때쯤에는 과거의 레전드 정도로만 남게 된다.
김만수 영감탱이 최대의 실책이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미국 진출에 있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미국에 진출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어.”
현지로 날아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방법.
현지의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계약해서 물량 공세를 퍼붓는 방법.
세계적으로 열풍이 발생해 자연스럽게 진출로 이어지는 방법.
“김만수 회장이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거든. 현지 법인을 설립하는 해외 직접 투자 방식으로 진출하려는 거.”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미국은 소수의 대형 매니지먼트가 음악 시장 8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어. 그리고 음원과 음반의 유통, 공연 기획, 광고... 여러 분야에 손을 뻗고 있기도 하고.”
“아....”
“이런 대형 회사의 지원 없이 규모도 작고 노하우도 없는 회사가 자체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야.”
“그러니까 대표님은 제이미의 문제보다는, KM의 진출 전략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게 크고, 제이미도 조금 문제 있지.”
“문제요?”
“진출에 앞서 타깃 층부터 정해야 하는데, 이미 그쪽은 시장은 블랙 뮤직이 대세야. 그런데 제이미는 블랙 뮤직을 하지 않잖아.”
“그렇죠.”
“아이돌 시장. 그러니까 8세부터 14세의 로우틴을 타깃으로 삼아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이 시장 점유율이 25%정도 밖에 되지 않아. 20대, 30대 시장이 55%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자, 그러면 제이미는 소수 층인 10대 시장을 공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지?”
“그렇게 되네요.”
“미국 아이돌 시장 주류는 백인 가수야. 거길 비집고 들어가겠다고? 그게 쉬운 일일까?”
내 생각에도 굉장히 힘든 일로 보인다.
“초기 투자비용이 어마어마할 텐데,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는 못해도 초기 투자비용을 어느 정도 회수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은 내야해. 그래야 현지 법인이 유지되지. 그런데 로우틴이 타깃이라면 이게 힘들어진단 말이야. 방금 설명해준 이유 때문에.”
“세상에 참 쉬운 일이 없네요.”
대표님의 설명 중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스타더스트가 미국 진출에 성공했던 이유는 뮤직 비디오 하나가 엄청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것으로 자연스럽게 미국 진출이 이뤄진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당시 현지 파트너가 무려 유니버설 뮤직 그룹이었다.
대표님이 설명한 미국 진출 성공 요건에 모두 부합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아프네.”
물을 한 잔 마시고, 대표님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설마 해주겠다고 한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에요.”
“거절했어?”
“그것도 아니에요. 그 자리에서 바로 선을 긋는 게 조금 그래서 생각 좀 해보고 답변 드리겠다고 했죠.”
“잘 했어. 바로 거절하는 것과 고민 좀 해보는 시늉이라도 하고 거절한 건 차이가 크지.”
사실, 조금 고민하기는 했다.
KM이 싫고, 김만수 회장은 내 인생을 망친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제이미를 프로듀싱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는 밀리언셀러의 슈퍼스타니까.
그런데 대표님의 말을 들어 보니 제이미의 미국 진출 실패는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나서서 실패 이유를 떠안을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제이미 와의 인연은 이대로 끝?
‘뭔가 아쉽지.’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김만수 회장이 가장 아끼는 뮤지션 제이미.
내가 그녀를 가로챈다면 어떨까?
틈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미국 진출 실패 직후.’
애지중지하는 보물을 빼앗긴다면... 김만수 회장은 굉장히 마음이 아프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확 구미가 당긴다.
사실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제이미는 굉장히 매력적인 가수였다.
프로듀서라면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보물이다.
‘지금부터 미리 빌드 업을 잘 해두면 나중에 결정적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시도라도 해볼까?
실패해도 딱히 손해될 것은 없지만 성공하면 대박이니까.
‘그렇다면 어디 한 번 그림을 한 번 그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