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새 거주지 >
뉴욕 행 비행기 안에서 대표님이 말씀하셨다.
“도착하면 짐만 풀고 곧바로 부동산 임장 돌아다닐 예정인데, 그 전에 선택해. 너 어떻게 싶은지.”
“뭘 어떻게 해요?”
“너 뉴욕에서 하이스쿨 다니는 동안 살 집 말이야.”
“아....”
“세 가지 방법이 있어. 아이작 이스트 저택에서 생활하는 거.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의 그 마천루에서 생활하는 거. 그리고 너만의 개의 공간을 갖는 거.”
“음....”
마음 같아서야 두 번째가 가장 끌린다.
왜냐면 내 생에 언제 그런 초호화 럭셔리 아파트에서 살아볼 날이 있겠나?
더욱이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은 일 때문에 집에도 잘 안 들어온다는데....
“대표님이 추천하는 건 뭐예요?”
“난 사실 세 번째 방법을 추천하고 싶지. 다른 이유를 다 떠나서 렌트라지만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다는 건 정말 경험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거든.”
“흠.”
“그리고 그렇게 해야 가족, 회사 차원에서 챙겨줄 수 있단 말이지. 아이작 이스트의 저택은 부부의 생활공간이고 파티도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 너에게 추천하고 싶은 공간은 아니야.”
“저도 공감해요. 손님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러면 세 번째 방법으로 할래?”
세 번째가 가장 좋은 선택지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작과 감독님이 꼭 자기 집에서 머물라고 강조하던 게 걸린 말이지.’
굉장히 섭섭해 할 것 같다.
하, 여기저기서 사랑 받는 남자의 삶이란....
그때 내 뇌리에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내 거점은 따로 마련해두고, 두 집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 되죠 뭐.”
“...응?”
“뉴욕 갬성을 진하게 느끼고 싶을 때는 감독님 집에 가고, 사람이 그립 거나 뭔가 맛있는 걸 막 먹고 싶을 때는 아이작 집에 가고...딱히 하나만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
“왜요?”
“넌 세상 참 네 편한 방식대로 사는 구나.”
“왜, 한국에서도 독립하지 말고 그냥 우리 집에 머물지.”
“어? 그거 굉장히 좋은 생각인데요? 마침 강남에 있고 집도 굉장히 넓고 방도 많고 혼자 살고....”
“... 야.”
어이없어 하는 대표님께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설마, 제가 싫어요?”
대표님은 대답 대신 심란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중얼거린다.
“저거 커서 어떻게 되려고 벌써부터 저러지?”
뉴욕에 도착!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해본다.
“하아, 이젠 고향땅을 밟는 기분이네요. 나 뉴요커 다 됐다봐!”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이동하자. 오늘 해야 할 게 많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풀자마자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맨해튼 현지 부동산 중계업자와 만나 임장을 시작한다.
“바로 첫 번째 집을 보여드리죠.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이전 삶에서 뉴욕에 거주하며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며 여행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실제 인터넷으로 렌트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었고. 한 달 살기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에.
그때 염두에 두고 있던 집은 영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그림 같은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월세 200에서 300사이의 원룸 스튜디오.
당시에도 맨해튼에 대한 갈망이 굉장했기에 다른 지역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하지만 그 가격대에는 정말 사람 살만한 집 찾는 게 힘들더라.
솔직히 월세 300만원이면... 보증금만 충분하면 강남 아파트에서도 살 수 있는 금액인데 말이지.
그때 체감했다.
말로만 듣던 부동산 지옥, 맨해튼의 실상은.
여기는 억대 연봉자도 힘들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곳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한 달 살기조차 포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착하기 전까지는 원룸 스튜디오 정도를 생각했는데....
“여긴... 너무 과하잖아요.”
“전혀 과하지 않아. 너 학교 다니면서 곡 작업도 하고 그러면 이 정도 컨디션은 되어야지.”
대표님이 진지하게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씀하신다.
“내 제자, 홀로 타국에 유학 보내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마음이 편하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감동을 준다고?
당신 우리 대표님 아니지?!
이후 집을 살펴본다.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어지간한 것들은 다 옵션으로 제공된다. 컨디션도 굉장히 깔끔해서 딱히 흠잡을 곳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뷰가 조금 아쉽네.’
상상하던 맨해튼 야경을 이 집에서는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앞에 펼쳐진 어퍼 이스트사이드 자체가 워낙 부촌이라 깔끔하고, 그 나름의 멋을 품고 있긴 하다.
세 번째는 미쳤다.
헬스 키친에 위치한 신축 콘도로 63층에 위치한 곳이다. 방 한 칸, 화장실 하나에 뷰도 끝내준다. 내부 컨디션은 신축이라 말할 필요 없이 최상급!
문제는....
‘월세가 4000달러?’
한국 돈으로 500만원이 훌쩍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런 미친 곳을 보여준 중개업자는 굉장히 열정적으로 어필을 한다.
“커뮤니티 시설, 옵션, 위치, 조망, 그리고 보안까지. 모든 것이 최고예요. 돈만 있으면 이곳을 강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날 슥 보더니 덧붙인다.
“하이스쿨 다니기에도 굉장히 좋은 곳이죠. 주위에 유명한 학교가 다 있고 교통 인프라도 잘 되어 있습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은 아니야.
거점이고 나발이고 나 그냥 감독님 집에서 살래!
내 집 따위 없어도 좋아!
그런데 대표님의 생각은 많이 다른 느낌이다.
“집 잘 봤어요. 빠르게 결정해서 연락드릴게요.”
눈빛이... 눈빛이 심상치 않다.
세 곳을 둘러보고 나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호텔 카페로 들어가서 음료를 주문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집을 일찍 보는 거예요? 저 유학 오기까지 아직 몇 개월 남았잖아요.”
“음, 생각보다 그 시기가 당겨질 것 같아서.”
“어째서요?”
“아이작 이스트하고 크리스토퍼 잭슨 감독이 너 최대한 일찍 좀 보내달라고 성화야. 트레이닝 해야 할 게 많다나?”
“아....”
“그리고 맨해튼 드리밍 메가 히트치고, 네 미국 방송 활동이 생각 이상으로 좋았던 것도 영향이 있었어. 지금 너하고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단다.”
“오, 그건 반가운 이야기네요.”
“그래서 고민이 많았거든. 네가 우리 회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회사 가치는 쭉쭉 상승하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난 가수들을 성공시켜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널 미국 활동에 집중시켜버리면....”
“참 이상한 고민을 하시네요. 둘 다 하면 되는데...”
“응?”
“미국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국에서도 싱글 내고 곡주고... 충분히 가능해요.”
“정말?”
“물론이죠. 그러니 언제든 말씀만 해주세요. 아, 매트로 보이즈는 빼고요.”
“너 게네들 진짜 싫어하는구나?”
“물론이죠. 딱 질색이에요. 거만해서 아주....”
날 희한한 물건 쳐다보듯 하던 대표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다행이네. 마음 놨어. 너 진짜 한국 활동도 챙겨야 돼. 팬들을 위해서라도.”
“팬뿐만 아니라 텐 믹스 프로젝트에서 파생된 그룹도 꼭 성공시키고 싶어요.”
“네가 언제부터 그런 애사심을... 아, 세아 때문에?”
“다른 애들은 알바 아니고, 세아랑 지희 만큼은 어떻게든 성공시켜주고 싶어요. 다른 회사에 입사한 친구들도 그렇고요.”
“아, 같이 오디션 봤던 그 친구들... 다른 회사에 들어갔어?”
“네. LK하고 네오크루 엔터테인먼트.”
“뭐? 저, 정말?!”
대표님이 경악한다.
그 모습을 보며 왠지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어 잘난 체를 시작한다.
“보자마자 우리 회사에 세계를 뒤흔들 인재가 들어왔다며 LK 사장님과 프로듀서들이 굉장히 기뻐했데요. 네오크루 입사한 친구도 공주 대접 받는다는데.”
“.......”
“또 다른 친구는 가수 꿈을 포기하긴 했는데... 그 친구는 LK 쪽에 입사할 것 같아요.”
“뭐? 아니, 어째서? 우리 회사도...?”
난 짜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떨어뜨렸잖아요.”
“.......”
“아무튼 두고 보세요. 애들 엄청 성장해서 월드 스타 반열에 들 테니까.”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엄포를 놨다.
“제 이름을 걸고 반드시 대표님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 거예요!”
대표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한껏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이게 아무리 그래도 스승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너 오랜만에 혼 좀 나야지 안 되겠다. 이리와 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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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봤던 헬스 키친 콘도를 월세가 아니라 매매 계약을 하기로 했다.
“맨해튼 부동산은 세계 각국에서 진입 못해서 안달인 곳이야. 특히 이런 좋은 조건이라면 사둬서 후회할 일이 없어. 투자 개념으로도 좋아.”
탁월한 선택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맨해튼 부동산 시장은 이후 십여 년 동안은 꾸준히 상승했던 곳이다.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입하려 안달인 곳이기 때문에.
오죽하면 맨해튼에서 진짜 부자는 개인 주차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 의미로 나도 투자 좀 해둘까?’
아니, 그럴 필요 없지.
지금은 비트 코인, 그리고 내년에 본격적으로 활성화될 이더리움에 투자하는 게 훨씬 이익이다.
아무튼 내 입장에서는 고맙다 못해 절을 해도 부족할 일이다. 말은 투자 개념이라고 하셨지만, 누가 봐도 나 때문에 거액을 쓰기로 하신 거니까.
그래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제가 진짜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효도 여행 보내드릴게요.”
“.......”
뭔가 말씀 하시려던 대표님은 포기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미국행 마지막 일정.
바로....
“이쪽이 바로 레이지. 네가 쓴 Don’t Touch Me!를 부를 친구야.”
굉장히 잘 생기고 패셔너블한 흑인 미청년이 날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뭐. 민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지?”
“물론이죠. 고막이 아플 만큼 많이 들었으니까요.”
레이지는 웃는 얼굴로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내가 가볍게 부딪히자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들어 본 최고의 음악이야. 이 은혜는 빌보드 1위로 갚도록 할게.”
와, 패기가 넘치는데?
그런데 녹음이 시작되고 그 말에 결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정말 어마어마한 랩 실력이다.
차후 멈블랩의 대표주자로 이름이 높아지긴 하지만, 그는 트랩 힙합 전문가였고, 그 외에 다양한 장르도 소화할 줄 아는 진정한 실력자였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딱히 주문할 게 없었다.
심지어 작업도 다이렉트로 한 방에 끝내 버렸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그는 녹음실을 나오며 물었다.
“어땠어?”
“온 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그리고 방금 확실히 깨달았어요. 아! 난 랩 음악 하면 안 되겠구나!”
“아냐. 형제는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날 형제라고 불렀어?
내 묘한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듯,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굉장히 다정하게 격려한다.
“이 곡 가이드를 듣고, 그 다음에 최근 발매한 맨해튼 드리밍을 들었는데 성장 폭이 굉장해서 놀랐어. 빨리 여기로 넘어와. 내가 이것저것 가르쳐줄테니까. 친구들도 소개해 줄게.”
아무래도 날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한 듯하다.
내 기억 속, 랩 스타 레이지를 몇 개의 키워드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광기. 카리스마. 신비주의.
지금 내게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의 제안으로 즉석에서 SNS 맞팔을 맺었고, 다양한 컨셉으로 사진을 촬영해서 동시에 업데이트했다. 심지어 내 계정에 찾아와서 추천과 댓글까지 남겨주더라.
[ hey brother! ]
짧지만 임팩트 강한 메시지 아닌가?
그는 정감 가득한 미소로 내게 말했다.
“빠른 시일 내에 보자고. 자주 연락 할 테니 놓치지 말고 받아.”